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복음, 이웃사랑」
제2장 아담 이후의 이웃사랑
정리 : 박종오 목사

계급의 발생과 증오의 현실화
아담과 하와는 관계에 금이 간 채 세상으로 쫓겨나야만 했다. 그 이전에 하나님은 타락한 아담과 하와에게 고생과 수고의 짐을 지우셨다. 분리된 인간이 힘을 합해 온전함을 얻으라고 하신 것이다.
(창 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그뿐 아니라 인간에게는 일종의 계급과도 같은 것이 생기게 되었다. 다스림이라는 개념이 아담에게 주어지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며 이제 하나님의 직접 다스림은 사라지고 인간 사이의 다스림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이웃관계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다원화되기 시작했다. 원래 한 사람이었던 관계가 죄로 말미암아 나뉘게 되고 다스림이라는 현상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창 3: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하나였던 인간이 둘로 나뉨으로써 계급이 생겨났고, 인간의 본성 속에는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욕망이 생겨나게 된 것이었다. 인간은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소유하게 되더니 사람을 지배하려는 욕구를 가지게 되었고, 이제 증오와 분노라는 감정을 그대로 현실속에서 표출하는 존재로 죄악은 더 발전해 나가고 있었다. 그것은 타인사랑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드는 핵심적인 요인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동시에 왜 타인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거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마귀는 오늘날도 끊임없이 이웃사랑을 훼방하고 있다. 이웃사랑의 반대말은 이웃 증오가 아니라 나누임이다. 마귀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훼방할 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서로 사랑하지 못하도록 다양한 요소들로 끊임없이 시험하고 유혹하고 있다. 반면에 하나님은 어떻게 하든지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려고 하시며, 사람과 사람 사이도 사랑으로 서로 하나 되도록 감동하시고 인도하신다. 하지만 한 번 타락한 인간은 결코 돌이킬 수가 없다. 이미 죄악의 침범을 받은 인간은 아주 특별한 방법이 아니면 이 사랑의 관계를 회복할 수가 없다.
노아의 등장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깨어지고 사람과의 관계 곧 타인관계도 완전히 깨져버렸다는 의미이다. 이웃사랑으로 서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개념은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어버렸다. 모든 가능성이 사라지자 하나님은 인간창조를 한탄하셨고, 이 세상을 쓸어버릴 수밖에 없게 되셨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타인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할 줄 아는 한 가족을 만나게 되셨다. 그것은 노아의 가족이었다. 노아의 가정을 타인사랑의 모델로 제시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온전히 하나 됨의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히 사명에 충실한 것을 넘어서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된 것이기 때문에 타인사랑의 모범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빠진 타인사랑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온전하게 하나 되는 것을 뜻한다는 말이다.
(창 6: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9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임재가 필수적인데, 홍수로 인하여 온 세상이 뒤집어지기 이전에 이미 타인사랑의 원리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과의 동행이야말로 이웃사랑의 근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홍수 이후에 노아의 후손으로 이루어진 세상도 점차 이전과 같이 타락해가기 시작했다. 아버지 노아가 술에 취한 채 하체를 드러내고 잠이 깊이 들었는데 함이 이것을 보고 형제들에게 일러바쳤기 때문이었는데, 이 일 때문에 이번에는 인종 간의 새로운 계급이 발생하고 말았다.
(창 9:24)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25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찾으셨고 아브라함을 통하여 인간에게 구원의 길을 열기로 작정하셨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어떤 한 사람을 통하여 계획을 세워오셨지만 이제는 한 민족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실행하기로 하셨던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
어떻게 아브라함에게서 이웃사랑의 원형을 찾아볼 수 있겠는가? 아브라함의 인생은 사실상 이삭에 모든 초점을 두고 살아가는 ‘이삭 바라기’의 삶과 다름 아니었다. 아브라함의 삶은 오로지 이삭을 기다리고 이삭을 낳고 이삭을 기르고 상속해주는 데에 모든 목적을 두는 삶이었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의 책임이기도 하다.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이 들어 상속자 이삭 의존도가 100%가 되었다. 사실 인간의 타인사랑 중에서 아브라함의 이삭을 향한 사랑보다 더 큰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누가 75세에 약속을 받고 100세 낳은 아들을 생명처럼 사랑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이삭은 사라가 90세 때 낳은 기적의 아들이었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사랑하는 가장 극대화된 모습이 바로 이삭을 향한 아브라함의 사랑이었던 것이다.
