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복음, 이웃사랑」
제6장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
정리 : 박종오 목사

구약에 나타나는 이웃사랑의 내용들을 보면 소외되고 가난하고 억압받기 쉬운 대상들에게 사랑의 눈길을 반드시 주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소외된 사람이나 전부 똑같은 자녀들일 뿐이기 때문이다. 사실 백성들이 이것을 율법으로만 알고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속에 들어있는 기본적인 마음가짐은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생각하라는 것이었다.
구약에서 백성들이 돕고 배려해야 할 계층으로는 고아, 과부, 거류민, 객, 나그네, 곤란한 자, 궁핍한 자, 가난한 자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형제들이지만 무엇인가의 결핍으로 말미암아 소외된 계층으로 전락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모두 가족들이고 형제들이고 자매들이다. 이들을 만나거나 관계가 이루어질 때 이들을 자신처럼 자신의 가족처럼 생각하라는 것이 율법의 기본자세이다.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것은 자비나 자선이 아니라 이들의 의무이다. 당연히 도와야 하고 마땅히 감당해야 하는 일들이다.
이웃을 돕는 일은 의무이다.
궁핍한 사람들을 돕는 일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삶의 공동체 안에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는 공동체의 모든 일원들이 책임져야 할 대상들이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이런 일을 예상하고 있어야 하고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신 15:11)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복음서에 나오는 부자 청년의 이야기 초점을 부자의 믿음이나 전 재산을 팔아서 구제하는 것이나 실행하는 때의 하늘에서 쏟아질 보화에 맞추어진다. 그 초점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진다면 엄청난 이야기들이 쏟아질 것이다.
(마 19:21~22)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그 재산을 나눔 받을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감격과 감동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이웃사랑은 이웃의 입장이 되는 것이 첫 단계이다.
삭개오는 누가 요구한 것도 아닌데 자기 재산의 절반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겠다고 선포한다.
(눅 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형제 중에 가난하거나 곤란한 사람을 그들의 입장에서 돕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요 뜻이다. 하나님은 마음으로 율법을 지키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곧 사랑으로 이웃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어려운 이웃과 형제를 대할 때 같은 식구로 대우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가족 같이 품어주라는 말씀이다.
하지만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것만 가지고는 많은 어려움이 따를 수도 있다. 아무리 마음으로 하려고 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성경은 어려운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도와주기 위해서는 그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모든 복에 대해서 함께 즐거워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감사와 직결된다. 이웃사랑은 의무에 덧붙여 마음으로 사랑하며 거기에다가 함께 즐거워할 때 참된 의미가 드러나는 것이다.
(신 26:1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으로 말미암아 너는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에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
구약의 이웃사랑에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모든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의 이스라엘보다 훨씬 강하게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수확물은 반드시 남겨두라
율법은 누군지 알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서도 최소한의 배려를 명하고 있다. 생명을 연장해야 하는 절박한 입장에 처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를 하고 있는 것이다.추수할 때 일부 곡물을 남겨두고 추수하라는 명령은 마치 안식년이나 희년과 같이 이스라엘의 독특한 제도로서 어려운 이웃, 특히 배고픈 이웃들을 내버려 두지 말라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성경은 배고픈 이들을 위해 곡물의 일부를 남기라는 명령을 하나님께서 직접 내리신 것으로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또한 하나님은 이렇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긍휼에 관해서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신 24:19)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곡식뿐만 아니라 과일도 똑같은 마음으로 배려해야 한다. 수확할 때 반드시 일부를 남겨두어야 하며 땅에 떨어진 것을 다시 거두어서는 안 된다.
(신 24:20~21) 20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며
21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굶어 죽을 위기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 제도는 마치 생명줄과 같았을 것이다. 옛날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 나라 안에서 자기들끼리 지켜야 할 법이 율법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 안에 오히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하나님의 마음이 깊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이삭이라도 얻기를 원해서 곡식밭에 들어간 딱한 형편의 백성들에게도 한계를 분명하게 정해주고 있다. 배가 고파서 손으로 이삭을 잘라 먹는 정도는 허용이 되지만 곡식에 낫을 대어서는 안 된다. 그 이상은 도둑이 되는 것이다. 포도원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이다. 그 자리에서 배불리 먹을 정도까지 허용이 되지만 그릇에 담는 행위는 허용될 수가 없다. 그것은 주인에게 심각한 손실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는 그것은 도둑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이웃사랑의 정신 속에는 서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분명한 목적이 들어있다.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이웃사랑의 목적은 서로 사랑함으로써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 공의이고 백성에게 복이다.
십일조라는 것도 생활능력이 없는 레위인들과 고아와 과부들을 위한 제도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구약 백성들은 매년마다 모든 소출의 십일조를 드렸는데 이것은 레위인들의 생활에 사용되도록 했었다. 제2의 십일조(축제의 십일조)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정상적인 십일조를 드리고 나서 다시 십일조를 드리는 것으로 주로 제사나 절기(축제)를 지키는 데 사용하도록 했다. (신14:23). 그런데 제2의 십일조 중에서 안식년 후 셋째 해와 여섯째 해(신14:28)에는 주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도록 하셨다. 이것을 제3의 십일조(구제의 십일조)라고 부른다.
