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으세요.
버리자 2 : 사명을 버리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요 6:29)
20년만의 기도응답
나의 어릴 적 꿈은 교사가 되는 것이었다. 페스탈로치의 위인전을 여러 번 읽으면서 교사에 대한 꿈이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쯤에는 조류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당시 경희대 조류학자 원병오 박사님에 관한 기사들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꿈이었다.
대학생활 적응에 실패하면서 나는 목공예를 배우게 되었고, 공장에 다니면서 목공예품을 제작하는 일을 3년 정도 했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할 때쯤에는 이런 꿈들도 전부 사라지게 되었고, 의욕도 희망도 다 사라지고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입시지옥에 빠져 심리적으로 너무 힘든 결과가 그렇게 나타난 것이었다.
하나님의 절대은혜로 27살 때 예수님을 영접하고 이런 심리적인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게 되었다. 그리고 새롭게 시작한 일이 상업사진 스튜디오였다. 사진을 전공한 것은 아니지만 사진 작품을 취미로 하다가 친구와 함께 스튜디오를 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꿈도 3년 만에 접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 후 결혼하고 아버님이 운영하시는 창지사 직원으로 들어가 일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나의 출판인생이 시작되었다. 창지사는 주로 유아교육 전공서적을 출판하고 있었는데 편집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유치원을 세워보고 싶은 꿈이 생겼다. 그러나 입사 10년 만에 기독교서적을 출판하는 사명감을 가지고 이레서원을 설립하게 되었다.
이레서원은 전도소책자를 무한제작하여 무상 또는 저렴하게 지원하고 싶다는 바람에서 출발하였다. 하지만 현실은 그런 꿈을 조금도 허락하지 않았고, 내가 운영하던 20여년 간 한 해도 이윤을 남긴 적이 없는 초라한 성적표만 받아들었을 뿐이었다. 그 후 새소망교회를 개척하면서 동생 김기섭 목사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4년 전인 2013년 4월부터 국토순례전도단을 조직하여 전국에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 내가 만든 24쪽짜리 말씀소책자를 우리나라 구석구석까지 전파하는 것이 주된 수단이었다. 그리하여 3년 10개월 동안 말씀소책자 60만 부(제작비 9,000만 원 정도 소요)를 전국에 배포하게 되었다. 매주 월요일과 화요일에 어김없이 봉고차량에 소책자를 싣고 계획된 지역으로 향했었다.
그런데 그렇게 국토순례전도를 진행하던 초기의 어느 날 문득 이레서원 설립할 때가 생각났다. 갑자기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왜냐하면 20여년 전의 그 기도가 국토순례전도단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레서원 설립목적과 지금 국토순례전도단의 목적이 똑같았던 것이다.
이미 이레서원 설립 목적 같은 것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 기도제목은 사라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레서원은 이미 내 손을 떠나서 동생이 운영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젊은 집사 시절에 품었던 소망이 20년 후에 목회자가 되어서 이루어질 줄이야!
문득 하나님의 사명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나를 깨우쳤다. 내가 비전을 품으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밀어붙이는 것이 사명이 아닌 것이었다. 사명은 혹시 사람이 세울지 몰라도 그 사명을 이끌어 가시는 분, 이루어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셨던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가 세운 사명에 매몰되어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의 뜻을 이루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명은 하나님의 일
사명이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일평생의 과제이다. 사람들마다 이 사명이 전부 다르다. 이 사명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거듭나는 순간 각자에게 주어지는 평생의 일이다. 자신이 깨닫든 깨닫지 못하든 반드시 개인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마 4:19-20)
같은 사역 안에서도 사명이 제각각이다. 목회현장에서 같은 일을 하지만 세부적으로 들어가 보면 전부 다른 일들을 하고 있다. 목사, 전도사, 교사, 각종 전문사역자, 장로, 권사, 집사 등... 같은 목적을 가지고 일을 이루기 위하여 한 몸 안에서 여러 가지 직분들을 감당하게 된다.
한 마디로 하면 사명이란 하나님의 일이다. 일평생 자신이 받은 달란트를 가지고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는 것이다. 다른 의미에서 사명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그 일을 감당해야 한다.
그런데 이 사명에 대하여 많은 오해들이 있을 수 있다. 이 사명을 깨닫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충실하게 감당하면 좋은데, 사명지상주의가 되어서 사명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려는 태도가 문제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기준을 사명에만 맞추게 된다.
