JMDC훈련 이웃사랑편 12 : 이방인들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보이는 복음 이웃사랑』
제12장 이방인들에 대한 이웃사랑
요약 및 정리 : 박종오 목사

구약에서와는 달리 우리들이 이웃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전부 이방인들이다. 물론 이웃이라고 할 때 넓게는 믿음의 형제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우리들의 이웃사랑의 대상들은 대개는 이방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는 분명한 한계와 지침이 필요하다. 성경에서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한다고 해서 무작정 아무에게나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이방인 이웃들 중에는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사람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그들 중에는 이단들이나 기독교를 대적하는 타종교인들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을 베풀더라도 각별하게 그들의 신앙이나 가치관들을 멀리할 수 있어야 하겠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셨지만, 구약에서처럼 기독교신앙을 파괴하는 사람들까지 수용하라고 하신 것은 아니다. 결코 회개할 수 없는 바리새인을 예수님은 얼마나 비판하셨을까? 이웃을 사랑한다고 그들의 모든 것을 따라가서는 이웃사랑의 대의가 전혀 세워지지 않는다. 이웃을 돕는다고 하면서 오히려 저들의 풍속을 따른다면 그것은 이웃사랑이 아니다.
진멸전쟁
구약에서 하나님이 왜 그렇게 강하게 율법을 강제하셨는지에 대한 해석은 우리가 분명히 알고 있어야 참다운 이웃사랑이 가능해질 것이다. 그 영적원칙이 무너지면 이웃사랑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방의 문화나 가치관, 그리고 그것으로 인한 우상숭배를 저지를 것을 염려하여 이방인들과의 전쟁에서 진멸을 명하신다.
(삼상 15:3)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
사울 왕은 아말렉을 향한 하나님의 이런 명령을 듣고도 모든 가축 중에서 가치 없는 것들만 진멸하고 기름지고 좋은 짐승들은 진멸하지 않고 돌아와서는 그 가축들은 제사로 하나님께 드리려고 했다고 변명했다가 결국 왕의 자리를 다윗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삼상 15:28) 사무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
하나님은 민족의 거룩성과 순수성의 훼손을 염려하셨기 때문에 진멸하라고 명하셨던 것이다. 만약에 우상숭배로 이스라엘의 믿음이 훼손된다면 그 나라는 더 이상 이스라엘이 아니다. 하나님은 조그마한 틈도 허락하실 수가 없다. 이방나라의 풍습이나 종교가 이스라엘 어느 구석에라도 들어오기 시작하면 그것이 올무가 되고 함정이 되어 전체 이스라엘이 사라지게 될 수도 있다.
이스라엘이 장차 정복해야 할 가나안 땅도 예외 없이 우상숭배가 극에 달한 지역이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을 주신 이유도 가나안은 우상숭배가 극심해서 용서받을 길이 없는 민족들이었기 때문이다. 그토록 가나안의 진멸전쟁을 명하셨지만 가나안의 신들은 끈질기게 남아서 유다왕국의 신앙을 훼방하고 어지럽히고 있었다. 북이스라엘과 유다가 멸망할 때까지도 바알숭배는 존재했던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진멸명령을 행하지 않음으로써 일어난 결과는 이방인들의 나라와 큰 차이가 없게 되어버린 것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기에 그들을 고치셔야만 했다. 그 채찍은 그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나라의 지배를 받게 하시고 억압과 압제를 경험하게 하시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뜻은 분명하다 하나님만 섬기면 모든 면에서 복을 주시지만 하나님을 외면하면 재앙을 내리신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 율법과 규례를 지키는 것만이 진정으로 복이 되는 것이다. 왜 이웃사랑을 이야기하면서 진멸전쟁을 먼저 언급해야만 하겠는가? 자기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의 의미와 한계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방인의 풍속을 따르지 말라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의 거룩성을 해치는 행위는 명백한 하나님의 대적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을 무조건 도와야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런 행위로 말미암아 복음의 순수성과 거룩성이 침범당한다면 그것은 결코 시도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웃들의 입장을 존중하되 세속적이거나 우상숭배와 같은 일에 결코 동조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더 이상 관계 지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도 하나님의 이런 거룩성을 지키게 하기 위한 말씀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냥 구약 시대의 특성일 뿐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한다면서 이방문화를 옹호하고 지켜내기 위한 세력이나 행사를 지원하고 있다. 이방 문화는 하나님께서 극도로 싫어하신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문화를 그대로 용납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시는 이웃사랑을 오히려 훼방하는 결과가 될 뿐이다. 그리스도인의 이웃사랑은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왜 멸망했는가? 모든 역대 왕들 중 극히 일부만 빼고는 전부 이방인의 풍습과 문화를 따라갔으며 심지어 제사장들과 고관들 사이에도 오히려 하나님을 무시하는 가증한 우상숭배가 넘쳤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레미야로 하여금 경고하게 하였으나, 그들이 선지자들을 비웃음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갈대아 왕의 손에 넘어가도록 하셨던 것이다.
