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복음, 이웃사랑」
제8장 이웃사랑의 범위
정리 : 박종오 목사

이웃사랑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어디까지 교회의 사회적 책임인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의 편이 되어주신 것은 그를 통해 모든 민족이 복을 얻게 하기 위해서 였다.
(창 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늦게 낳은 보석과도 같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순수하고 절대적인 믿음을 보시고서야 마침내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정해주셨다.
(창 22: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은 세상에 구원을 펼쳐 가시기 전에 아브라함의 믿음을 키우셨다. 절대적인 믿음, 소중한 아들의 목숨이라도 하나님께 완전히 맡길 수 있는 신뢰가 생길 때까지 기다리셨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거룩하지 못하면 결코 인류구원을 일어날 수 없다. 가족구원조차 일어날 수 없다. 하나님은 인류구원을 위해 아브라함의 민족을 세상 속으로 파송하셨다. 그것이 출애굽이다. 그런데 오히려 하나님은 이방인들을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척결과 진멸의 대상으로 삼으셨다. 그것은 이방 국가들이 여호와 신앙을 무너뜨리려고 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교회가 스스로 거룩하지 않고 어떻게 세상을 구원할 수 있겠는가? 교회가 세속화되어서 세상과 차이가 없는데 어떻게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겠는가? 교회는 세상이 보기에 고유한 윤리 도덕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한다. 교회의 윤리는 세상보다 훨씬 엄격하고 까다로워야 한다. 교회는 죄인들이 모인 곳이지만 적어도 가치 기준을 성취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윤리 도덕과 거룩은 참된 이웃사랑의 본질이다. 이것이 본질이 되지 않으면 아무리 이웃을 사랑하는 것 같아도 전부 자기중심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다. 그것을 바리새적이다.
이스라엘이 거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실현할 수 없다. 민족 안에서만 이웃사랑을 강조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에 실현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예수님 이후에는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를 통해 구원의 기쁜 소식이 전파되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거룩성을 이스라엘에 요구하셨던 것이다.
(레 20:26) “너희는 나에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를 나의 소유로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
우상숭배한 사람은 반드시 죽이라
이방인의 풍속을 따르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그 풍속에 우상숭배의 모든 요소가 다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 풍속 가운데에는 이방인들의 인신 제사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이 이 풍속을 따라서 행하는 사람들이 이었다. 이럴 때 반드시 군중들이 돌로 쳐 죽이도록 되어 있었다.
(레 20:2)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또 이르라 그가 이스라엘 자손이든지 이스라엘에 거류하는 거류민이든지 그의 자식을 몰렉에게 주면 반드시 죽이되 그 지방 사람이 돌로 칠 것이요”
여호와의 백성이 그 풍속을 쫓아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참으실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들이 돌로 쳐서 사형시키는 것과는 별개로 하나님은 따로 또 진노하셨다. 그들은 영원토록 이스라엘에게서 끊겨버린다.
(레 20:3) “나도 그 사람에게 진노하여 그를 그의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이는 그가 그의 자식을 몰렉에게 주어서 내 성소를 더럽히고 내 성호를 욕되게 하였음이라”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몰렉에게 자식을 바친 사람을 사형시킬 때 반드시 그의 이웃들에게 그 일을 맡기신다. 친족이든 이웃이든 같은 삶의 범주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사형을 맡김으로써 우상숭배의 심각성을 실제로 체험할 수 있도록 하고 신앙공동체의 하나 됨을 분명하게 기억하게 만들며, 모든 우상숭배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케 하신다.
(레 20:4~5) “4 그가 그의 자식을 몰렉에게 주는 것을 그 지방 사람이 못 본 체하고 그를 죽이지 아니하면 5 내가 그 사람과 그의 권속에게 진노하여 그와 그를 본받아 몰렉을 음란하게 섬기는 모든 사람을 그들의 백성 중에서 끊으리라”
현대세계에 적용하는 이웃사랑의 개념이라고 할지라도 먼저는 교회의 거룩성을 지켜야 한다. 거기에 초점을 두지 않고 세상의 풍속을 따르다가는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될 뿐인 것이다. 교회의 거룩성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지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교회의 거룩성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거룩성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주님들을 열심히 사랑하고 섬겨도 그냥 전도하기 위해 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교회 숫자 채우고 부흥하기 위해서 섬기는 것이라는 속셈을 다 안다. 부흥하기 전에, 커지기 전에 거룩성을 유지하는 데에 더 힘을 쏟아야 한다.