그 사명을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 쉽다. 그 사명에 열심을 내면 낼수록 그런 현상은 더욱 두드러진다. 그래서 예수님은 일찍이 사도 바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행 26:14)
사명감이 강한 사람일수록 이런 오류에 빠지기 쉽다.
사명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이라는 인식을 가진 사람일수록, 다시 말하면 사명감이 투철한 사람일수록 어쩌면 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기 사명에 투철한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의 뜻이라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다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하였다.
사명은 자라나는 나무와 같다. 나무의 줄기는 몇 갈래로 갈라져 자란다. 두 갈래, 세 갈래 나무의 큰 줄기가 뻗어 나와서 자라게 된다. 한 쪽 줄기만 나무가 아니라 다른 줄기도 나무이다. 그 줄기들이 자라면서 나무 전체를 이루어가는 것이다.
한 쪽 줄기가 다른 쪽 줄기를 쓸데없다고 한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사명을 감당하다보면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내가 하는 일만이 하나님의 일이고 그와 반대되거나 다른 일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자기 기준으로 판단하고 낮추어보고 비난한다면 그 나무를 더 자랄 수 없다.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자기를 기준으로 보면 다른 왼쪽 줄기는 너무나도 잘못된 것이다. 자기 기준으로 보면 원래 기둥조차도 비뚤어진 것이 된다. 하지만 원래 기둥의 입장에서 보면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자기에게 붙어 있는 모든 줄기들은 다 정상이다.
사명은 뿌리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나무를 보자면 사명은 나무뿌리와 같다. 뿌리는 나무와 함께 자란다. 나무가 커지면 뿌리도 깊어진다. 아니, 나무가 커지기 위해서는 뿌리가 깊어져야 한다. 뿌리가 깊지 못하면 나무가 아무리 크게 자라도 언젠가는 쓰러지기 때문이다.
땅 위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는 계속 자라면서 열매를 맺는다. 말하자면 사명은 이 열매를 맺는 것이다. 나무는 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 열심히 광합성작용을 한다. 하지만 만약에 뿌리에서 수분과 양분을 공급하지 않으면 아무런 열매도 맺을 수 없다. 나무도 뿌리와 함께 말라가거나 썩을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수분과 양분을 공급해 주시는 것이다. 일하는 사람은 자기 노력과 지혜로 많은 열매를 맺은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더 근원적이고 더 중요한 일을 하시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자기 사명에 매몰되어 자기 의를 더 내세우게 되는 것이다.
사명을 감당하려 할 때에는 하나님의 뜻보다는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심중을 먼저 헤아려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사람은 그저 하라는 대로 열심히 하기만 하면 다 되는 줄 안다. 그 열심에는 하나님의 마음도 들어있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도 다 사라져버린다. 하나님의 마음이 들어 있지 않은 사명은 예수님을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을 뿐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은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뜻, 사명의 단편만을 본다면 그것은 엄청난 위험이 될 수도 있다.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시키기 때문이다.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면 너무나도 좋은 일이지만 그는 그 사명을 다른 사람은 정죄하는 근거로 삼게 될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어떤 정의를 내리셨을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요 6:29)
하나님의 일 곧 사명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 곧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잘 믿고 있다고 대답할 것이다. 믿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일이 될 수 있나? 그렇다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고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고 언젠가는 다시 오실 줄 믿고 기다리는 우리는 다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일은 뿌리에 붙어 있는 것
그렇다. 분명한 신앙고백을 가지고 확신 가운데 어떤 시련이 와도 견디고 승리하는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일인 것은 틀림이 없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단순히 그런 의미로만 하나님의 일을 말씀하신 것일까? 아까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일’을 언급하신 것은 유대인들의 질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의 일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행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요 6:27)
그러자 유대인들이 이렇게 질문한다.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요 6:28)
여기에 대한 대답이 바로 하나님의 일에 대한 예수님의 정의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9)
그럴 때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시게 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 곧 하나님의 일, 다른 말로 하면 사명이란 무엇인가를 예수님께서는 정확하고 분명하게 말씀해주셨다. 생명의 떡을 먹는 것이 하나님의 일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목표를 정해주시고 할당량을 채워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먹고 그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이 사명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나무가 할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뿌리에 굳건하게 붙어 있는 일이다. 뿌리에 붙어 있는 것도 쉽지 않다. 바람과 비에 의해 흔들거리거나 각종 해충이나 병충해가 달라붙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전도목적으로 다육식물을 많이 길렀었다. 700여종을 한꺼번에 길렀는데 작은 아기 식물들을 수백 개씩 만들어 주민들에 나누어주곤 했었다. 다육식물을 기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수분관리이다. 다른 일반적인 식물들과는 달리 다육식물은 수분이 많으면 썩어서 죽게 된다. 상황에 따라 조금 다르지만, 다육식물은 한 번 물을 주면 일주일이나 열흘 동안 다시 주면 안 된다. 뿌리와 줄기 사이에 수분이 오래 사라지지 않으면 썩기 때문이다.
