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깨우는 한마디 52

당신을 깨우는 한마디 : 두려움과 담대함

하나님과의 관계 5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두려워하지 말라.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두려운 분이 결코 아니시지만, 죄가 개입되어 있다면 심히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원래 하나님과의 관계는 두려움이 없는 관계였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두려움이 들어왔다. 두려움은 죄로부터 비롯된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원래는 두려움 없는 관계였는데 이제는 하나님이 두려운 분이 되었다. 하나님은 다시 두려움 없는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화목제물로 삼으셨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 씻음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더 이상 두려운 존재가 아니게 되었다. 두려움은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했을 때 저절로 생기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두려움과 함께 변명이 생긴다. “사랑 안에 두려움..

당신을 깨우는 한마디 : 하나님의 최우선순위, 십자가

하나님과의 관계 4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최우선순위였다. 최우선적 관계가 성립될 때 드디어 하나님께서 성도와 함께 일하기 시작하시고 큰일을 이루어주신다. 예수님을 이 땅의 십자가로 보내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최우선순위에 두실뿐만 아니라 최고로 소중하게 여기시는 증거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먼저 뜨겁게 사랑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최우선순위에 두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우선적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 신앙이 좋은 사람이 될 수는 없다.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는 사람들을 보면 하나같이 하나님을 최우선순위에 두는 사람들이다. 그렇지 않다면 조만간에 그들이 누리는 것은 안개 같이 사라질 것이다.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

당신을 깨우는 한마디 : 하나님도 절대의존적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3 하나님도 성도를 절대적으로 의존하신다. 절대 의존적 관계란 하나님께 대한 사람의 절대의존과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의존이 만날 때 성립된다. 자녀가 부모를 절대 의존하는 것처럼 부모도 자녀에게 절대 의존적이다. 자녀가 부모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한다는 그 자체가 부모의 사랑에 대한 보상이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로 성도에게 절대 의존적이시다. 무엇을 보고 알 수 있겠는가?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심을 볼 때 성도에게 절대의존성을 가지고 계신 것이 틀림없다. 영적으로 간음하고 돌이키지 않을 백성들을 버리신 후에는 결코 질투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더 이상 사랑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사람은 무슨 일을 하더라도 하나님은 전혀 관심이 없으시다. “그들이 다른 ..

당신을 깨우는 한마디 : 하나님 마음에 맞는 다윗

하나님과의 관계 2 하나님과의 관계중심이 다윗을 만들었다. 하나님 마음에 맞는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며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로 되돌아온다는 말이다. 아직 신앙이 자라지 못하고 미성숙해서 하나님을 오해할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을 때 비로소 그 사람을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하나님을 실망시키거나 하나님과 아무 관계도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래서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유익만을 구하는 모습으로 비칠 수도 있지만, 그럴 때에조차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확실하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이며 올바른 신앙인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

당신을 깨우는 한마디 : 남의 아버지에게 떼쓰듯 기도하나?

하나님과의 관계 1 남의 아버지에게 떼를 쓸 수는 없다. 자기 뜻을 위해 강한 기도로 하나님을 움직이려고 한다면 아직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제대로 세워져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빠지면 마치 율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실은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바리새인과 같이 될 수도 있다. 대개의 신앙인들은 관계성에 대한 이해보다는 하나님의 응답에 더 관심이 크다. 그래서 많은 경우에 자기는 가만히 있고 하나님을 움직이려고 애를 쓰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것은 마치 남의 아버지에게 간구하는 것처럼 되어버린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서 있는 사람이라면 정말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

당신을 깨우는 한마디 : 도대체 정체성이 무엇인가?

정체성 정리 4 택자의 정체성, 왕의 권위, 백성의 열정이 있는가?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은 정체성의 정의이지 지향점이 아니다. 다만 그 정체성에 걸맞는 삶을 살고 있어야 한다.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 된 백성이라고 했다. 물론 이것은 신분적인 정체성이다. 이 정체성은 세상 속에서 활짝 펼쳐져야 한다.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세상 구석구석까지 퍼지게 만들어야 한다. 정체성이란 어떤 방향이나 목적이 아니라 지금 현재의 상태이다.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 정체성이 확고한 사람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

당신을 깨우는 한마디 : 성도의 가면이라도 써라.

정체성 정리 3 안 되면 그리스도인의 가면이라도 쓰고 시작하라. 세상 속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세상에 드러내 보이는 삶의 모습들이다. 삶으로 중명하지 않으면 정체성은 없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는 보이는 정체성과 보이지 않는 정체성이 있다. 보통 보이지 않는 신분적인 정체성은 많이 이야기하지만,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드러나는 정체성을 별로 말하지 않는다. 이 보이는 정체성이 세상 속에서의 정체성이다. 우리는 반드시 세상 속에서 그 정체성을 드러내야 한다. 내면의 정체성의 외적인 모습이 세상에서의 정체성인 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마 5:14) 우리는 세상의 빛이다. 빛이란 죄와 의를 구별하게 하고, 아름다움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물론 우리는 발광체..

당신을 깨우는 한마디 : 지금 하나님께 누구인가?

정체성 정리 2 지금 당신은 하나님께 누구인가? 하나님과의 관계의식이 정체성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요 상속자요 동역자요 성전이요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확신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고,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식구, 가족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상속권이 있다. 하지만 상속자라면 고난을 함께 받고 고난과 싸워서 이겨야 할 것이다. 고난을 이기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는 예수님의 양이요 포도나무 가지요 신부요 친구이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이런 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비로소 정체성을 소유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바울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집’이라고까지 표현하였다. “그리스도는 하나..

당신을 깨우는 한마디 : 거짓 그리스도인인가?

정체성 정리 1 나는 혹시 혹시 가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복음의 정체성을 소유하고 비록 삐뚤빼뚤할지라도 정체성과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의 가장 큰 특징은 용서하는 그리스도인, 버리는 그리스도인, 싸우는 그리스도인이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많은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인이란 전혀 새로운 피조물이며 두 번 태어난 새로운 종족, 곧 신인류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세 가지 특징은 세상 속에서 드러나야 하는 삶의 방식이고,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신분에 걸맞는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어떤 신분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가 대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당신을 깨우는 한마디 : 싸우지 않으면 지옥 간다.

싸우는 사람들 5 지금 싸우지 않으면 다 지옥으로 떨어질 뿐이다. 주님의 삶의 방식으로 싸우는 사람들이 성도이다. 총알이 언제 어디에서 날아올지 모르는 살벌한 영적 싸움의 현장이다. 지금 복음과 일치된 기독교를 사는가? 복음과 일치된 신앙생활, 교회, 삶의 방식, 물질생활 등 복음의 가치와 방향과 목적을 뚜렷하게 인식하고 있다면 기독교는 여전히 세상을 정복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교회와 세속을 구분하기 힘들고, 삶의 방식이 구별되지 않는다. 세상이 추구하는 것을 성도들이 똑같이 쫓고 있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교회가 더 이상 싸우지 않기 때문이다. 목표를 잃어버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