율법을 범하는 사람은 죽이라
놀라운 것은 십계명에 반하는 행동을 한 사람에게도 죽음으로 책임을 묻는다는 것이다. 신앙에 관계되는 것뿐 아니다. 살인한 사람은 물론이고 부모에게 불경한 사람이나 남의 것을 도둑질한 사람이나 거짓말한 사람까지도 죄의 경중에 따라 죽음으로 죄를 벌한다는 것이다. 부모를 치거나 저주하는 자는 죽음으로 죄 값을 치러야 한다(출21:15).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정면으로 도전하는 자로서 결코 민족의 구성원이 될 수 없고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의 걸림돌이 되는 자이기 때문에 자기의 피가 자신에게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반드시 죽이도록 명령하셨다.
(레 20:9) “만일 누구든지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 그가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였은즉 그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부모에게 패역한 자신도 죽이라고 하셨다. 돌로 쳐서 죽게 하도록 그렇게 엄하게 하시는 이유는 성경은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의 거룩성을 지키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신다.
(신 21:21)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살인한 사람도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 동해보상법은 ‘당한 대로’ 갚아주는 것이 아니라 ‘당한 만큼’까지만 갚아주라는 법이다. 더 이상 복수를 확대해서는 안 된다는 법이다. 이것은 공동체의 거룩성을 더 이상 확대하여 해치지 말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레 24:20~22) “20 상처에는 상처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을지라 남에게 상해를 입힌 그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이며 21 짐승을 죽인 자는 그것을 물어 줄 것이요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일지니 22 거류민에게든지 본토인에게든지 그 법을 동일하게 할 것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
하지만 예수님은 이것을 확대하여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갚을 것을 말씀하신다. 율법과 복음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복음서에서는 동해보복법이 아니라 아예 보복하지 말라고 가르치신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오히려 원수와 같은 사람에게 똑같이 갚지 말고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가르치신다. 그것이 거룩한 공동체를 지키는 복음적인 교회의 모습이다.
(마 5:43~44)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교회의 거룩성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구약에서는 죽음으로 순수성을 지켜야 하지만 교회에서는 용서와 사랑으로 거룩성을 지키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예수님의 소원인 기도내용이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제자들의 하나 됨이었다.
(요 17: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제자들이 하나가 되어 거룩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진리로 거룩하게 됨으로써만 가능한 일이다. 교회은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해 있어야 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그 공동체가 하나님의 공동체가 되려면 역시 거룩성이 보존되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거룩하지 못한 교회는 교회의 기능을 감당할 수 없다.
(요 17:15~17) “15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17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이 거룩성을 기반으로 하는 이웃사랑이 진심으로 행해질 때 세상은 교회가 하나님의 공동체인 줄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의 거룩성을 어떻게 하든지 지켜내려는 간절함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심으로써 우리는 교회를 교회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죄와 악을 제하라
하나님은 제사장의 직무를 거룩하게 구별하심으로써 하나님을 대리하는 레위인들에게 거룩한 권한을 주셨다. 여호와의 지엄하심을 두려움으로 대해야 다른 모든 율법도 그 권위가 살아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레위인을 거룩하게 하신 것인가? 그들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 거룩한 것이고 그들의 직분이 거룩한 것이고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성물이 거룩한 것이고 레위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권한이 거룩한 것이다.
(신 10:8~9) “8 그 때에 여호와께서 레위 지파를 구별하여 여호와의 언약 궤를 메게 하며 여호와 앞에 서서 그를 섬기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셨으니 그 일은 오늘까지 이르느니라 9 그러므로 레위는 그의 형제 중에 분깃이 없으며 기업이 없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 같이 여호와가 그의 기업이시니라”
그러므로 일반인이 제사장의 일을 간섭하면 죽이라고 하신 것이다. 레위인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 거룩해야 하고 백성들이 그 거룩함을 두려움으로 대해야 하고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백성들과 공동체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 때문에 성막을 운반할 때에든지 성막을 세울 때에든지 오직 레위인만 그것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에 레위인 외에 다른 지파 사람들이 가까이 오면 그들을 죽이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그만큼 죄와 악이 없는 완전함을 바라신다는 것이다.