그런데 되도록 건조하게 키워야 하는 다육식물을 수경 재배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다육식물을 물속에 담가서 키운다고? 하지만 여기에는 작은 비밀이 있다. 물에 잠기는 부분은 뿌리만이라는 것이다. 뿌리는 물속에 담가도 안 썩지만 뿌리와 줄기가 붙어있는 부분에는 물기가 오래 지속되면 바로 썩어버린다. 다육식물의 경우에는 뿌리에 붙어있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은 일인 셈이다.
나무의 중요한 사명은 뿌리에 제대로 붙어 있는 것이다. 햇빛을 받으면서 광합성작용을 하는 것보다 훨씬 근원적이고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잎이 나서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히는 것이다. 사명이 이와 같다.
사명은 어떤 일을 성취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런 성취가 필요 없다거나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거나 하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신다. 연약해도, 미련하고 어리석어도, 죄를 지어 일시적으로 하나님을 떠나는 일이 있을지라도 그래도 하나님은 부족한 사람을 통하여 일하신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성취하시려는 그 일도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만약에 사명감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해나가는데 그 속에 하나님의 마음이 쏙 빠진다면 그 사명은 이루어질 수 없고 혹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금방 무너질 수박에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사명은 굉장히 중요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사명이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를 해치거나 이웃과의 관계를 무너뜨리는 것이라면 그 사명은 아무 소용이 없다.
큰 나무와 작은 나무
우리 동네에는 거여공원이 있다. 거여공원 옆을 지나가자면 큰 나무들이 줄이어 서있는 곳이 있는데, 그 나무들 아래로는 작은 나무들이 자라지 못하고 풀들마저 자리 잡지 못해 흙이 상당부분 차지하고 있다. 햇볕이 오후에는 땅에까지 비치는데도 다른 식물들은 자라지 못하는 것이다. 큰 나무가 작은 나무들을 자라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사명을 열심히 감당하는 성도, 사역자, 교회들이 있다. 참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들처럼 능력도 없고 믿음도 부족하고 실력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을 존중한다. 존경한다.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지?”
하지만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이 쏙 빠진 채 일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그 일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한다면 나는 단언하건대 저들에게 차라리 그 사명이라는 것을 버리라고 말하고 싶다. 그 사명이 하나님과 무관하고 사람들을 정죄하는 근거가 된다면 그런 사명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작은 나무들을 자라지 못하게 하는 큰 나무처럼 자기 사명만이 옳은 것이고 다른 작은 일들은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취급한다면 그 사명은 올바른 사명이 아니다. 자기 사명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은 바리새인들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아니 그들이 바리새인들이다.
사명 때문에 하나님을 배반하고 메시야를 처형한 사람들이 되지는 말아야 하겠다. 그 사명 이전에 예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을 간직하고 그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없다면 그 사명은 헛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심장을 가지고 예수님의 눈길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의 발걸음을 따라 걸어가서 예수님의 손길로 세상을 보다듬는 것, 이것이 정말 사명이 아닌가!
어설픈 사명을 버리자. 예수님의 생명을 잃어버린 사명은 사명이 아니다. 예수님과의 동행이 우선순위가 되지 못한 사명은 사명의 생명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생명력을 잃어버린 사명은 죽은 사명이다. 그런 사명을 죄다 쓸어버리자. 그리고 오직 생명이신 예수님과 항상 동행하도록 힘쓰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자.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의 삶을 닮은 작은 예수들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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