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MDC(예수마음제자반) 경건훈련도서
신국판(양장), 266p, 17,000원
간략한 도서소개입니다.
『변화를 만드는 성경』 시리즈는 성경개론, 묵상, 설교자료, 삶에 적용, 실천, 변화까지 만들어주는 경건훈련을 겸한 성경안내서입니다. 모든 초점을 오로지 변화에만 맞추었기 때문에 개론 부분도 적용과 변화가 가능한 정도까지를 종합하여 제시합니다. 묵상은 좀 더 근본적인 접근방법으로 인하여 하나님 중심적인 시각으로 자신과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줍니다. 현실적으로 활용이 가능한 설교의 자료들을 풍부하게 제공합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제자로서의 삶을 이끌어줄 수 있도록 적용하고 실천하는 일에 초점을 맞춥니다. 결국 『변화를 만드는 성경』 시리즈를 창세기부터 꾸준하게 읽고 적용하다가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시각이 바뀌고 삶이 서서히 변화되어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영성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신명기의 말씀을 책에 기록하여 왕이 평생 동안 읽도록 했으며(17:18~19), 요단강을 건넜을 때 큰 돌판에 새기도록 했고 그것을 에발산에 세우도록 했습니다(27:2~4). 그뿐 아니라 매7년마다 안식년(면제년)의 초막절에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낭독하여 들리게 했습니다(31:10~11). 율법 자체가 생명은 아니지만 이스라엘 백성으로서의 생명력의 지속은 이 율법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명령을 오늘날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율법이 아니라 복음으로 사는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바로 제3의 신명기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명기의 모든 명령들이 그리스도로 인하여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율법과 오늘날의 복음이 전혀 다른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육적이고 외형적인 것이 사라져버리니까 다르게 보이겠지만 사실은 율법 속에 이미 복음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많은 가르침들 중에서 율법을 재해석하는 일을 자주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복음을 어떻게 대해야 하겠습니까? 복음도 율법과 마찬가지로 자주 읽고 자주 들어야 합니다. 물론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처음 받는 것처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들어서 알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거의 들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명기의 말씀을 읽을 때에는 앞에서 여러 번 같은 말씀을 읽어서 알고 있을지라도 마치 처음 대하는 것처럼 읽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래 된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하기가 몹시 어려워질 것입니다.
본문 중에서
열하루와 사십 년
핵심구절 : “호렙산에서 세일산을 지나 가데스 바네아까지 열하루 길이었더라 마흔째 해 열한째 달 그 달 첫째 날에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자기에게 주신 명령을 다 알렸으니”(신 1:2~3)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가데스 바네아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본문에는 최남단인 호렙산(시내산)에서 세일산을 거쳐서 가데스 바네아까지 열하루 길이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백성들이 양떼들을 이끌고 가는 속도를 말하는 것인데, 그 정도 걸렸다면 그렇게 멀지 않은 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에는 애굽을 떠나서 1개월 만에 신 광야에 도착하였고(출 16:1), 시내산까지 3개월이 걸렸다고 했습니다(출 19:1). 계속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멈추어서 여러 가지 정비를 하면서 가는 것이기 때문에 몇 배의 시간이 걸리는 것입니다. 아무튼 애굽에서 시내산까지의 거리나 시내산에서 세일산을 거쳐 가데스 바네아까지의 거리가 비슷할 것이고, 애굽에서 가데스 바네아까지의 거리도 비슷할 것입니다. (그 길은 아예 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열하루 길이라고 하고 나서 곧바로 출애굽 제40년 11월 1일에 백성들에게 마지막 말씀을 주신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열하루면 가는 길을 40년 동안 갔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흔히들 신약성도들도 광야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들 말합니다. 이 세상 자체가 광야이고 나그네길이라는 것입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은 마귀가 지배하는 영역이고 성도는 저 영원한 천국에 도달하기까지 천국의 원리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마귀처럼 세상 욕심에 이끌려서 죄악의 원리를 따라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온갖 부딪침과 방해와 난관과 장애와 거슬림과 따돌림을 이겨내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랬습니다. 백성들은 그것을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열하루 길을 가는 데 40년이 걸렸으니까요. 지금 우리가 그렇지 않을까요? 가나안으로 가는 길을 택하지 않고 세상에 그대로 주저앉아버렸습니다. 어려움과 고난을 이겨내야 하는데 하나님께 불평하고 앉아있습니다. 눈앞에 닥친 생존의 어려움이나 목표를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는 저 영원한 세계를 향하여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만나는 모든 문제들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문제들일 뿐입니다. 언제 어떤 경우에라도 그것을 이겨내고 전진해야 합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적용하기 : 세상을 이기지 못하게 만드는 요소가 사람마다 다릅니다. 당신은 현실적으로 어떤 문제가 가장 크게 가로막고 있습니까? 한 번만 그 난관을 이겨내면 언제나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재물 얻을 능력