(민 1:51) “성막을 운반할 때에는 레위인이 그것을 걷고 성막을 세울 때에는 레위인이 그것을 세울 것이요 외인이 가까이 오면 죽일지며”
(민 3:38) “성막 앞 동쪽 곧 회막 앞 해 돋는 쪽에는 모세와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이 진을 치고 이스라엘 자손의 직무를 위하여 성소의 직무를 수행할 것이며 외인이 가까이 하면 죽일지니라”
이렇게 철저하게 모든 일들을 수행하도록 명하신 이유는 공동체의 거룩성 때문이다. 죄로 가득한 세상에서 순수성을 지키려면 지나칠 정도로 엄격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스라엘 밖을 향한 이웃사랑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이스라엘의 거룩성 안에 들어와야 가능해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레위인에게만 이 거룩성을 맡기시는 것은 아니었다. 여호와의 임재인 성막과 관련되는 일은 레위인들에게 맡기셨지만, 일상의 삶 가운데서의 거룩성은 재판관들에게 맡기셨다. 제사장의 실무는 성막과 관련된 일이지만 그들에게 실제로 원하시는 것은 거룩성의 보존이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관리들에게는 삶에서의 악을 제거하는 일을 맡기셨다. 그러므로 제사장이나 재판관들의 판결에 대항하거나 무시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런 사람도 이스라엘의 거룩성을 훼손하는 것이기 때문에 죽음으로써 악을 제해 버리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권위는 거룩한 질서 속에 그대로 들어있는 것이다.
(신 17:13~14) “13 그리하면 온 백성이 듣고 두려워하여 다시는 무법하게 행하지 아니하리라 14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이르러 그 땅을 차지하고 거주할 때에 만일 우리도 우리 주위의 모든 민족들 같이 우리 위에 왕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나거든“
공동체 안에 악이 남아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여호수아의 아이성 공격에서 살펴볼 수 있다. 가나안 정복시대 초기에 아이성 공격에 실패하자 이스라엘은 공황상태에 빠져버린다. 작은 아이성 점령에 실패한 것은 딱 한 사람이 저지른 죄 때문이었다. 아간이 외투 한 벌과 50세겔짜리 금덩이에 현혹되어 그것들을 자기 장막에 감추었기 때문이었다. 전체 전리품 중에 외투와 금덩이는 사소한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사소한 죄 때문에 거룩성과 순결성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 이스라엘에 경종을 울리셨다.
(수 7:13) “너는 일어나서 백성을 거룩하게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일을 위하여 스스로 거룩하게 하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아 너희 가운데에 온전히 바친 물건이 있나니 너희가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가운데에서 제하기까지는 네 원수들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리라”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먼저 우리 가운데에서 죄와 악을 제해야 하는 것이다. 이웃사랑은 교회가 정결할 때, 곧 거룩성을 유지할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 이웃사랑은 자기 자랑일 뿐이다.
(삿 10:16) “자기 가운데에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시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은 십자가 보혈로 나타난다. 결론은 십자가 보혈이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법을 범한 사람이 죽어야 한다. 죄와 악이 제거되고 순수성과 거룩성이 지켜져야 한다. 그럴 때 참다운 이웃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전파될 수 있는 것이다. 십자가의 보혈로 거룩해진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차근차근 성취되어갈 것이다.
소감문
‘아브라함이 거룩하지 못하면 결코 인류구원을 일어날 수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요구한 것이 거룩함이었다는 말씀인가? 또 한 번 믿음에서 거룩함으로 초점이 옮겨지는 순간이었다.
이번 과를 통해서 하나님이 왜 그토록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룩함을 요구하셨는지를 깨닫는 시간이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시대 순수성과 거룩성을 얼마나 간절한 요구하시는지도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왜 우리는 지금까지 모든 것의 기준과 목표가 거룩함에서 벗어나 숫자적 부흥, 교회 성장에 초점을 맞추고 달려왔던 것일까? JMDC훈련을 받으면서 조금씩 의식이 바뀌고 있지만 여전히 내 안에서 갈등하고 있다. 목회자들을 상대할 때마다 나는 ‘작음은 그저 핑계일 뿐이다! 아무리 그래도 성장하고 봐야 한다! 그래야 인정받고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듣지 않는다.’라는 무언의 말을 듣는 것 같아 힘들다.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순수성과 거룩성을 추구하며 살아간다면 어떻게 될까?
마지막 말씀이 내 가슴을 계속해서 울리고 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법을 범한 사람이 죽어야 하고, 십자가에서 우상 숭배하던 사람이 죽어야 하며, 온갖 세상 욕심과 물질을 따라가던 사람도 십자가에서 죽어야 한다. 아무튼 교회에서는 죄와 악이 제거되고 순수성과 거룩성이 지켜져야 한다. 그럴 때 참다운 이웃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전파될 수 있는 것이다.’
왜 세월이 흐를수록 순수성과 거룩성을 잃어버리는 것일까? 사람들의 소리와 반응을 통해 내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갈등을 내려놓고 ‘윤리 도덕과 거룩은 참된 이웃사랑의 본질이다.’라는 말을 가지고 순수성과 거룩함을 회복하기 위해서 십자가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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