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편에 서기

버리자 4 : 지식을 버리자.

김완섭 목사 2017. 7. 19. 14:12

종교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으세요.


버리자 4 : 지식을 버리자.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12:49-50)

 

전도 현장에 따라가서


내가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한 것은 한국병원선교회라는 선교단체에서였다. 34일 간의 수양회에 따라갔다가 빛 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 주일부터 큰 소망 가운데 선교회 주일예배에 참석하였다. 처음 은혜를 받으니 모든 것이 새로웠고 기쁨이 넘쳤으며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오전 예배를 마쳤는데 여러 청년들이 우르르 밖으로 나가는 것이 보였다. 병원선교회이기 때문에 구성원들은 대개 간호사 자매들이었다. 그 중 한 자매가 나를 손짓하여 불렀다. “완섭 형제님도 같이 가요!”

 

나는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도 않고 순순하게 따라나섰다. 첫 은혜요 첫 믿음이었기 때문에 나는 어린양처럼 따라갈 뿐이었다. 열대여섯 명 정도 되는 일행은 버스를 탔다. 그 당시 병원선교회는 을지로 6가 국립의료원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마장동 정류장에 도착하자 다함께 버스에서 내렸다.

 

가다가 말고 중국집에 들어가서 자장면을 시켜 먹었다. 중국음식점에서 나오더니 당시 마장동에 있던 경찰병원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1층 병원 로비에 열대여섯 명이 빙 둘러서더니 힘차게 찬송을 불렀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이지만 당시에는 누구 하나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두 곡을 찬양하고 나서 네 사람 정도씩 팀을 만들었고 각 팀은 2층에서 5층까지 각 층을 담당하게 하였다. 나도 어느 팀에 속해서 따라갔다. 병실 문을 불쑥 열고 들어가더니 입원해 있는 경찰 환자들에게 소개를 했다.

 

안녕하세요? 저희들 교회에서 나왔습니다. 저희가 찬송가를 불러드리겠습니다.” 하고는 다짜고짜로 찬송가를 한 곡 불렀다. 그리고는 흩어져서 병상에 다가가서 위로도 하고 대화도 하고 기도도 해주면서 복음을 전할 기회를 찾았다. 나는 찬송가도 많이 알지 못했었고, 처음이라 무슨 말을 할 수도 없어서 그냥 구석에 우두커니 서서 지켜볼 뿐이었다. 그것이 내가 전도에 관해서 처음으로 접한 충격적인 체험이었다.

 

그 당시에 병원선교회는 저녁예배를 드리지 않고 오후 4시에 오후예배를 드렸다. 오후예배 드리고 가라니까 남아 있었는데 오후 예배를 드리더니 또 나더러 함께 가자고 하였다. 다 끝난 줄 알았는데 또 어디를 가자고 하여 나는 무작정 따라나섰다. 인원은 비슷했는데 이번에는 선교회 길 건너에서 버스를 탔다. 버스는 용산역 앞에 멈추어 섰고, 아까 낮과 비슷하게 중국음식점으로 들어가서 자장면을 먹었다.

 

자장면을 먹고 나더니 이번에는 용산역 광장 건너편에 있는 철도병원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철도병원에는 절단환자가 많았다. 이곳에서도 경찰병원에서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로비에서 찬양하고 병실에 흩어져서 전도하였다. 전도를 다 마치고 둘러서서 기도하고 병원 문을 나섰다.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일행은 용산역 광장에 다시 모여서 큰 소리로 힘차게 찬송가를 두 곡 부르고 그곳에서 흩어졌다.

 

이것이 내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가지게 된 전도의 개념이었다. 전도란 한 영혼 한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것이 병원이 되었든 찻집이 되었든 이웃집이 되었든 그들의 영혼을 염려하고 그것을 전달하는 과정인 것이다. 이것이 전도란 무엇일까 할 때 내가 가진 전도에 대한 지식이었다.

