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으세요.
버리자 5 : 자기를 버리자.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눅 9:23-24)
죽는 것보다는 쉬운 설거지
언젠가 자동차를 운전하고 가면서 극동방송을 들은 적이 있었다. 어느 목사님이 설교하고 있었는데,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 어느 젊은 남녀가 사로 사랑하고 있었다. 남자는 정말 일평생 죽도록 여자를 사랑한다고 고백했다. 그러자 여자가 대답하였다.
“자기야, 그럼 내 부탁 들어줄 수 있어? 자기가 나를 위해 죽어도 좋다고 했잖아? 그런데 죽지 말고 이것 두 가지만 해줘. 결혼하면 일평생 설거지는 당신이 해줘. 그리고 빨래도. 이 두 가지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잖아? 그게 죽는 것보다는 훨씬 쉽잖아?”
어느 본문인지, 주제가 무엇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재미있는 이야기라서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설거지는 얼마든지 해줄 수 있는데 ‘일평생’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몹시 걸린다. 그런데 예수님은 날마다 (죽을 때까지)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신다. 일평생? 은퇴한 뒤에도? 그럼 죽을 때까지 쉬지 못하는 건가?
우리 동네에는 거여동크리스천커뮤니티라는 모임이 있다. 12년 전에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 지역교회연합운동의 일환으로 시도한 모임이었다. 그 커뮤니티 산하에 거여동목회자부부기도모임(약칭 거목회)이 전체 커뮤니티를 이끌어가는 형태이다. 아직까지 활발한 활동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거목회의 몇몇 교회가 매주 금요일 밤에 모여 두세 시간 교제를 나누고 기도하는 일을 11년째 해오고 있다.
그 중에 한 목사님은 기획력도 출중하고 추진력도 탁월한데 늘 하는 이야기가 있다.
“난 맨날 놀아요. 그저 놀면서 하는 거지 뭐. 그렇게 애쓰면서 하지 말아요.”
일을 딱 부러지게 하시는 분이지만 겉으로는 항상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
반면에 나는 이 목사님과 정반대이다. 나는 놀러가는 것도 일하는 것처럼 하는 사람이다. 계획 같은 것을 세우는데 일할 때와 똑같이 한다. 일 중독증 비슷한 게 있어서 놀러 가서도 일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고질병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해결이 안 된다.
나는 이 점을 잘 알고 있지만 자기를 버리는 것은 쉽지 않다. 내가 나를 의식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지가 않고 쉴 때도 쉬어지지가 않는다. 그런데 해외여행을 가면 이것이 해결된다. 해외에 나가면 전혀 새로운 환경이 되고 강한 호기심으로 여행에 집중하기 때문에 쉼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춤추며 찬양하며
어느 해인가 이스라엘을 여행한 적이 있었다. 한 단체를 따라가게 되었는데 리더 목사님이 찬양사역자였다. 사실 그 단체는 이미 그룹화되어 있어서 같은 생각과 방향을 가진 분들이었고, 나는 이방인처럼 혼자 참여한 것이었다. 같이 가기로 한 분이 뒤늦게 동행할 수 없게 되어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리더 목사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찬양 반주를 틀어놓고 마이크를 대고 찬양을 계속 부르는 것이었다. 단체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내내 오로지 찬양으로만 채우니까 나는 굉장히 담담함을 느꼈다.
“왜 저렇게 하실까? 꼭 저렇게 해야 하나? 차 안에서 좀 쉬고 잠도 보충하면 좋을 텐데 … ”
그렇게 불편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더군다나 이 팀은 이스라엘 곳곳에 가서 기회만 되면 찬양을 부르면서 춤을 추었다. 예루살렘에서도 베들레헴에서도 광야에서도 모여서 다함께 돌면서 춤을 추며 찬양을 드리는 것이었다. 함께 동행했던 어떤 점잖은 사모님은 개다리춤까지 추어대며 찬양을 하였다. 각자 온갖 몸짓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찬양을 드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4일째, 5일째 찬양은 지속되고 있었다. 나는 다른 것은 다 좋은데 이 밤낮 없고 장소와 관계없는 이 춤과 찬양이 너무나도 어색했고 불편한 마을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런데 7일째 되는 날 나는 커다란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그래! 이것이 찬양이야!”
