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마음 제자반

JMDC훈련 이웃사랑편 15 : 영혼사랑과 영적 싸움

김완섭 목사 2025. 6. 16. 15:02

보이는 복음, 이웃사랑

15장 영혼사랑과 영적싸움 

정리 : 박종오 목사

 

 

그리스도인의 이웃사랑이 영혼사랑일 때에 마귀의 대적이 극심하게 나타난다. 곧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웃 영혼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다가갈 때 마귀는 불신영혼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행동을 훼방하게 된다. 이 세상의 영적 싸움은 바로 영혼구원을 향한 치열한 싸움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세상은 마귀에게 속해 있기 때문이다.

 

(요일 5:19)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영적 싸움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그리스도인 자신을 위한 싸움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 영혼을 사랑하기 위한 영적 싸움이다. 자기 믿음을 지키려는 스스로와의 싸움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심이 되고 이웃의 영혼을 사랑하기 위해 싸워야 하는 싸움은 이웃과의 관계가 중심이 될 것이다.

 

영적 싸움의 대상

 

우리의 영적 싸움의 상대방인 마귀의 가장 큰 특징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게 함으로써 창조주 하나님의 인간 구원에 대한 믿음을 훼방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혈과 육으로는 마귀를 상대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는 마귀와 싸워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승리는 오직 하나님께서 싸워주실 때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싸움은 하나님을 강하게 신뢰하고 의지하기 위한 싸움이어야 하는 것이다.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마귀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거짓이다. 하나님은 결코 거짓을 사용하지 않으신다. 모든 경우에 마귀는 거짓을 사용한다. 마귀가 거짓으로 내세우는 존재가 바로 거짓 선지자이다. 사실상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그래서 거짓 그리스도가 이 땅에 무수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거짓 진리를 가르침으로써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만드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래서 거짓이란 마귀의 가장 유효한 수단이 되는 것이다.

 

(요일 4: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때에도 마귀는 여전히 거짓을 사용하여 속이려고 든다. 불신영혼들이 가만히 있을 때에는 마귀도 가만히 내버려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슴에 품고 이웃의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며 섬기려고 하면 마귀는 틀림없이 불신 이웃들의 심령을 좌우하려고 달려들 것이다. 온갖 거짓과 속임수를 총동원해서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환경을 공격하고 마음과 감정을 공격하고 이단 사설들로 공격하고 세상의 육신적인 이치와 사상으로 공격하는 것이다.

 

(요일 4:5) “그들은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그들의 말을 듣느니라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예수님은 무엇으로 마귀를 이기셨는가? 목숨을 주심으로써 이기셨다. 우리가 마귀에게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이 목숨을 건 그리스도의 승리를 의지하는 것이다.

 

그러면 궁극적으로 우리는 왜 싸워야 하는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으로 말로 행동으로 전파하기 위함이다. 결국 이웃사랑이요 영혼사랑이다. 그것을 위해 뚜렷한 싸움을 하는 것이고 그렇게 이웃사랑, 영혼사랑, 복음전파를 행한 후에 넘어지지 않기 위해 더욱 애쓰고 힘쓰라는 것이다. 이웃사랑, 영혼사랑으로 인해서 넘어질 수도 있는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복종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고전 9:26~27) “26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실로 우리들의 모든 영적 싸움은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한, 그리고 이웃의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한 치열한 싸움인 것이다.

 

(6: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세상 풍조와의 싸움

 

그리스도인은 이웃을 돌보면서 자기를 지키는 일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고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그것은 영적 싸움이다. 자신과의 싸움은 곧 마귀와의 영적 싸움을 귀결될 수밖에 없다. 세속과 세상풍조와 직결되는 것이 세상의 전통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전통은 그 어떤 것이든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2: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어떤 면에서 종교적(율법적)으로 가득 채워진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사실은 복음의 소유하지 못한 사람일 수 있는 것이다. 영적 원리는 이웃의 영혼을 사랑하고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우리 자신의 영적 거룩성이 훼손되거나 이웃을 참된 복음으로 접근하기 힘들게 만들 수도 있는 어떤 틈새라도 벌어지지 않도록 영적 싸움을 잘 싸워야 하겠다는 것이다.

 

(고전 8:4)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다가 영적인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오히려 그들의 화려함과 부유함과 편리함에 마음을 빼앗기는 일은 없어야 한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남들보다 더 잘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혼란 속에 빠질 수도 있다. 또한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면서 빠지기 쉬운 함정은 세상이 더 지혜로워 보인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는 어리석어 보일 때가 더 많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혜는 최후의 승리자가 되게 하기 위한 비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지혜는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도록 우리를 비워드리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지혜는 버리기 위한 영적 싸움이며 그러므로 자기와의 싸움이 중요해지게 되는 것이다. 버리기 힘드니까 싸우는 것이다.

 

(고전 3:19)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어디까지 이웃과 함께 할 것인가를 분별하지 못하면 오히려 이웃의 혼탁한 영에 말려들 수 있다. 이웃의 영혼들을 그리스도의 사랑 안으로 들어오게 하려고 하면 반드시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던 마귀의 훼방이 우리를 가로막게 되어 있다. 세상 풍조와 전통과 부요함과 지혜로움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리스도인을 공격한다. 마귀는 두려움과 염려와 거짓과 혼란과 미혹과 유혹을 수단으로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하겠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마귀는 협박은 하겠지만 결코 우리를 해치지는 못한다.