 

많은 사람이 전도하면 자기 나름대로의 지식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전도란 한 번도 안 해 본 것이기 때문에 막연함 두려움일 수도 있다. 전도란 행사가 있을 때에 교회로 끌어오는 것일 수도 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사영리를 가지고 공원 벤치에 앉아서 이야기를 거는 것일 수도 있다. 누구나 전도라고 할 때 가지고 있는 지식은 다양할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은 어디까지가 자기 것일까? 아마도 내가 경험한 만큼만이 자기 지식일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부분은 그냥 추상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내가 경험하거나 직접 본 것은 온전한 나의 지식이 되는 것이다.

 

호세아의 절규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말씀을 알고 복음을 알고 하나님을 안다고 할 때 성도는 자기가 경험한 것까지만 알 뿐이다. 제자훈련을 하고 말씀공부를 하고 통독을 하고 묵상을 할 때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일찍이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 망할 것이라고 질타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4:6)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면 기껏 얻어놓은 믿음도 얼마 못 가서 희미해질 것이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더욱 하나님을 알자고 외쳤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6:3)

하나님을 아는 일에 더욱 힘쓰고 애써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너무나도 충만한 시대이다. 원하기만 하면 경건서적, 방송, 각종 세미나, 제자훈련, 성경묵상 등 얼마든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기를 수 있다. 제자훈련은 지금도 한국교회 성도들의 신앙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성경묵상(QT)은 성도가 말씀 속에 들어가게 만드는 소중한 수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 망한다.”는 호세아 선지자의 선포는 틀린 것이 아닐까? 오늘날 기독교 신앙인들의 모습을 보면 더욱 그런 것 같다.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

 

목사님 설교에만 의존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오늘날 훈련받은 평신도가 얼마나 성경지식을 뽐내는가! 성도도 말씀을 알아야 자기를 지킬 정도의 신앙을 가질 수 있지 않겠는가! 성도도 자기 나름대로의 성경지식을 가지고 설교자의 선포를 분별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정말 그럴까? 제자훈련과 말씀묵상만으로 충분할까? 그런 훈련 프로그램들을 통해 얻은 지식만으로도 망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주로 규모 있는 교회를 중심으로, 중산층 이상이 밀집된 지역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 말씀 프로그램들, 영성 프로그램들만으로 세상을 살릴 수 있을까?

 

불행하게도 그 많은 제자훈련 프로그램, 말씀묵상 프로그램, 영성훈련 프로그램들이 넘치지만 세상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아니 변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세상은 오히려 점점 더 나빠지고만 있다. 과학기술과 문화예술, 복지는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람들의 내면의식은 더욱 나빠지기만 하는 것 같다.

 

호세아 선지자가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선포하였지만, 오늘날 한국에서는 오히려 지식이 많아서 망하는 것 같다.

내 백성이 지식이 많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너무 많이 가졌으니 나도 너에 대한 지식만 많이 가지고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너무 많이 알고 있으니 나도 네 자녀들에 대한 지식만 가지고 잊어버리리라.”

현대에 호세아가 온다면 이렇게 선포하지 않겠는가!

 

홍수 때에 마실 물이 없다.


하지만 왜 그럴까? 그 많은 각종 훈련 프로그램들이 왕성하게 행해지고 있다면 분명히 세상은 일정 부분이라도 변화되고 있어야 한다. 세상은 기독교의 영향력이 지대하게 끼치는 곳이어야 하고 문제가 생길 때, 어렵고 힘들 때 세상은 교회를 찾아야만 한다.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가득 찬 기독교가 세상에 드러내는 정상적인 현상이어야만 한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호세아 시대와 전혀 다를 것이 없는, 그 많은 지식이 있지만 세상에 나타나는 현상은 지식이 없어 망해야만 하는 호세아 시대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쌓은들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 아닌가! 호세아가 틀린 것이 아닌가!

 

맞다. 호세아가 틀렸다. 그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으면 망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이토록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풍성하게 넘치는데도 이 나라는, 기독교는 망하기 일보 직전이 아닌가! 교회가 세상의 지탄을 받는 시대가 되어버리지 않았는가!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물론 제자훈련은 반드시 필요하다. 성경을 자세하게 공부하고 시대적 상황에 맞게 해석하고 풍부하고 정확한 성경지식을 소유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이런 지식 없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지속할 수 있겠는가!

