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편에 서기

버리자 3 : 사람을 버리자.

김완섭 목사 2017. 7. 19. 14:09

종교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으세요.


버리자 3 : 사람을 버리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16:15)

 

노방전도자


내가 잘 알고 있는 노방전도자가 한 분 계신다. 평신도 시절에 이 분의 간증집을 출판하고 싶어서 연락처를 알아 만날 약속을 하였다. 그 시절 이레서원은 신학도서를 출판하지 않고 간증집이나 일반 신앙서적을 출판하고 있었다. 아무튼 이분을 만나기 위해 노량진역으로 갔는데 어디 계신지 찾을 수가 없었다.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데 어디에선가 누가 고함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계단 위 역사 쪽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퍼지고 있었다. 곧이어 얼굴은 까맣게 그을려 있었고 낡은 양복에 빨간 어깨띠를 띠고 있는 이분의 모습이 나타났다. 의기양양 그 자체였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너무나도 자랑스러워하는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보면서 자신 있게 복음을 외치고 있었다. 나는 원래 한국병원선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에 전도하는 모습에는 익숙해 있었다. 노방전도하면서 소리치는 모습에 조금도 거부감이 없었다.

 

나는 이분과 함께 찻집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나도 이분과 함께 자랑스러운 마음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분의 간증을 녹음하기 위하여 부천에 있는 자택으로 열 번이 넘게 찾아가서 녹음해 온 것으로 글을 만들어 출판까지 했었다. 책 제목이 주 예수 믿고 좋아좋아 살판 났네였다.

 

아무튼 무엇이 이분을 그토록 씩씩하고 담대하며 변함없이 복음을 외치게 만들었을까? 물론 성령님의 능력이다. 복음에 대한 열정 때문이다. 자신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께 너무나도 감사하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다. 누군가로부터 인정받고 싶기 때문이라고. 하나님과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복음에 대한 열정과 합쳐져서 놀라운 일들을 지치지 않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만약에 누가 정말 진정성을 가지고 어떤 일을 할 때 힘들지만 오랫동안 묵묵히 감당하고 있는데 그것을 단 한 사람도 알아주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끝까지 그 일을 할 수 있을까? 결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동기가 분명하고 사명이 투철하다고 해도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그 일을 끝까지 하기는 힘들다.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일을 끝까지 감당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정을 기대하는 사람들이다.

 

사람을 의식하면


하지만 사람이 사람 없이 살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지 않고도 정상적으로 살 수가 있을까? 사람과의 관계는 인간이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기능을 한다. 사람과의 관계가 어려운 사람은 세상에서 잘 적응하기가 어렵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사람과의 관계만큼 소중한 것은 없을 것이다.

 

다시 노방전도자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나는 몇몇 분의 노방 전도자를 알고 있지만 아직 직접 만난 적이 없는 어떤 사람도 알고 있다. 노방전도자들은 대부분 튀는 모습을 조금도 개의치 않는 사람들이지만, 이분은 정말 사람들에게 독특한 모습을 자랑스럽게 하고 다닌다.

 

한복 비슷한 복장에 두루마기까지 걸쳐 입는데 옷에 복음에 관한 글자를 만들어 붙여 옷 전체가 무슨 공책처럼 보이게 입는다. 그리고 한국 말을 하지 하고 방언으로 계속 떠든다. 그리고 사진을 찍는데 항상 자기 모습이 가장 크게 보이도록 찍어서 블로그 같은 데에 올린다.

 

나는 이 분에 대해 인터넷에서밖에 본 적이 없지만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분은 무엇 때문에, 어떤 힘에 의해 노방전도를 지속적으로 행하고 있을까? 물론 이분도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외적인 모습으로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더 크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아닐 수 있다.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켜 복음을 더 정확하고 효과적으로 전달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우리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하게 되면 사람을 의식하게 되고, 사람을 의식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질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기쁘게 하고 사람에게 자랑하게 되고 영광을 추구하기 쉽게 된다는 것이다.

 

기독교 내의 수많은 오류들이 왜 생기는가! 하나님의 인정이 아니라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이 아닌가! 사람들 안에서 영광을 누리고 사람들에게 자기 영향력을 끼치고 사람들을 지배하고 더 크고 더 높아지고 너 넓어지려는 것이 아닌가!

