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복음, 이웃사랑」
제9장 먼저 형제를 사랑하라
정리 : 박종오 목사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님의 말씀을 어떤 식으로든 실천해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그대로 실천하거나, 받아들여 현실과 타협하거나, 예수님 말씀의 의미를 머리로만 받아들이거나, 단지 책에만 나오는 이야기로 생각하고 세상 사람들과 거의 비슷하게 살아가거나 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자기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의 본질적인 의미를 먼저 배워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말씀대로 실천할 수 있는 방향성을 가르쳐야 한다. 말씀은 실천하라고 주신 것이지 적당하게 현실과 타협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신앙은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이다. 하나님사랑은 잘 하려고 하지만 이웃사랑은 잘 하지 못할 뿐 아니라 하려고 하지도 않고 하는 방법도 잘 모른다. 이웃사랑은 하나님의 소원이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 모든 사람이 하나 되는 것이다. 그 이웃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이 땅에 성취되었다. 우리의 푯대는 그리스도의 이웃사랑이다. 하지만 이웃사랑이 살아나려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날 교회의 순수성과 거룩성을 지키지 않으면 죽음으로 이웃을 사랑한다고 해도 한낱 사람의 선한 행위에 머물 뿐이다. 교회 밖의 이웃을 사랑하기 전에 교회가 하나님의 정의가 흐르는 거룩한 곳이어야만 한다. 그것이 율법을 주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도전이다.
(고전 13: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누가 형제인가?
구약의 이웃사랑은 신앙공동체인 이스라엘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였다. 순수성과 거룩성을 지키는 것이 구약의 이웃사랑의 방향이었다. 하지만 결국 구약 이스라엘은 그 사명을 잃어버렸고 이스라엘은 멸망 당했다. 더 완전한 나라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웃사랑을 완성하셨다. 이제 이스라엘의 거룩성은 교회의 거룩성으로 성취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이웃사랑이라고 하지만 성경은 먼저 이웃이 아니라 형제를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형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도들의 관계이다. 공동체의 사랑이 강력해야 하나님을 방해하는 모든 세력들을 제할 수 있고 공동체의 거룩성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가 거룩해지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그것을 목적으로 하라는 말이 아니라 진짜 세상을 향한 이웃사랑의 준비를 철저하게 하라는 뜻이다. 우리는 세상을 향한 이웃사랑을 위해 우선 형제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주님의 형제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사람이라고 분명하게 못 박으신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 우리의 형제들인 것이다.
(마 12:49~50) 49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은 전부 우리의 형제들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1차 적인 형제는 같은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들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형제라는 말은 훨씬 광의의 개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내가 만날 수 있고 접촉 가능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우선적으로 같은 지역 안의 타 교회 성도들이다. 같은 지역 안에 있는 교회들이 서로 교류는 하면서도 경쟁자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는 한 형제개념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교회는 모두 하나여야 하고 성도는 모두 형제여야 한다. 성도들은 전부 형제들이다. 교회도 형제들이다. 작은 교회도 큰 교회도 전부 같은 형제들이다. 특히 한 지역에서 공존하는 교회들은 전부 친형제와 같은 존재들이다. 모든 성도들은 다 한 형제요 모든 교회도 같은 형제요 목회자들도 다 형제들이다. 예수님은 사도 요한에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라고 하셨다.(요19:27)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이웃사랑의 출발점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도 요한의 권면처럼 형제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 복음의 본질인 것이다.
(요일 4:10~11)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용서하고 비판하지 말라
우리의 의지로 용서하고 싶은데 마음으로는 용서가 안 된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님께 간구하게 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용서의 사랑에 얼마나 깊이 담겨져 있는가이다. 형제를 왜 용서해야 하는가? 구약에서는 율법의 엄격한 적용으로 거룩성을 지향해 나갔지만 예수님 이후로는 용서로써 교회의 거룩성을 지키도록 하셨다. 구약에서는 죽음으로 악을 제거함으로써 거룩함과 순수함을 지켜냈다면 신약에서는 용서로써 악을 제거하고 거룩성을 지키도록 하셨다.
구약의 정의와 공의의 바탕에는 사랑이 흘러야 한다, 마찬가지로 신약에서는 용서라는 구체적인 행위나 결단이 따라야 오히려 정의가 세워진다. 심판으로서의 정의가 아니라 용서로서의 정의이다. 심판으로 죄를 없앨 수 없지만 용서로서는 가능하다. 형제는 용서하고 용서받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용서는 어디까지 해야 할까? 예수님은 베드로를 통해 이미 용서의 한계를 말씀해 주셨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다. 무한용서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말씀이다. 형제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말씀이다.