“찬양이란 사람을 의식하게 되면 그것은 이미 참다운 찬양이 아닌 거야!”
“다윗은 법궤가 들어올 때 하체가 보일 정도로 채신머리없게 춤을 추어대지 않았던가!”
“찬양에 이것이 빠지면 그것은 진정한 찬양이 아닌 거야.”
이런 여러 가지 생각들이 나를 휘감기 시작했고, 나는 그때부터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오후 찬양예배 시간이 있는데 여기에서 찬양 춤을 추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때 손을 올리고 춤이라도 추고 싶은데 누군가를 의식해서, 심지어는 나 자신을 의식해서 춤을 추지 못한다면 그것은 진짜 찬양이 아닌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느낀 대로, 깨우친 대로 춤을 춰야 하겠는데 정말 자신이 없기 때문에 걱정이 앞서는 것이었다.
정말 너무나도 큰 단점이지만, 나는 자의식이 너무 강하다. 그래서 성도 때부터 찬양 부를 때 한쪽 손을 올리는 것조차도 힘들어했었다. 양손을 높이 들라고 인도자가 권면해도 겨우 손만 가슴 높이까지 들어 올릴 뿐이었다. 과거에 선교차 아프리카로 갔었는데 원주민들과 함께 줄을 지어 춤들을 출 때 나는 도저히 그 중에 낄 수가 없어서 끝까지 사진만 찍었던 적도 있었다. 찬양 부를 때 나는 절대 춤을 추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찬양의 본질을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이것을 깨뜨려야만 했다. 나는 나를 포기해야만 했다. 나는 내 자신을 버려야만 했다. 나는 나를 버리고 성도들을 의식하지 않고 춤추며 찬양을 드리는 사람이 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서 나는 정말로 나를 의식하지 않고 성도들을 의식하지 않고 찬양 춤을 추었다. 성도들이 보기에 우리 목사님이 이상해졌다고 해도 할 수 없었다. 몸짓이 세련되지 못하고 뻣뻣하여 막대기 같은 팔다리 동작이 다 드러나도 할 수 없었다. 혹시 처음 나온 성도들이 있어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나를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의식하고 기쁨을 만끽하면서 찬양 춤을 출 수가 있었다.
사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기를 부인함’이 이런 정도의 수준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이 찬양 춤을 통해서 성취되었던 것이었다. 물론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크고 작은 순간순간마다 나를 버리고 주님을 찾는 과정들이 있었다. 다만,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일지라도 나에게는 아주 힘든 일인데 그것을 뛰어넘으면 자기를 부인하는 일이 된다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과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 생각을 버린다는 말이다. 자기부인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경험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자기가 충분한 경험을 쌓았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과 부딪힐 때에는 자기 경험을 포기하는 것이다. 내 생각과 말씀이 충돌할 때에는 미련 없이 자기 생각을 버리는 것이 자기부인이다.
재미있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과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이 정 반대 개념이라는 것이다. 즉,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면 그것은 곧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거꾸로 자기를 부인할 줄 아는 사람은 예수님을 시인한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 10:32-33)
베드로도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였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마 26:75)
다른 제자들도 자기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버렸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막 14:50-52)
그런데 세례 요한은 자기 부정, 자기 버림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 3:30)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따르는 현실에서 자기를 버리고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니다. 세례 요한은 어떻게 이렇게 자기 버림을 그리도 쉽게 실행할 수 있었던가!
물론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도 요한처럼 지상에서 가장 큰 분이라고 할지라도 그렇다고 그가 하나님인 것은 아니다. 그도 역시 흔들릴 때가 있었다. 감옥에 갇힌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 질문을 드렸다.
“그들이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여쭈어 보라고 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눅 7:20)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은 정말 자기부정, 자기 버림을 제대로 보여 주신 분임에는 틀림이 없다.