25년이나 걸려서 얻은 아들을 금지옥엽으로 십수 년 동안 잘 길렀을 때 하나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제물로 요구하셨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하나님은 직접 명령을 통하여 행하고자 하신다.
(창 22: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그런데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지시를 그대로 수용했다. 아무 말 없이 하나님의 지시를 이행하러 떠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그것을 우리는 믿음이라고 말한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한 것이라고 기록한다.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사랑마저도 요구하시는 하나님께 드리는 신뢰가 믿음이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극한적인 사랑을 원하실까?
(창 22: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믿음과 이웃사랑
아브라함의 믿음은 모든 기독교신앙의 출발점이다. 극한적인 사랑을 하나님께 보여드려야 우리의 믿음도 통과된다. 복이든 저주이든 하나님께 전부 맡기는 것이 믿음이다. 거기에서 희생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인간관계이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드렸을 때 인간관계가 깨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은 바로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아마 이삭이 죽을 위기에 처했다면 아브라함이 이삭 대신 자신이 죽기를 진심으로 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가장 고귀한 사랑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생은 전부 부모의 가장 고귀한 사랑을 입고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고귀한 사랑을 받고 자란 인간에게서 왜 이웃을 향한 그런 사랑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어버리는가?
그 이유를 자기중심적, 이기주의 태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고귀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지만 그것은 단지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하는 이웃사랑은 자기사랑이 아니라 타인사랑이다. 타인을 볼 때 자기 자신을 바라보듯이 볼 수 없다면 이웃사랑은 존재할 수 없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실 때 인간관계를 도구로 사용하셨다. 지상의 사랑 중에서 가장 고귀한 사랑의 관계를 깰 수 있는가를 아브라함에게 물으셨던 것이다. 가장 소중한 인간관계, 자기 목숨보다 더 중요한 인간관계를 깰 수 있다면 하나님의 시험 문제없이 통과된다.
하나님은 사람의 목숨을 받으시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를 받으시려는 것이었다. 인간에게 가장 고귀한 자식사랑조차도 버릴 수 있느냐? 아니,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느냐? 이것이 하나님께서 시험하시는 과목이었다. 깨어진 인간관계, 아들을 배반하고 죽이는 그런 인간관계를 통하여 하나님은 그 사람의 믿음을 받으시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웃사랑에 대한 하나의 중대한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자기 자신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그 모든 결과를 하나님께 완전히 맡길 때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믿음의 사람을 얻으시고, 아브라함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다시 얻고, 아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지는 모든 복의 상속자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누구에게 유익이 되었는가? 두 사람과 하나님 모두가 큰 유익을 얻었다. 이것은 참다운 의미의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이웃사랑이다.
(창 22:15)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16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이것이 믿음과 이웃사랑의 상관관계이다. 기본적으로 모두가 승리자가 되는 길이 바로 진정한 이웃사랑의 의미인 것이다. 진정으로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일은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순전히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이 참다운 이웃사랑이다. 참다운 믿음이 있다면 진정으로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소감문
1과에서 ‘어떻게 아담과 하와의 관계 속에서 이웃사랑을 발견할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하나 됨’을 통해 새로운 깨달음으로 큰 기쁨을 맛보았다면 2과에서 ‘어떻게 아브라함과 이삭과의 관계 속에서 이웃사랑의 원형을 찾아볼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을 가지고 따라가다 그 의문이 풀어지면서 ‘내 몸과 같이’라는 의미를 더욱더 깊이 깨닫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하나님은 사람의 목숨을 받으시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를 받으시려는 것이다.’ 어떻게 아들을 바치라고 하실 수 있단 말인가? 사랑의 관계를 깨뜨리는 것이 어떻게 이웃사랑과 연관이 있단 말인가? 그런데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관계를 깨고 하나님께 순종할 때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믿음의 사람을 얻으시고 아브라함은 목숨보다 더 소중한 이삭을 다시 얻게 되고,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모든 복의 상속자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씀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 머릿속에 항상 ‘이웃사랑은 손해 보는 것’이라는 개념이 깔려있었는데 그 개념이 ‘이웃사랑은 모두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라는 개념으로 바뀌게 되었다. 아직은 실천하는 것이 어렵지만 그래도 ‘진정으로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한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깨닫게 되었으니 좀 더 적극적으로 실천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기대를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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