 

(고전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고난과 능욕의 싸움

 

그리스도인들이 고난과 박해를 이겨낼 수 있는 본질적인 원인은 전부 주를 위하여 견디는 것이다. 주가 아니라 자기를 위하는 사람은 절대 끝까지 견디지 못한다. 믿음이란 사는 것과 죽는 것까지 하나님께 전부 맡기는 것이다. 우리가 주를 위해 손해 보는 것이 우리에게 큰 유익이 되기 때문에 주를 위해 죽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적어도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아야 한다.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우리가 왜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하는가? 우리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이다. 복음이란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이다. 이웃 영혼들에게 그리스도의 그 크신 사랑이 전달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살전 2:2)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우리는 이웃사랑의 본질을 알아야 한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행위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세상에 비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귀가 지배하고 있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는 삶이 따라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모습을 나의 행동을 통해 드러내는 삶이다. 교회생활이 아니라 신앙생활이어야 한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불신이웃들을 향한 영혼사랑이어야 한다. 이웃의 영혼을 사랑한다면 그 이웃들과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마귀와 대적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 거기에 필요적으로 따라오는 고난과 능욕을 견뎌야 하나님의 복음은 이웃들에게 전파될 수 있는 것이다.

 

(고후 11:4)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우리의 이웃사랑은 분명한 영적싸움이다. 이웃 영혼들을 사랑하려고 하면 반드시 어려움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연스러운 모습일 것이다.

 

(고후 11: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대적하는 싸움

 

성경은 마귀를 대적하라고 명령한다. 그것이 영적 싸움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마귀를 대적하는 것이다. 마귀를 대적하기 위해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복종하게 되면 마귀를 대적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마귀를 대적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는 말씀이다.

 

(4: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베드로는 마귀를 만나기 전에 대비해야 하는데 그것은 근신하고 깨어 기도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마귀를 대적하라고 강하게 권면한다. 대적자 마귀가 아무리 배고픈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 헤맨다고 해도 주 안에서 깨어있으면서 오히려 대적하면 다 물러간다는 것이다.

 

(벧전 5:8~9)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하나님은 가장 큰 두 계명,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기만 하면 완전하게 지켜주신다.

 

(8: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그리스도인은 크게 보았을 때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해 다시 말하면 이웃의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해 영적 싸움을 싸워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땅에서 먹고 마시는 모든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눈으로 보여주는 것이고, 최종적으로는 불신 이웃들에게 복음이 전파됨으로써 그들의 영혼이 거듭나게 하는 일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웃을 사랑하는 대표적인 삶의 방식이 바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다. 원수를 원수로 대적하면 우리는 마귀에게 대적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원수를 원수로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도와줄 때 그것은 명백하게 마귀를 대적하는 일이 된다. 이웃 영혼을 사랑하기 위해서 실천할 때 우리는 마귀의 대적자로서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12:20~21)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싸움

 

우리의 모든 싸움에는 오직 사랑이라는 무기밖에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사랑을 통해서 마귀와 싸워서 이기도록 해주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게 만들어준다. 우리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전적으로 의지하는 하나님께서 싸우시는 것이다. 그것은 백전백승이다.

 

(고후 10:3~4) “3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4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영혼들을 구원시키기 위해 기도하고 사랑하려고 하면 마귀는 어떤 형태로든 반드시 어려움과 역경을 줄 테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이웃사랑은 인간의 한계 이상의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고전 2:4~5)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불신 이웃들에게 전파하기 위해서는 나눔이든 섬김이든 봉사이든 하나로 마음을 합하는 것이든 목표지점은 영혼구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 밖에서는 모든 것을 견디고 이길 수 없는 것이다. 영혼구원을 위해서는 자기의지를 하나님 앞에 내려놓아야 잘 감당할 수 있고 끝까지 인내할 수 있는 것이다.

 

(고후 6:4~7) “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5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이웃 영혼들을 사랑하다가 어려움을 만나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환난을 만남에도 불구하고 승리의 소망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그리스도인은 모든 어려움 중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는 것이다. 결국 영혼구원은 믿음의 싸움이다. 그 믿음의 증거가 바로 기쁨과 평강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사람들을 말하는데 그들의 정체성은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마귀를 대적하여 이웃의 영혼들을 위해 섬기고 나누고 기도하는 데 어려움이 따르고 문제가 생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우리들의 이웃사랑은 영혼사랑이고 영혼사랑은 영적 싸움이다.

 

(벧전 4: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소감문

 

우리들의 이웃사랑은 영혼사랑이고 영혼사랑은 영적 싸움이다!’

 

마지막 16과를 남겨두고 있긴 하지만 왜 제목을 보이는 이웃사랑이라고 했는지 조금 알 것 같다. JMDC훈련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과정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힘들었던 이유는 내 안에 영혼사랑이 없는 빈 마음이라는 것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 의식속에 이웃사랑은 정말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웃사랑이 이런 것이구나! 라고 알아가는 기쁨, 깨닫는 기쁨을 누리기보다는 나의 무지를 깨닫고 절망하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왜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우리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웃 영혼들에게 그리스도의 그 크신 사랑이 전달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라는 말을 통해 전도의 방향을 다시 수정할 수 있었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하는 이유가 우리의 행위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세상에 비추어야 하기 때문인데 마귀가 지배하고 있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는 삶이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지금까지 영적전쟁의 관점은 마귀를 어떻게 하면 물리치고 영혼을 구원할까? 그 영혼 어떻게 하면 교회로 데리고 와 정착시킬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영적회복을 통해 그 영혼이 주 안에서 평안을 누리고 공동체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할까? 였다. 하지만 이것을 이웃사랑의 관점에서 보지는 못했었다. 아니 이웃사랑영적전쟁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우리들의 이웃사랑은 영혼사랑이고 영혼사랑은 영적 싸움이다?’

이것을 알게 된 것만으로 감사하다. 하지만 감사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깨어지고 무너진 나의 의식을 이제 이웃사랑의 관점에서 영혼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되어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