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복음, 이웃사랑」
제10장 이웃이 되는 것이다
박종오 목사 정리

이웃사랑이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예수님의 목숨을 버리는 희생적인 사랑의 풍성함에서 기인된다는 사실과,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랑이 교회와 성도들을 통해 세상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라는 전체적인 의미가 희미한 상태에서 성립되는 경우가 많다. 돕는 일 자체가 이웃사랑이기는 하지만 그 이전에 전체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무장한 상태에서 마음으로부터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돕는 일 자체가 이웃사랑이기는 하지만 그 이전에 전체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무장한 상태에서 마음으로부터 그들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이웃사랑의 의미를 설명하려고 들려주신 예화에는 강도 만나서 거반 죽어가고 있는 사람과 지나가던 세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율법 교사의 질문에서부터 시작된다. “누가 우리의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이지만 사실 이 질문은 자기를 의롭게 보이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으려는 이론적인 질문일 뿐이다.
(눅 10: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이웃사랑의 행위는 사랑의 근거가 되지 않으면 영적 영향력을 얻을 수 없다. 우리는 흔히 이웃사랑을 전도와 연결 짓곤 한다. ‘영혼사랑’이 아니라 ‘전도’라는 데에 강조점을 두고자 한다. 전도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은 영혼구원이지만, 영혼사랑이라는 개념이 쏙 빠진 채 교회부흥, 숫자 채우기, 전도실적 등과 같은 외적인 개념과 연결되면 전도의 본질은 사라지게 된다.
‘누가 우리의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강도를 만나 다 죽어가는 어떤 사람이 바로 우리의 이웃이라는 말씀이었다. 곧 형제인가 아닌가는 관계없이 무조건 고난당하고 어려움당하는 주변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우리의 이웃이 된다는 말씀인 것이다.
(눅 10: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반드시 행해야 할 이 성직지들은 그 율법을 무시하고 그 강도 만나서 죽어가는 사람을 피해서 지나가버린다.
(눅 10:31~32)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하지만 여행을 하다가 그곳을 지나가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 시신과도 같은 사람을 확인해 보고 강도 만난 그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응급조치를 취하게 된다.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상처를 싸매고 숙소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상처가 다 나을 때까지 주막 주인에게 비용을 대주면서 돌보아달라고 요청한다. 또한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다 갚겠다고까지 했다. 한 마디로 이 죽어가던 사람을 살리는 데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했다.
눅 10:33~35)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예수님은 마지막 질문을 하신다. “우리 이웃이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오히려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누구냐는 질문으로 대치하심으로써 참된 이웃사랑의 정의와 실천 강요까지 제시하셨다.
(눅 10:36~37)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이웃이 된다는 의미
예수님의 말씀 중 핵심구절은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이다. 이 말씀은 강도 만난 사람의 옆에서 이웃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라는 말씀이다. 하지만 더 나아가 이웃사랑의 본질을 생각한다면 그리스도인의 이웃사랑은 이웃의 처지에서 생각해보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 이웃이 되어버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아예 그 사람이 되어버리라는 경우가 아니면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막 12: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개역한글)
사실상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일은 몹시 어렵지만 그러나 내가 만약에 그 사람이 되어버리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그 때부터는 그 사람을 돕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돕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아무리 어려운 일을 만나도 내가 내 일을 하게 되는 것이며, 그렇게 될 때 우리의 이웃사랑은 그 진정성을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상대방을 향한 긍휼의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이웃사랑의 출발점이다.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내 마음이 그 어려움 당하는 사람의 마음으로 변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다. 불쌍히 여김은 사랑이다. 내 마음이 어려움 당하는 이웃의 마음이 될 때 곧 이웃이 되어줄 때 그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긴다.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하는 이웃사랑이란 아예 그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일은 먼저 마음으로부터 사랑이 일어나야 한다.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이웃사랑은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다. 스스로 이웃사람들을 도와주고 스스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그리스도인들보다 훨씬 희생적으로 사람들을 도와주고 돌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웃사랑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희생이 아니면 그 가치가 반감될 수도 있다. 예수님께서 자주 무리들을 불쌍하게 여기셨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과 동일시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고, 그것은 바로 그 사람이 되어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영혼사랑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사도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지 않는 모든 신앙행위는 하나님과는 아무런 관계없는 겉껍데기 행위에 그칠 뿐 아니라 아무 쓸모없는 헛된 것이 될 뿐이다. 베드로는 이것을 위해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다고까지 강조하는 것이다.
(벧전 3:8~9) 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인의 이웃사랑은 형제사랑의 확대 개념이며, 형제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적용 개념이다. 아무리 형제를 위해 죽는 희생으로 사랑한다고 해도 또 다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지 못하고 사람을 차별하여 대한다면 그에게는 그리스도의 이웃사랑이 들어있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마음으로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고 누군가는 미워한다면 거기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들어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잊으면 이웃사랑은 공허한 외침이 될 뿐이다. 마음으로부터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자연스러운 이웃사랑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하겠다.
(롬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몸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그 이웃과의 동일시가 이루어진다면 분명 효과적일 수 있다. 복음은 언어가 아니라 사랑이며, 사랑은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
(요일 3:17~18) 17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그리스도는 자기 몸으로 인간을 구원하셨다. 이웃사랑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진정한 사랑으로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깊은 마음이 있었다고 해도 만약에 몸으로 이웃을 위한 섬김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웃사랑이 결코 될 수 없다.
