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월급 나눔에 대하여
제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은 전도 이야기만 나오면 마음에 걸려하고 부담스러워합니다. 전도라고 하면 대부분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교회 예배에 초청하는 일일 것입니다. 교회마다 전도에 대하여 강조를 많이 하기 때문에 전도에 부담을 가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전도의 생활화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맞지만 실제 전도로 이어지기는 쉽지 않습니다.
또 성경을 읽거나 암송하거나 매일 묵상하는 일도 부담스러워합니다. 의무감 같은 것을 많이 느끼는데 실제 삶에서는 말씀의 생활화가 이루어지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기도생활에 대해서도 많은 부담을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교회마다 기도의 중요성에 대하여 아주 강조를 많이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실제로 기도생활이 결여되면 참다운 신앙생활은 거의 불가능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에 실질적인 힘이 되는 것이 전도와 말씀과 기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가장 부담을 느끼고 책임감을 느끼는 것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제가 가장 큰 부담을 느끼는 것은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청년에게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마 19:21)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라고 되어 있으나 마태복음에는 그냥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셨다고 나와 있습니다. 아무튼 예수님의 이 말씀은 언젠가 어떤 형태로이든 행해야 할 의무감처럼 느껴지곤 했습니다.
하지만 정말 문자 그대로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작은 아파트 하나 있는데 그것은 우리 가족들이 살아가야 할 보금자리입니다. 물론 살고 있는 집까지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이 꼭 그런 의미라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성 프란시스처럼 그렇게 실행할 수 있는 사람도 간혹 있을 것입니다. 어떤 조건에 매이지 않을 수 있는 사람들 중에 그렇게 결단하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혹시 재산이 있는 분이라면 마음먹기에 따라 그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도 있겠지요.
아무튼 마음으로는 예수님 명령대로 하고 싶은데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재산을 다 팔지 않고도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찾다가 1년에 한 번, 한 달 월급에 해당하는 금액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로 했습니다. 한 달 월급 중에서 십일조와 교회에 헌금할 금액만 제외하고 나머지는 전부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서 아무 조건 없이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단지 가난하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얼마간의 물질을 나누어주자는 것입니다. 전도하기 위함도 아니요 생색내기 위함도 아니요 교회에 기록을 남기기 위함도 아닙니다. 단지 예수님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실천해 보자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에, 있는 재물을 팔아서 나누는 것보다 어떤 의미에서는 더 뜻 깊은 행동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한 달 내내 열심히 일하는 것이 되니까요. 그리고 이것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순수하게 베푸는 것이 되므로 하늘에서는 그것이 보물이 되어 차곡차곡 쌓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잔치를 베풀 때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갚을 것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고스란히 자기 자신에게 갚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눅 14:13-14)
어쨌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냥 나누어주라는 말씀은 현실생활에서는 결코 쉽지 않은 결단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주셨을까요? 이 부자 청년은 신앙생활을 잘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율법이 명하는 모든 신앙의 의무를 다 지켰습니다.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마 19:18-20)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도 지켰다고 했으니 아마도 율법이 제시하는 구제에도 열심을 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신앙생활을 잘하는 청년에게 왜 예수님은 있는 재산마저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셨을까요?
물론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 귀중한 일이라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간 사람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마 19:27)
이렇게 모든 것을 버리고 재물도 버리고 심지어 가족들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소중함보다 참된 가치를 오로지 예수님께만 둔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신의 생명조차도 아까워하지 않고 하나님께 전부 드린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귀중한 일인지는 예수님의 대답을 들으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 19:28)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에 대한 보상까지도 덧붙여 주십니다.
하지만 이번에 제가 한 달 월급 나누는 것은 하늘에 아무런 보물도 쌓이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행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행위는 이미 저희 상을 받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마 6:1)
물론 제가 직접 실천하려는 이유는 이 행동을 통하여 예수님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다가가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월급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는 것보다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열매요 보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는 교회에 드려지는 각종 헌금이나 선교사들을 위한 헌금을 물질생활의 중요한 일로 여깁니다. 이것은 바른 태도이며 최선을 다해서 헌금생활을 하는 것이 성경적이며 그리스도인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얼마를 드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드리느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교회 운영비를 위해 내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만,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맞으며, 다만 하나님은 그 헌금을 드리는 성도의 마음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헌금은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신앙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헌금으로 우리의 모든 물질생활의 의무를 다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데에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헌금을 정성을 다해 드림으로써 이웃사랑이나 구제나 선교나 이웃에 대한 도리를 다하는 것은 아닙니다. 헌금이 가장 중요한 물질생활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은 교회에 드리는 헌금보다는 생활 현장에서 만나게 되는 어려운 이들을 직접적으로 돕는 것을 훨씬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그것은 강도 만나 죽어가던 사람을 돌보았던 어떤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눅 10:36-37)
지나가던 제사장과 레위인은 죽은 것 같은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가버렸습니다. 아마 이 제사장과 레위인은 종교적 의무를 철저하게 다하던 사랑이었을 것입니다. 정해진 헌금이나 구제나 금식에 대한 의무도 아주 철저하게 행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피투성이가 된 이 사람을 그냥 내버려둔 채 지나가 버린 것도 종교적 이유에서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에는 시신이나 피 등 부정한 것을 만지지 못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사장과 레위인이 악하거나 신앙적으로 잘못된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도 그들을 악하다고 하신 적은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이런 예화를 들어 참된 이웃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이웃사랑의 본질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웃사랑의 본질은 단순히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기 전에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이 있습니다.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 12:31)
이웃을 사랑하되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사실 그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요구하신 것은 마치 자기 자신을 돌보고 아끼는 것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웃사랑의 원리를 잘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이웃을 사랑하되 이웃과 같은 입장에서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웃이 처한 입장에 서서 그들의 안타까운 상황을 함께 느끼고 깊은 공감을 경험해야 하다는 것입니다. 이웃사랑은 그렇게 이웃사람과 똑같은 상황에서 그들의 마음을 깊이 느껴본 후에 행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내가 베푸는 입장, 동정하는 입장에서 남을 돕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사람과 똑같은 입장, 오히려 그를 섬기는 입장에서 윗사람을 섬기듯이 돌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웃을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이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교회에 헌금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다하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교회에서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드릴 헌금을 바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이웃을 돕되 그들과 똑같은 입장에 서서 그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서 그들을 섬기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사랑, 이웃사랑의 조화를 이루는 신앙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이웃의 마음속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들의 생활 속에 묻힐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을 돕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동일한 처지에 있는 나 자신을 돕는 것이 바로 이웃을 돕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우리는 주님의 명령을 깊이 이해할 수 있고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그 마음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달 월급나누기는 바로 그러한 차원에서 이웃사랑의 실천적인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1년에 한 번씩 한 달 월급을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다면 이 세상은 참 밝아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지는 않더라도 단 한 번이라도 그런 일을 한다면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구석구석 잘 전달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 달 월급이 얼마이든 십일조와 헌금을 빼고는 전부 가난한 사람을 찾아서 준다는 것은 열심히 힘들여 일한 대가를 예수님의 뜻을 받들어 그 마음을 따라 나누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에 드린 그 어떤 헌금보다 더 귀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최우선적으로 제가 주님의 마음을 조금이라고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며,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이웃들을 바라보고 그들과 섞여서 함께 세상 속의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갈 수 있기를 간절하게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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