핵심구절 :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신 8:17~18)
세상은 돈을 중심으로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사는 데 불편하지 않을 만큼만 있으면 되고 나머지는 하나님의 일에 사용해야 하는데, 우리는 그런 개념보다는 돈을 누리려고 하는 경향이 아주 강합니다. 돈을 많이 벌면 하나님께서 많은 복을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고 가난하면 복을 주지 않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물질을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부여해주셨습니다. 햇빛과 비를 골고루 주신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무엇인가를 많이 가졌다면 원래의 내 것 이상을 누리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합니다. 더구나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 예수의 공로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우리에게 필요한 소유 외에는 전부 하나님의 일에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신앙 가운데 품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기본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주신 복 중에서 작은 부분이라도 나누고 섬기면서 살아야 하지만 그 중에서도 많은 소유를 누리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그저 하나님께서 남다른 큰 복을 주셨다고 생각하고 우리도 그런 복을 받기를 위해 힘써야 할까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본문 중에서도 말씀하셨지만 물질을 많이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기 때문에 부자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꼭 알아야 합니다. 돈이 많은 것은 음악이나 미술에 재능이 있거나 체육에 재능이 있거나 다른 사람을 지도하는 능력이 있거나 가르치는 능력이 있는 것처럼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재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결코 자기 스스로가 능력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부자가 된 사람들은 그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으로 말미암아 소유하게 된 물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소유가 많은 사람들에게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서 사용하라고 물질재능을 주셨습니다. 노래를 잘 하면 다윗과 같이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비단 물질뿐 아니라 다른 모든 재능은 성령님의 은사이므로 거기에 합당하게 쓰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결코 그 재능을 자랑하거나 독점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적용하기 : 당신에게는 남들보다 뛰어난 재능이 있습니까? 그 재능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뚜렷한 재능이 없다고요? 그렇다면 그 재능(능력, 잘 하는 것)을 찾아보십시오.
십일조는 이웃사랑
핵심구절 :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 14:28~29)
성경에서 십일조에 대한 규례는 농산물과 축산물에 대해서 부과되는 것으로 나오는데, 거의 10분의 2에 대한 수확물을 드리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십일조를 드리고 남은 10분의 9에서 다시 제2의 십일조를 드려 가족들과 레위인들에게 축제로 베풀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3년에 한 번씩은 성읍에 저축하여 레위인들과 소외된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십일조의 근본적인 목적을 무엇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십일조는 하나님께 바치는 기본적인 의무이지만 제1의 십일조가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을 위해서 사용되었다면 제2의 십일조는 온전히 자신들과 이웃들을 위해 사용하도록 하신 것을 생각한다면 십일조의 기본정신은 이웃사랑인 것입니다. 제1의 십일조도 역시 자기 유업을 받지 못한 레위인들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므로 십일조의 기본방향은 성전관리 외에는 모두가 이웃사랑의 실천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십일조의 기본정신이 잊혀졌습니다. 가능하다면 제2의 십일조를 드려서 온전하게 구제에 사용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드릴 때에도 이웃에게 사용된다는 기대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적용하기 : 꼭 십일조가 아니더라도 소득의 일정 부분을 이웃사랑과 나눔과 섬김에 사용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은 구제를 위하여 얼마나 수입을 사용하고 있습니까?