(신 26:12) 셋째 해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 네 성읍 안에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하나님의 명령을 마음과 행동으로 지키면 하나님도 그 순종을 잊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에게 복을 내려주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하여 행하면 하나님께서도 백성들의 순종을 알고 있다는 표시를 해주신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백성들이 철저하게 마음으로 순종한다 해서만 주시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정의를 만족시키는 일이기 때문에 복을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에게 억울한 일이 없도록 정의를 베푸신다.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처럼 어디에도 기댈 데가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의지할 때 쉽게 응답하신다.
(신 10:18)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십일조를 비롯하여 이웃사랑하기를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처럼 하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 앞에 공의로운 사람이 된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공의를 인정하신다는 말이다. 겉옷 한 벌밖에 없는 사람이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겉옷을 저당 잡혔을 때 그 겉옷은 해지기 전에 반드시 돌려주어야 한다. 그 행위 자체로 공의를 인정받을 수 있지만, 그렇게 돈을 갚지 못하고도 겉옷을 입고 자는 가난한 사람의 감사와 축복이 하나님께 상달되는 것이다.
(신 24:12~13) 12 그가 가난한 자이면 너는 그의 전당물을 가지고 자지 말고
13 해 질 때에 그 전당물을 반드시 그에게 돌려줄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그 옷을 입고 자며 너를 위하여 축복하리니 그 일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네 공의로움이 되리라
율법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나 이자를 받기 위해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지 말라고 명한다. 그것은 사람하는 마음이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만족시키는 마음이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그 행위를 이끌어내는 마음이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일이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지만 동시에 이웃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서 사랑하는 것이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구약의 이웃사랑은 이런 개념을 너무나도 밝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레 25:36) 너는 그에게 이자를 받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여 네 형제로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할 것인즉 37 너는 그에게 이자를 위하여 돈을 꾸어 주지 말고 이익을 위하여 네 양식을 꾸어 주지 말라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는 우리 자신을 지켜 정결하게 하는 것도 포함하지만,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일이다. 이웃사랑이야말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세울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다.
행하지 않으면 죄가 된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면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만족된다. 그렇다면 이웃사랑이 제대로 행해지지 않는다면 거꾸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는 성립될 수가 없다. 그러면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죄가 된다. 사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이웃사랑에 대해서 판단하실 때의 기준은 크고 막대한 것이 아닐 경우가 많다. 어쩌면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작은 일인 경우가 더 많다. 작은 행위는 숨겨진 그의 마음의 틈새이다. 동시에 그것을 당하는 사람들의 간절한 마음을 무시하는 것이다.
(신 24:15)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 진 후까지 미루지 말라 이는 그가 가난하므로 그 품삯을 간절히 바람이라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지 않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임이라
사람을 무시하는 일은 은연중에 드러나게 된다. 자신은 미처 의식하지 못하고 행동하지만 그 결과는 상대방에게 큰 어려움을 안겨줄 수가 있다. 이런 이웃의 마음을 이해하거나 공감하지 못하다면 그 사람은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할 수 없다. 그런데 그렇게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께 전달된다는 것이다.
어렵고 궁핍한 이웃을 바라볼 때 그 이웃의 입장에서 생각해주고 공감해줄 수 있어야 하는데 오직 자신이 조금 손해 볼 듯한 데이만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분명한 죄가 된다는 것이다.
(신 15:9) 삼가 너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일곱째 해 면제년이 가까이 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그것이 네게 죄가 되리라
하나님은 고아나 과부를 해롭게 하는 사람에게는 바로 그 고아나 과부처럼 되게 하겠다고 하신다. 당장 무슨 심판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 죄에 대한 대가는 반드시 치르게 된다. 하나님은 고아나 과부를 해롭게 할 때 맹렬한 노를 발하신다.
(출 22:22~24) 22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23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
24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의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
이웃사랑은 배우거나 훈련해서 되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이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말 3:5)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점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하게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며 나를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언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절대로 우리 자신이나 가족이나 동료들만을 위해 살도록 되어있지 않다. 우리 삶의 목적이 바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런 의식 없이 자신의 필요에만 반응하는 믿음이라면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이런 의식 없이 자신의 필요에만 반응하는 믿음이라면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의 신앙생활을 점검해보아야 한다.
소감문
십계명과 구약의 율법을 이웃사랑의 관점에서 보기 전까지 예수님이 율법을 완전케 하셨다는 말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다.
(마 5:17~18)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하지만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하셨다는 것이 ‘이웃사랑’의 관점에서 구약의 율법을 보면서 머리에만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동적 사고에서 나오는 말은 ‘그래서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 없으면 우리의 힘과 의지로는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라고 말하곤 했는데 ‘이웃사랑’을 배워가면서 점차 습관처럼 핑계와 합리화시키려는 마음에서 나오는 말이 아닐까? 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구약의 율법을 이웃사랑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은 어떻게 이런 말씀을 이 시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실 수 있었을까?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이 시대에 이 정신과 이 마음을 품고 이웃과 더불어 살아간다면 그곳이 하나님 나라가 될 것이다!’라는 소망과 기대하는 마음도 생기게 되었다.
하지만 그 소망과 기대와 더불어 ‘이웃사랑’의 대한 부담이 너무 큰 짐으로 다가오고 있다. 왜냐하면 아무리 생각해도 ‘내 몸같이’라는 개념이 내 삶으로 나타나지 않을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도무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여리고 성이 함성 소리와 함께 한 순간에 무너졌던 것처럼 내 생각과 마음의 벽이 조금씩 금이 가고 틈이 생기고 의식의 변화가 나타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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