이웃을 몸으로 사랑하면 크게 세 가지 놀라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첫 번째 결과는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려드리는 일이 된다는 것이다. 마음으로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스스로 그들 자신이 되어줌으로써 그리스도의 사랑이 흘러 들어가면 하나님은 크게 기뻐하는 것이다. 물론 하늘 창고에 보화로 쌓여갈 것이다. 두 번째 결과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이 전달되어 그들이 하나님을 찾게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복음은 삶의 방식을 통해서 이웃들에게 널리 널리 전파되는 것이다.
세 번째 놀라운 결과는 그렇게 몸으로 이웃을 사랑한 후에는 말씀의 깊이가 남다르게 커지고 놀랄 만한 깨달음과 영적 성장과 열매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몸으로 이웃사랑을 행함으로써 비로소 하나님의 마음, 그리스도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깨달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더욱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몸으로 돌봄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이 만천하에 퍼져가게 되는 것이다.
(약 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마음으로 이웃사랑을 행할 수 있는 대상들을 주변에서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실생활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다. 어떤 관계이든 무슨 관련이 있든 우리의 도움이나 협조가 필요한 모든 사람들이 이웃사랑의 대상들이다. 무거운 손수레를 밀어준다든지, 동네 초상난 집에 문상을 간다든지, 눈이 많이 왔을 때 솔선하여 치우는 일을 한다든지, 길을 묻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안내한다든지 하는 일 등이 모두 몸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다양한 방법들이다. 왜 교회에서 이런 일들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는가?
(마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웃과 동일시, 곧 스스로 이웃이 됨으로써 이웃을 돕는 것을 넘어 나 자신을 돕는 것과 같은 의식으로 행할 때 진정한 이웃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다. 예수님이 스스로 사람의 몸이 되셔서 찾아오신 까닭은 사람이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몸과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스스로 몸이 되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진정한 이웃사랑은 내가 이웃이 되는 것으로부터 제대로 출발할 수 있다. 우리와 같은 몸을 가진 이웃을 사랑하려면 몸으로 실천해야 한다.
(히 13:3) 자기도 함께 갇힌 것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
이웃을 대신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친히 우리 자신이 되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그리스도는 바로 나 자신이 되신 것이다. 우리가 바로 이웃사람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내가 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웃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 이웃사람이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이웃이 되지 않는 한 예수님은 그 이웃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성도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통로인 것이다. 그것의 실천적인 의미가 이웃을 대신하는 사랑이다.
(딛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웃을 대신한다는 것은 때로는 나 자신을 위해서는 하지 않을 일을 하는 경우도 포함된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해 죽지 않으셔도 되지만 나의 구원을 위해서 기꺼이 대신 죽는 길을 택하셨다. 또한 주님은 의인으로서 죄인인 우리 대신 죽음을 당하신 것이었다.
(벧전3:18 上)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이웃을 대신한다는 것은 이웃의 입장을 뛰어넘어 이웃에게 더 유익한 일을 하기 위해 기꺼이 나 자신을 헌신하는 것이다. 이웃의 입장이라는 소극적인 태도가 아니라 이웃에게 가장 최상의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사랑을 실천하는 일인 것이다.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스스로 이웃이 되어야 한다. 이웃의 입장을 생각해서 도우라는 이야기 아니라 아예 그 이웃으로 변하여 마치 자기가 자신을 위해 일하는 것과 같이 행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이웃을 돕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돕는 것이다.
(고후 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그렇게 본다면 우리는 이웃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이웃에게 무엇인가 사랑을 베푼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이웃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이 땅에서의 삶 자체가 바로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삶이라는 점까지 생각해야 한다. 사람의 삶의 영역에서 우리가 하는 일들이 전부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일이기 때문에 천국의 원리를 따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사람의 삶의 영역에서 우리가 하는 일들이 전부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일이기 때문에 마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것처럼 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후 5:20)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자기 자신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가장 큰 계명은 이웃이 우리를 필요로 할 때 우리가 스스로 그 이웃의 입장에서 돕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돕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이웃을 대신하는 것임을 뜻하는 것이고, 그것은 이웃을 대할 때 그리스도를 대하는 것처럼 대하는 것임과 동시에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이웃을 대하는 것임을 뜻한다. 실로 그리스도인의 이웃사랑은 단지 이웃의 사람들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으로부터 출발해야 함을 알아야 할 것이다.
소감문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아예 그 사람이 되어버리라는 경우가 아니면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일은 몹시 어렵지만 그러나 내가 만약에 그 사람이 되어버리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그 때부터는 그 사람을 돕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돕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웃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이웃에게 무엇인가 사랑을 베푼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하는 것이다.’
이런 말씀이 내 마음에 감동이 되고 동의가 되고 이해가 되어서 결단하는 과정으로 나아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번 과는 마치 예수님이 부자청년에게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라고 했을 때 부자청년이 근심하며 갔던 것처럼 빨리 ‘이웃 사랑’의 과정이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부담으로 다가왔다.
이웃사랑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과정에 아직도 이웃사랑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마음으로부터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자연스러운 이웃사랑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는 말씀은 너무 멀게 느껴졌다. 심지어 십자가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별개로 보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그리스도인의 이웃사랑은 단지 이웃의 사람들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으로부터 출발해야 함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내 안에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도 없다는 말인가?...
지금까지 과제를 하면서 가장 크게 부딪히고 내 자신에게 좌절하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다시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 성령을 의지하며 기도한다. ‘사랑의 주님. 내 안에 십자가의 사랑으로 충만케 하옵소서. 내 안에 성령으로 충만케 하옵소서! 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운 사랑으로 말미암아 이웃사랑을 향한 출발하는 출발점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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