 

제자훈련은 꼭 필요하다. 이전에도 성경공부, 바이블 스터디라는 명칭으로 훈련이 왕성하게 일어났었다. 그것이 좀 더 심화되고 체계화되어서 제자훈련이라는 형태로 다시 나타난 것이다. 이런 말씀훈련이 되어 있지 않으면 성도는 위험해질 수 있다. 분별력이 사라져 쉽게 세속화되거나 이단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제자훈련, 말씀훈련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차라리 우리가 알고 있는 성경지식을 버려야 할 때가 오지 않았는가! 우리 자신과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할 지식이라면 그 지식이 다 무슨 소용인가! 그런 지식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아무런 효과 없는 삶이 된다면 그런 지식은 차라리 버리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옛날 경상도 안동에 있는 우리 시골 집 앞으로는 도랑이 흐르고 있었다. 2-3m 정도의 약간 비탈진 도랑이었다. 그런데 그 도랑에서 불과 5-6m 떨어진 곳에 우물이 있었다. 우물 곁에는 토란 밭이 있어서 가끔씩 토란 뿌리로 국도 끓여먹었다.

 

그런데 평소에는 우물물을 길어 식수로 사용하고 세수도 하고 그랬는데 여름철에 홍수가 나면 도랑이 넘치고 붉은 황토 흙물이 우물까지 덮치곤 했다. 도랑물이 우물을 덮어버리니 물을 먹을 수가 없었다. 비가 그쳐도 며칠 동안은 물을 먹지 못하고 개울 건너 마을에 가서 물을 얻어먹곤 하였다.

 

오늘날 말씀이 넘치기는 한데 그 많은 말씀은 정말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지식, 신학지식은 넘치는데 자신이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물이 우물을 넘치기까지 채워도 먹을 물은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지식이 넘쳐나는데 정작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지식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리 지식이 많으면 뭘 하나? 지식을 쌓기는 쌓는데 자기 지식이 아닌 것이다. 지식을 잔뜩 배워서 가지고 있는데 실체적인 지식이 아니라 추상적인 지식에 그치는 것이다. 경험적이고 겪어본 지식이 아니라 관념적인 지식이다.

 

이런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지식만으로는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 관념적인 지식은 아무리 많이 섭취해도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기 어렵다. 우리는 실체적이고 경험적인 지식을 찾아야 한다. 실제로 자신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지식은 체험적인 지식이다. 그러므로 관념적, 추상적인 지식이 홍수처럼 넘쳐도 생명수로써의 역할은 하지 못하는 것이다.

 

누가 내 형제이고 어머니인가?


사실 지식 자체는 다 똑같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의 내용은 누가 읽어도 동일하다. 하지만 읽는 사람에 따라 생명력이 넘치기도 하고 전혀 없기도 하다. 무엇이 그것을 좌우할까!

 

호세아 선지자가 선포한 여호와를 아는 지식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 지식은 동일하다. 물론 호세아 시대의 구약적인 하나님 지식과 신약시대의 예수님 지식이 다르기는 하다. 아직 메시야의 도래가 임하지 않았던 시대와 메시야의 도래로 성령이 부어지고 구원이 성취된 시대가 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시대가 필요로 했던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예수님을 아는 지식은 기능상, 효용적 가치상 동일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생명력 있는 지식과 살아있는 지식으로 만드는가!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 해답을 발견할 수 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말씀을 가르치고 계셨다. 그 때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말씀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키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8:21)

예수님의 가족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인가! 그냥 지식만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자는 예수님의 가족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식은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그것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 지식을 가지되 실천하는 지식이 진짜 자기 것이라는 말씀이다. 행해보지 않은 지식은 살아있는 지식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참된 지식을 가지려면 반드시 그것을 몸소 실천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지식만 많이 가지고 있고 그것으로 세상을 다 판단하고 있었던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외치셨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23:3)

 

예수님의 마지막 분부의 말씀도 지키라는 것이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28:20)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도 지식을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행하는 사람이라고 하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7:21)

 

결국 지식은 반드시 필요한데 그냥 지식이 아니라 행함이 따르는 지식, 행함을 통하여 얻어지는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실천적인 지식, 체험적인 지식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한다는 말씀이다. 야고보 사도의 말씀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2:17)

이 행함이 바로 실천적인 믿음인 것이다.