(마 18:21~22)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사도 요한은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살인하는 것이라고 일갈한다. 그리스도인은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까지 말씀한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아직 사망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요일 3:14~15) 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사도 요한은 그보다 더 무서운 말씀을 준다. 형제사랑이란 형제를 위해 목숨까지 버리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요일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마음으로부터 진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그렇게 용서하실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마 18: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예수님은 용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마 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고 비판하는 것은 상대방의 입장에 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서 비판할 것이 보인다면 아직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마 7:3~5) 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형제를 비판한다는 말은 형제를 업신여긴다는 말과 같다. 우리는 형제를 배려해야 한다. 사랑하고 용서한다면 형제의 입장에서 형제를 생각해야 한다. 허물을 비판하지 않고 오히려 용서로 사랑함으로써 신앙공동체 내의 죄와 악은 제거되어 가는 것이다.
(롬 14:13)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적극적인 형제사랑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의 출발은 형제사랑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러면 밑바탕으로부터 형제사랑의 원리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의 실제 삶은 형제사랑의 뿌리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형제를 사랑하여 잘못이 있어도 마음으로 용서하고 자연스럽게 비판하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졌다면, 그 다음 단계는 형제를 높이는 것이다.
(빌 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교회 안에서 스스로를 낮추고 상대방을 높여주는 분위가 조성되지 않으면 교회가 아름다워질 수 없다. 형제를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과 자세가 형제사랑의 구체적인 과정이 된다. 작은 일에 마음을 다해 힘을 쏟을 때 그것이 형제를 사랑하는 실체적인 일이 된다. 형제를 사랑하되 형제에게 늘 관심을 가져주어야 한다.
그러나 서로 용서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가는 상황이 생길 때도 많이 있다. 그것은 진리를 훼손하는 일과 관련되는 상황이나 명백하게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을 경우의 처리 방법이다. 이럴 때 구약공동체에서는 재판을 해서 정도가 심각한 경우에는 죽음으로 문제를 제거했다. 구약에서는 죄만 보고 심판하지만 신약교회에서는 죄의 문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회개하는가의 여부가 굉장히 중요하게 작용한다. 회개한다는 것은 스스로가 공동체의 한 형제임을 인정하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남기를 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 18:15~17) 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형제사랑에는 용서하고 사랑할 책임도 있지만 그의 영혼을 위해서 죄를 돌이키게 할 책임도 있다.
(요일 5:16)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형제사랑은 서로사랑이다.
물이 끓지 않으면 음식물을 익힐 수 없는 것처럼 그렇게 서로사랑으로 뜨거워져야 한다. 또한 물이 끓어야 살균이 가능한 것처럼 서로사랑으로 교회의 거룩성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엄격한 율법이 아니라 용서하고 세워주는 서로사랑이 교회의 순수성을 유지하게 만든다. 그래서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사랑은 서로사랑이어야 하는 것이다. 형제간에 서로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는 것이 교회이다.
형제사랑의 키워드는 ‘먼저’이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의 목적을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에 두고 있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형제를 먼저 존중할 수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특히 공동체 내에서 다른 형제들을 사랑하고 배려하고 존중하기를 먼저 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그것이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 나가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롬 12: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먼저 깨달은 사람이 먼저 사랑하는 것이다. 만약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지 않으셨더라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결코 발견할 수 없었다.
(요일 4: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사랑을 보이셨고 먼저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범을 보여주셨다. 아울러 형제사랑의 본을 보여주셨는데, 그것은 일체 참으심으로써인 것이다.
(딤전 1: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세상과 형제가 삐딱하게 보이는 것은 자신의 허물과 미성숙이 원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에게도 손해고 형제에게도 상처이고 교회공동체에는 걸림돌이 될 것이 확실하다.
(마 7: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형제와의 화목에 대한 말씀에서 예물과 예배보다 형제사랑이 먼저라고 하신 것이다.
(마 5: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이렇게 ‘먼저’ 사랑해야 하는 형제사랑은 서로에 대한 섬김으로 나타나야 한다.
(갈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형제사랑은 믿음이 자라야 성숙해지는 것이다. 함께 신앙이 자라갈 수 있도록 말씀을 더 깊이 배우고 훈련하고 형제사랑 가운데 거할 수 있도록 도와 줄 때 교회공동체는 그 순수성과 거룩성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살후 1:3)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형제사랑은 서로의 영혼이 깨끗할 때 진정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영혼이 깨끗하다는 말은 자기의 욕심이나 이기심이나 본능을 이겨낼 수 있다는 뜻이다. 공동체교회가 전체적으로 성숙해지지 않으면 형제사랑은 충분히 이루어질 수 없고 그렇게 되면 교회는 거룩성이 아니라 영적으로 더렵혀진 인본주의적 단체에 머물뿐이다. 우리는 형제사랑의 목표를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
(벧전 1: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그것이 이루어질 때 그 교회는 더 거룩해지고 다른 많은 교회공동체의 모범이 될 것이고 세상에서는 사랑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로 인정받음으로써 복음은 주변에 널리 퍼져나가고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게 될 것이다.