세례 요한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것은 구세주의 실체와 자신의 실체를 알았기 때문이다.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막 1:7)
그냥 어렴풋한 실체가 아니라 뚜렷하게 드러나 보이는 실체였다.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눅 3:16)
자신은 겨우 물로 세례를 주지만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이보다 뚜렷한 자기인식이 있을까!
세례요한의 선포를 듣기는 들었으나 제자들은 어렴풋한 고백만 있었을 뿐이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위대한 고백이었지만 예수님에 대한 실체적인 경험이 없었다.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는 세례 요한의 고백과는 차이가 크다.
이처럼 예수님을 진정으로 시인하려면 예수님을 실체적으로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아무튼 우리는 왜 자기를 부인하고 부정하고 버려야 할까? 자기 부인이 있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서이다. 자기를 버리지 못하면 그는 예수님을 따를 수가 없다. 자기를 버리고 포기하고 부인한 이후에야 비로소 예수님을 따를 준비가 되는 것이다.
베드로는 위대한 신앙고백을 하였지만 자기를 부인하지는 못했다. 성령세례를 받은 후에야 그는 예수님을 위해 비로소 자기를 부인할 수가 있었다.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면 예수님을 시인할 수 없다. 자기를 부인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예수님을 시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예수님은 끊임없이 자기를 버릴 것을 말씀하셨다. 자기를 버리는 것은 물질을 뛰어넘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마 19:21)
자기를 버리는 것은 삶의 터전을 포기하는 것이다.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마 4:22)
자기를 버리는 것은 남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이다.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6:41-42)
자기를 버리는 것은 원수조차도 사랑하는 것이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6:43-44)
자기를 부정하는 것은 먼저 자기 눈에서 들보를 빼내는 것이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5)
자기를 부정하는 것은 딸의 구원을 위하여 자기를 스스로 개 취급하는 것이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 15:27-28)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어린아이와 같이 되는 것이다.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사소한 율법도 지키면서 정의와 긍휼과 믿음도 간직하는 것이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
자기를 버리는 것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물질을 포기하는 것이나 삶의 터전을 버리는 것이나 남의 부탁을 잘 들어주는 것이나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를 버리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다. 왜냐하면 이런 일들은 하기 싫은 일이고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고 때로는 할 수 없는 일들이기 때문이다.
제로 베이스 기도
하지만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어떤 특정한 선택을 하여 행하는 것에만 있지는 않다. 일상의 삶 가운데에서도, 경건생활을 하는 가운데에서 날마다 다가올 수밖에 없다. 일상의 세세한 부분에서 자기 부인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다른 중요한 순간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나는 평소에 제로베이스 기도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한국말로 하자면 ‘무에서 시작되는 기도’ 정도가 될까? 우리가 기도할 때 무엇을 구하는 기도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런 기도는 기도의 본질을 잃어버리기 쉽게 만든다. 자기 목적이 우선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한다면, 하나님의 응답을 정말로 받고 싶다면, 우리가 가장 먼저 할 일은 그 기도제목을 내려놓는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뜻을 모른 채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응답받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 기도가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기도들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포기하는 일이 가장 치열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곳이 바로 기도공간이다. 기도할 때마다 자기를 포기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앞서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질 것을 말씀하셨다.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려면 동일한 의미에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날마다 기도나 말씀 속에서 자기를 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간혹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들이 있다. 그 점에 대한 신학적인 논쟁은 별개로 하고 그들은 정말 성령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생각한다. 나에게도 성령님께서 작은 은사들을 주셨다. 나도 ‘때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일을 할 때가 간혹 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하여 들었다는 하나님의 음성이 틀릴 때가 많이 있다. 물론 똑같은 하나님의 음성이라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많이 달라질 수 있지만, 자기가 받은 응답이 맞을 때도 있고 틀릴 때도 있는 이유는 자기를 버렸을 때와 자기를 버리지 못했을 때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욕심, 자기 경험, 자기 목적이 하나님의 음성보다 앞서면 결코 바른 음성을 들을 수가 없다.