 

교리에 빠지면


기독교방송에서 신천지에 빠진 사람들을 방송한 적이 있다. 위험을 무릅쓰고 취재하여 8부작으로 방영한 것이었다. 방송 내내 여러 가지 많은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았는데 8부작의 마지막 결론은 신천지에 빠진 사람들은 교리에 빠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어떻게 그토록 잘못된 확신에 차게 만들 수 있을까? 어떤 힘이 신천지에 그토록 깊이 빠지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교리의 힘이었던 것이다.

 

교리란 무엇인가? 이것은 경험도 아니고 체험도 아니고 실천도 아니고 잘 짜여진 지식이다. 빈틈없이 잘 짜인 지식, 이것이 멀쩡하던 사람들을 신천지에 빠지게 만들었던 것이다. 여기에 한 번 빠지니까 논리도 통하지 않고, 사정해도 안 되고, 가족관계도 소용이 없었다.

 

기독교에는 원래 교리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단들과 우상숭배자들과 영지주의자들이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기 시작하자 교리도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진리를 지키기 위해 신앙체계를 만들어낸 분이 사도 바울이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고 믿고 있는 성경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한 신학사상이다.

 

그러면 왜 멀쩡하게 열심히 잘 믿던 성도들도 신천지 교리에 빠지게 될까? 그들에게 체험적인 신앙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식은 있는데 살아있는 체험적인 신앙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세워져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란 바로 이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 기초한 지식을 말하는 것이다. 호세아 선지자가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했을 때 여호와를 안다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지식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를 아는 방법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다.

 

성경지식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 성경지식은 죽은 지식이다. 죽은 지식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으면 무엇 하겠는가? 죽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 썩어서 냄새밖에 더 나겠는가? 많이 알고 있다는 교만, 알고 있는 지식에 근거한 비난과 정죄, 자기보다 덜 아는 사람들을 향한 우월감, 자기가 많이 알고 있다는 것으로 인한 영적 어둠, 설익은 지식으로 인한 미숙함이나 비뚤어짐, 이런 것들이 냄새를 풀풀 풍기지 않겠는가!

 

지식을 버리자.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신앙적 지식은 지식으로서의 가치가 결여된 것이다. 내가 직접 경험해본 지식이 참된 지식으로서의 가치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신앙지식은 일단 버려야 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은 일단 내려놓자.

 

그리고 내가 가진 지식을 실천해보도록 하자. 지식은 버리고 실천으로 채워야 한다. 그 지식이 예수님과의 관계로 나타나야 한다. 지식으로만 가지고 있으면 그것은 아무런 힘도 나타낼 수 없다. 지식을 버리고 예수님 체험으로 채우면 그 지식은 힘과 능력을 나타낸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본질은 그것이다. 말씀을 행해 보아야 그 말씀의 진짜 의미를 안다는 것이다. 말씀의 진짜 의미를 모르고서는 예수님과의 관계가 형성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과의 인격적 관계가 형성되지 못하고는 천국도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다.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맺어지려면 그 말씀을 행해 보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모든 말씀은 행하라고 주신 말씀이다. 많이 알고 있으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다. 알고 실천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실천해야 자기 것이 되고 살아있는 지식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버리자. 그것이 경험으로 나타나기 전에는 참다운 지식일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알고 있는 말씀 중에 순종하지 못한 지식은 과감하게 버리자. 살아있는 지식은 행할 때에 얻어지는 것이므로 행함이 없는 지식은 버리자. 그렇게 죽은 지식을 버릴 때 우리는 참다운 생명력 있는 신앙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죽은 지식을 버리자. 아무런 능력도 힘도 없는 지식은 다 버리자. 남을 판단하던 지식을 다 버리자. 나를 교만하게 하던 지식을 버리자. 그리고 예수님을 경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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