(살전 4:9~10) 9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10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에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욱 그렇게 행하고
형제 속의 마귀에 대하여
아무리 형제간에 서로사랑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해도 지나치면 오히려 교회의 영적 건강을 해치게 된다. 왜냐하면 서로사랑이 지나치면 공동체전체가 아니라 어느 한 집단이 형성되어 같은 공동체 안에서도 폐쇄적이고 공격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귀는 성도들의 인본적인 사고방식의 틈으로 침투해 들어온다. 그리스도인들의 육신적인 생각이나 일시적인 감정의 상처, 세상적인 인간관계의 틈을 파고 들어와서 성도 개인을 무너뜨리고 공동체에 퍼뜨림으로써 교회를 어지럽히고 하나가 되지 못하게 훼방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화가 나거나 억울한 마음을 통해 마귀가 주는 생각에 점령당할 수도 있다. 마귀가 개인에게만 나쁜 영향을 주는 것 같지만 그것이 교회동공체를 무너뜨릴 수도 있다. 마귀는 작은 틈으로 들어와 교회가 갈라지고 분란이 생기게 한다. 거짓된 진리를 가지고 몰래 들어와 성도들을 미혹하는 경우도 많다. (요삼1:10, 갈2:4)
교회공동체는 끊임없이 마귀의 공격을 받게 되어 있다. 마귀는 어떤 수단을 쓰든지 교회공동체의 형제사랑을 깸으로써 거룩성을 훼손하고 하나님과 자녀들 간의 하나 됨을 훼방한다. 마귀의 궤계는 종말이 올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마 13:39)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자기 욕심이나 자존심등에 이끌려서 마귀의 앞잡이와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들도 자주 볼 수 있다. 마귀는 정면보다는 거짓과 속임수와 유혹을 수단으로 하여 중심에서 떨어진 성도들을 겨냥한다. 때때로 지도자를 넘어뜨림으로써 공동체가 무너지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경계하고 형제사랑을 점검하면서 그 때마다 깨어 기도하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구약에서는 죽음으로 해결했지만 오늘날에는 관계를 끊어버림으로써 거룩성을 유지해야 한다.
(고전 5:11)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형제사랑이야말로 교회공동체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이웃사랑으로 복음을 널리 전파하는 통로의 역할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마귀의 공격에 쉽게 노출될 수 있으므로 늘 기도와 말씀으로 분별하고 성령께 지혜를 구하여 영적 거룩성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살 3:6)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소감문
‘좀 더 일찍 JMDC훈련을 받았더라면 목회를 지금보다 잘했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있지만 주님이 기뻐하는 목회자로 성장해가고 있다는 생각에 감사와 기쁨과 보람을 느끼고 있다. 날마다 ‘어떻게 하면 작은 교회로서 건강한 공동체를 세워갈 수 있을까?’ 성령께 묻고 모델이 되는 교회를 찾아보았다. 왜냐하면 양육과 제자훈련을 한 성도들이 번번이 사랑의 관계를 맺어가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마귀 공격에 무너지고 패배하면서 점점 지치기 시작했다.
실망, 좌절이 반복되면서 성도들에게 가르치고 훈련하는 것이 점점 두려워지기 시작하면서 자신감을 잃고 말았다. 정말 하나님사랑, 이웃사랑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수없이 강조하면서도 사실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이웃사랑’이 무엇인지 알아가면서 내가 얼마나 하나님사랑, 이웃사랑에 대해서 무지했는지를 깨닫고 있다. 이제야 본질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지 눈을 뜨고 있다. 형제를 먼저 사랑하는 것을 가르쳤다면, 형제 사랑이 먼저 사랑이라는 것을 가르쳤더라면. 왜 마귀의 공격을 받고 있는지를 가르쳐 주었더라면...
‘형제사랑이야말로 교회공동체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이웃사랑으로 복음을 널리 전파하는 통로의 역할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마귀의 공격에 쉽게 노출될 수 있으므로 늘 기도와 말씀으로 분별하고 성령께 지혜를 구하여 영적 거룩성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 말씀에 크게 공감하게 되었다. 이번 과를 통해 교회공동체가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 방향을 찾는 시간이었다. 또한 마귀의 공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도 깨닫게 되는 귀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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