“아멘!” 할 때
핵심구절 :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말하되 아멘 할지니라 …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신 27:15 이하, 26)
본문의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아멘.” 하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를 다시 한 번 알게 해줍니다. 이것은 마치 증인선서와도 같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결단입니다. 또 다른 의미에서 계약서에 자기 도장을 찍는 것과도 같은 중대한 일입니다. 물론 우리가 설교 시간에 설교자의 말씀에 공감하고 격려하는 의미에서 아멘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라도 충분히 공감하고 결단하려는 자세로 아멘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결코 축복의 말에 아멘 하는 것이 아니라 저주의 말에 대한 아멘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더더욱 신중한 자세로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저주의 말에 아멘 한다는 것은 자신도 율법을 자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겠다는 약속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섣불리 아멘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본문에서는 저주에 대한 아멘은 선택이 아니라 아멘 하라고 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은 저주를 받을 일이고 그것에 대해 백성들이 아멘 한다는 것은 그 언약 아래 있겠다고 맹세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의로 이런 맹세를 한 사람들은 아니지만, 그리스도 예수님을 영접하고 거듭난 백성이라면 이 저주에 대해 아멘하고 대답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고 금하신 행동을 보여준다면 저주 아래 놓이게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런 상황에 놓일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저주에 아멘 하라는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사랑과 은혜와 자비의 하나님의 반대편의 하나님의 성품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너무 축복만 강조하다 보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적용하기 : 하나님은 우리가 평소에 가볍게 한 말도 다 듣고 계십니다. 우리의 언행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한 것입니다. 당신은 평소에 하나님을 얼마나 의식하고 있습니까?
근래에 들어온 새로운 신들
핵심구절 :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증한 것으로 그의 진노를 격발하였도다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귀신들에게 하였으니 곧 그들이 알지 못하던 신들, 근래에 들어온 새로운 신들 너희의 조상들이 두려워하지 아니하던 것들이로다”(신 32:16~17)
새로운 이단들이 자꾸 나타나는 것처럼 광야시대에도 새로운 신이 자꾸 창조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여러 민족들과 부딪치다가 보면 그들이 원래 섬기는 신들을 새로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 이단들도 바울의 시대에서부터 존재했고 복음을 방어하기 위해서 신학이 생기기도 했습니다만, 그 이후로 인류 역사는 기독교 이단의 역사와 함께 지속적으로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해왔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이단들도 근원을 따져 들어간다면 모두가 초대교회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여 그럴 듯하게 꾸며도 그 실체는 마귀일 뿐입니다. 그래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든 눈길을 돌릴 필요도 없고 알아볼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근래에 들어온 새로운 신들은 색다른 우상의 모습이나 이름, 또는 새로운 예배방식 등으로만 등장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출애굽 시대에는 그렇게 나타났지만 현대사회에서는 그런 모습이 결코 아닙니다. 이단이나 사이비 등 다른 종교의 모습으로도 많이 나타나지만 진짜 새로운 신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새로운 문화의 모습이며 새롭고 매력 있는 신지식의 모습이며 새로운 사조의 모습이며 유행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심지어 단지 ‘새로움’이라는 우상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참 심각합니다. 우상에게 절하고 점을 치고 예언을 듣는 것도 심각하지만 그것보다 우리 삶 속에 침투해있는 편의성, 지름길, 일확천금의 꿈, 돈을 쉽게 벌 수 있는 방법, 빨리 부흥되는 비결, 이름뿐인 자격증, 새로운 목회 개념 등 아무튼 하나님 없이 자기들의 힘으로 빨리 크고 넓게 확장하고자 하는 것들은 모두가 새로운 신들입니다. 물론 전혀 새롭지 않을 수 있습니다만, 하나님이 아니라 그런 것을 쫓아가는 순간 그것은 여지없이 새로운 신이 되어버립니다. 본질을 잃어버린 채 아무리 새로운 것으로 포장하면 무엇 합니까? 시대에 대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지키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복음대로 사는 것 외에는 모두가 부수적인 것일 따름입니다.
적용하기 : 당신은 복을 위해서 삽니까, 아니면 복음을 위해서 삽니까? 복음을 위해서 사는 삶을 훼방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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