이런 언급에 대해 다소 불편한 분들도 계시겠지만, 나는 자기부인의 원리를 말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응답도 이와 똑같다는 것이다. 은사가 없는 사람도 하나님의 응답을 기대하고 기도한다. 하나님의 올바른 응답을 정말 받기를 원한다면 자기를 완전히 포기해야 한다. 자기 욕심이 조금이라도 들어가면 하나님의 응답은 이루어지지 않거나 오래 걸리거나 다른 응답으로 나타난다.
주변에서 죽을 병에 걸렸다가 병 고침을 받은 분들을 알고 있다. 또는 분명한 영적 현상을 체험하기도 한다. 그런데 각종 병 고침이나 기적은 자기를 완전히 부인했을 때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자신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하나님의 응답, 기적의 역사는 자기를 완전히 부인했을 때 일어나는 것이다.
베드로는 완전히 자기를 부인할 때에는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걸었다.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마 14:29)
하지만 자기를 완전히 부인하지 못한 순간 물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마 14:30)
예수님은 이것을 보고 믿음이 적다, 의심하였다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마 14:31-32)
이쯤 되면 자기를 부인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고, 심지어는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부인하지 못할 때에는 그리스도인의 특성을 모두 잃어버리기까지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질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를 들어 3년에 한 번씩, 5년에 한 번씩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면
그런데 성경은 놀라운 말씀을 하신다.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요일 2:22)
예수님을 부인하면 그가 바로 적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면 예수님을 시인할 수가 없는데, 예수님을 시인하지 못하면 그가 바로 적그리스도라는 것이다.
물론 적그리스도의 정체를 이야기한 것이지만, 심하게 표현하면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여 예수님을 시인하지 않으면 그는 마치 적그리스도와 같은 기능을 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일은 정말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점을 명확하게 하셨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마 12:30)
무서운 말씀이다. 오늘날의 신앙의 모습과 비교하면 정말 무서운 말씀이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을 통하여 이런 모습들을 보았다. 하나님과 함께 아니하였더니 하나님을 헤치는 자들이 되었다. 오늘날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중간상태에 머물러 있기를 좋아한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도 아니고 부인하지 못하는 것도 아닌 상태이다.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도 아니고 부인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도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이 그런 경우가 많다.
현대사회가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자기를 부인하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이것은 개인 신앙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현대 사회가 가지는 상황이 그렇게 만드는 측면이 강하다. 자기를 부인할 만한 상황을 거의 만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어떤 개념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면 살아있는 신앙이라고 하기 어렵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비록 시대적 상황이 자기를 부인하는 현장에서 동떨어져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자기를 부인하는 훈련을 해야 하고 그러한 상황을 만들어 프로그램화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신앙개혁을 위하여
나는 지금 신앙개혁이라는 주제를 말하고 있다. 신앙개혁의 첫 번째 단계는 자기를 내려놓는 것이다. 자기를 내려놓지 않고 교회를 개혁하고, 신앙을 개혁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개혁하자고 하면 가장 먼저 자기를 개혁해야 하고 자기를 개혁하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개혁의 전제조건으로 우리 자신의 것을 버리자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자기 목적을 성취하고 자기 이름을 높이려는 사명을 버리자. 교회 안에서 무엇인가 행함으로써 구원받고 상 받으려는 종교를 버리자. 헌신과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과시하려는 대상으로서의 사람을 버리자.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이 빠진 죽은 지식을 버리자. 예수님을 시인하기 위하여 자기를 버리자. 이런 조건들을 이야기한 것이다.
신앙개혁이라고 하여 거창한 구호나 대규모 집회를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참다운 개혁은 속으로부터, 밑으로부터 올라오는 개혁이어야 한다. 내적 변화 없는 외적 개혁은 뜬구름 잡는 것과 같은 것이고, 신앙개혁 없는 교회개혁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이상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개혁은 신앙개혁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버리자. 날마다 자기를 버림으로써 예수님만 시인하는 삶이 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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