(대하 36:14) 모든 제사장들의 우두머리들과 백성도 크게 범죄하여 이방 모든 가증한 일을 따라서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거룩하게 두신 그의 전을 더럽게 하였으며
오늘날 왜 기독교가 쇠퇴했으며, 복음이 그 능력을 잃어버렸겠는가? 세속문화의 침투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오히려 지도자들이 거기에 빠져들었기 때문이 아닌가? 거룩성과 순수성은 무시한 채 그저 부흥, 축복, 번영, 성공과 같은 세속문화에 물들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나님의 참된 복을 가장한 기복주의, 하나님의 영적 번영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번영신학, 세상 속에 복음을 전한다는 미명 아래에 세속주의,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세력의 힘에 의존하고 열광하는 맘몬주의가 모두 세속문화요 우상숭배인 것이다. 우리의 이웃사랑은 이방인들 속에서의 긴장 가운데 행해져야 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유다 왕국은 결국 시드기야 왕을 마지막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이방여인에 관하여
제사장 에스라는 포로귀환 후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키기 위한 모든 일을 행하려고 할 때 청천벽력과도 같은 보고를 받게 된다. 그것은 백성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가나안 백성들의 우상숭배의 풍속을 그대로 쫓아 행하고 이방 백성들의 딸들을 이스라엘의 아내로 며느리로 삼았는데 고위층으로 갈수록 더욱 심하다는 것이었다. 가나안의 우상이 여호수아 이후부터 심지어 유다가 망하고 포로로 붙잡혀간 지 70년, 그 후 1차 포로귀환 이후 80여년이 다 되기까지 이스라엘을 훼방하고 더렵히고 있었던 것이다.
(스 9:1~2) 1 이 일 후에 방백들이 내게 나아와 이르되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 땅 백성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가나안 사람들과 헷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과 여부스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모압 사람들과 애굽 사람들과 아모리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 2 그들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거룩한 자손이 그 지방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
이방인의 문화와 풍속이 분명히 이스라엘을 좀먹을 것이 확실하므로 하나님은 반드시 그들을 진멸하라고 명하신 것이었다. 교회는 작지만 세상은 크고 넓다. 세상의 문화는 쾌락과 번영과 정복과 성공을 추구하고 있고,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이 지배하는 사상으로 꽉 채워져 있다. 겉으로는 배려니 소통이니 공평이니 외치지만 전부 다 자기 먼저 잘 되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다. 하나님은 사랑과 용서로 세상을 이기라고 하셨다. 사랑과 용서로 세상을 이기려면 그만큼 영적으로 무장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상황에서 우리의 신앙적 거룩성과 순수성을 지킬 수 있는 무장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진정한 이웃사랑이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이방여인은 세속문화, 인본주의 사상을 가리킨다. 문화는 영적 영역을 포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고, 이방문화를 받아들이다 보면 여호와 신앙은 훼손되고 파괴될 것이 너무나도 명백하다.
그리스도인이 복음의 거룩성을 지켜내지 못하고 이방문화에 젖어 이방여인을 맞이한다면 하나님은 점차 진노의 매를 드실 것이다. 아니면 관심에서 제해버리실 수도 있다. 그것은 구원받지 못한 백성이는 의미이다.
(삿10:16) 자기 가운데에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시니라
이방인에 관한 기준의 변화
이방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고, 이스라엘의 고유한 영역을 침범하는 무리들이었으며, 끊임없이 우상숭배와 쾌락적인 수단들을 총동원하여 이스라엘을 무너뜨리려는 세력들이었다. 하나님은 이 점을 너무나도 잘 아시기 때문에 율법을 주실 때 이방인들을 진멸하여 그들의 사상과 문화 자체가 이스라엘을 해치지 못하도록 강력하게 명령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이방인과의 교류를 금하는 명령을 내려주셨고 예수님조차도 그 당시 백성들의 인식을 따라 말씀하신 것을 살펴볼 때 이스라엘을 훼손하려는 이방인에 대한 시각은 완전히 고착화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런 시각이 예수님의 죽으심 이후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승천하신 후에 임하신 성령님으로 인하여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가 없었고, 언어나 종족의 차이도 없었으며, 남녀나 계층이나 신분의 격차도 없었다. 누구든지 성령 안에 들어오면 모두가 같은 주님의 형제들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동등한 입장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유대인들만을 위해 오시지 않으셨다. 유대인들만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육체의 이방인이 영적인 이방인은 아니라는 것을 사도 베드로를 통해서 성령님께서 알게 해 주셨다. 베드로가 욥바에 있을 때 환상 중에 보자기에 담긴 부정한 음식들을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제까지와는 달리 거룩성의 방향을 유대인에게만 국한시키지 않으셨다. 지금까지는 유대인이라는 한 공동체만 거룩하게 하기를 원하셨지만 이제부터는 그런 기준 자체를 바꾸시겠다는 것이었다. 이제부터는 새로운 인류가 유대인 공동체를 대신하게 하신다는 말씀이었다.
베드로는 고넬료 집으로 갔고 인류 역사상 최초의 이방인 세례의식이 집전되었다. 성령님께서 고넬료의 집안사람들에게 임하셨고 방언을 하게 하셨다. 이 사건을 통해 사랑의 개념도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여태까지는 소위 형제사랑이 이웃사랑이었지만, 이제는 형제사랑에 더하여 이방인들에 대한 이웃사랑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하게 되었던 것이다.
(행 11:1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어떻게 이방인을 사랑할 것인가?
이웃사랑은 이방문화를 배격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선포되는 복음이 아니라 보이는 복음이기 때문이다. 이웃사랑 자체가 기독교문화인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일반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말씀은 ‘원수를 사랑하라’이다. 이방인들과 가장 기본적으로 구별되는 특성이 바로 원수사랑이다. 원수사랑이야말로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가장 표본적인 모델이 되는 것이다. 다른 종교를 믿고 우상을 숭배하며 세속적인 가치관을 따라 살면서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전부 사랑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마 5:43~44)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때문이라는 말씀이다. 복음은 이 땅의 것을 받기 위해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저 하늘의 보상을 받기 위해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늘의 상을 바라보고 달려가는 사람들이다.
(마 5:45)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이웃사랑이란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삶 가운데에서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그럴 때 이웃사랑은 더욱더 하나님께 영광을 드러내고 만방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펼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이방인을 대적자나 원수로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바울을 불러서 그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만드셨다. 이제까지 이스라엘 공동체의 거룩성과 순수함과 하나 됨을 위해 이방인으로부터의 모든 침범을 강하게 막도록 하셨던 하나님께서 오히려 한 사람을 지도자로 택하시고 그 원수 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도록 하신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만큼 육체의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가 사라지게 되었고, 이스라엘의 거룩성과 하나 됨을 명하셨던 하나님께서 영적인 유대인의 거룩성과 하나 됨을 지키는 방향으로 인도하셨던 것이다.
(행 9: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바울은 이방인을 향한 이웃사랑의 본을 삶의 모습이 아니라 영적 사랑으로 보여주었다. 지금은 이방인이라는 표현조차 사용하지 않을 정도로 이방인에 대한 경계가 사라져버렸다. 그 대신 우리에게는 그냥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이웃이라는 개념으로 변경되었다. 오늘날의 이웃은 불신자들을 뜻하게 되었다. 교회에서 이웃이라고 하면 같은 지역에나 일터에서 매일같이 부딪치는 불신자들을 뜻하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이 개방된 상태에서 복음 공동체의 거룩성을 지켜내려면 오히려 원수사랑과 같은 복음적인 문화를 세상을 향해 펼쳐야 가능해질 수 있다. 안으로는 걸어 잠그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이웃사랑을 분출해내야만 하는 것이다. 교회가 폐쇄적이 되면 오히려 교회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이웃사랑을 통해서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사랑이 전달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이웃에게 전파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반드시 이웃사랑이라는 삶을 통해서 본질적인 의미가 함께 전달되어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이웃사랑의 가장 핵심적인 개념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이웃사랑의 극치는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이다. 십자가 고난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이웃사랑의 원형이다. 그리스도의 희생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희생은 목숨처럼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그 사랑을 믿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사랑도 의미가 다 사라져버린다. 우리는 모든 이웃사랑의 행위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넘쳐야 하며 우리의 자랑이나 자기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전달되어야 하는 것이다.
소감문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 역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방인의 벽을 무너뜨리는 말씀을 보게 되면서 좀 더 하나님의 뜻에 가까워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주님이 왜 바울을 첫 번째 이자 두 번째 만남을 동시에 하셨는지 나름대로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만큼 유대인들의 벽을 넘어가는 것이 어려웠던 것이고 또 그만큼 하나님의 기대와 소망이 컸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그래서 바울에게 주신 ‘이방인의 사도’라는 직분이 얼마나 귀한 것이지 새롭게 깨닫게 된다.
‘(행 9: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오늘날 어떻게 해야 모든 것이 개방된 상태에서 복음 공동체의 거룩성을 지켜낼 수 있을까? 이 문구가 내게는 큰 도전이 되었다. ‘안으로는 걸어 잠그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이웃사랑을 분출해내야만 하는 것이다. 교회가 폐쇄적이 되면 오히려 교회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보이는 복음 이웃사랑’을 배우면서 내 입에서, 내 생각에서 자꾸만 강조하게 된다. 이것이 의식의 변화인가?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반복했더니 성도들이 ‘보이는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교회 옆에 있는 부동산 사장님이 교회를 지나가다가 출입문 쪽에 아름답게 꾸며놓은 화분들을 보면서 “우리 앞에도 화분 좀 갖다 놔주면 좋겠네!”라고 하는 말을 듣고는 집사님과 권사님이 예쁘게 꾸며주었다. 그랬더니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님들에게 “이 화분 들꽃교회에서 꾸며주셨어!”라고 자랑을 하신다. 이것이 보이는 이웃사랑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