 

니코틴에 중독된 사람들은 담배의 노예가 된다. 담배가 떨어지면 쓰레기통을 뒤져서라도 꽁초를 찾아낸다. 알콜에 중독된 사람은 술의 노예가 된다. 마찬가지로 사람을 의식하고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는 사람은 사람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사람을 어떻게 볼 것인가?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람을 어떻게 볼 것이냐이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시각으로 사람을 바라보는가에 따라 신앙이 전혀 달라질 수 있다. 이는 곧 세상을 바라보는 세계관으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관계의 중요성을 잘 아시기에 이웃사랑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삼으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강령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꼽으셨던 것이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12:30-31)

그러므로 이웃과의 인간관계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관계를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사람이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나도 남에게 소중하게 여김을 받을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말라고 가르치신다.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6:37)

 

더 나아가 예수님은 우리가 대접을 받고 싶은 대로 다른 사람을 대접하라고 가르치신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7:12)

그리고 예수님은 인간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제시하시는데, 그것은 원수조차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6:27-28)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보다 더 큰 일은 없다. 타인을 볼 때에 마치 그 타인이 자기 자신인 것처럼 여길 수 있어야 한다. 아이들을 보면 마치 자기 아이들인 것처럼 대해야 하고 노인들을 보면 마치 자신의 어머니인 것처럼 대하라는 말이다.

 

심지어 예수님은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을 볼 때 마치 자기 자신이 그런 처지에 놓인 것처럼 대하라고 하신다. 그래서 옥에 갇힌 사람이나 굶주린 사람을 보면 그들을 도와주라고 하신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25:35-36)

 

또 예수님은 자신에게 같은 죄를 여러 번 지은 사람이라도 다 용서하라고 가르치신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18:21-22)

 

과연 사람이 그럴 수 있을까? 자기에게 죄를 지은 사람이 돌아와 용서를 구하면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이라도 용서할 수 있을까? 과연 어떤 사람이 옥에 갇혔을 때 내 일처럼 돌볼 수 있을까? 굶주린 사람을 보면 내가 먹을 음식까지라도 대접할 수 있을까? 나그네로 잘 곳이 없는 사람을 보면 자기 잠자리라도 제공할 수 있을까?

 

불가능할 것 같은 이야기이지만 사실은 우리 생활 속에서 전부 일어날 수 있는 현실적인 이야기들이다. 사람들은 자기 자녀의 잘못에 대하여 한없이 용서한다. 자식이 아무리 잘못해도 결국은 부모가 용서할 수밖에 없다. 만약에 자식이 감옥에 갇혔다면 부모 된 자로서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또 자식이 굶주리거나 잘 곳이 없어 헤매거나 병들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단숨에 달려가 자식을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하지 않겠는가?

 

나는 나의 어머니의 용기에 지금까지도 감탄하는 것이 있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부터 시작된 입시지옥의 상황 속에 수많은 심리, 정신적 상처로 얼룩져있는 사람이었다. 그렇지 않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있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장애로 남아있었다. 그래서 서강대학교에 들어갔지만 대학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2학년 때에 고향 안동으로 도망가 버렸었다. 군대 신체검사를 받으러 안동에 갔다가 서울로 올라가지 않고 그냥 눌러앉아버렸던 것이다. 그 바람에 대학에서는 제적(퇴학)처리가 되어버렸다. 나는 지칠 대로 지쳐서 장래고 뭐고 다 포기해 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이 때 어머니께서 대학교 교무과에 찾아가셨다. 교무처장을 비롯한 직원들에게 사정사정하여 자퇴로 바꾸어달라고 간청하셨다. 하지만 이미 제적(퇴학) 처리가 된 마당에 그것을 돌릴 수는 없었다. 그래도 어머니는 댁에도 자식이 있을 것 아니냐고, 자식이 이렇게 되면 교수님 같으면 가만히 있겠느냐고, 젊은이 한 사람의 앞길이 달려 있으니 제발 좀 자퇴 처리해 달라고, 다 사람이 하는 일인데 안 되는 일이 어디 있느냐고 붙들고 늘어지셨다.

 

어머니는 경북 영주에서 초등학교 밖에 못 나오신 분이다. 그래도 그 당시 시골마을에서는 두 번째로 초등학교에 보낸 것이었단다. 마을 주변에서 여자를 무슨 학교에 보내느냐고 빈정거렸단다. 아무튼 어머니는 남들보다 많이 배우신 분도 아니었고 사회에서 활동하는 여성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대학교에 용감하게 찾아가셔서 되지도 않을 일을 해내셨다. 그 자퇴 처리 때문에 나는 후에 다른 대학교에 편입할 수 있었고 졸업할 수 있었다.

 

이것은 무슨 힘인가! 똑똑하거나 배경이 있거나 아는 사람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식 사랑의 힘이었다. 아들을 위해 희생하려는 사랑이 없었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사람을 사랑의 대상으로 할 때 그 사람은 위대한 힘을 발휘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런 사랑의 시각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대할 때 마치 자기 자신이나 자식을 대하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가능한 이야기이며 그것이 이웃사랑의 실체이다. 이웃은 그렇게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들이다. 그 이웃은 우리가 보기에 형편없어 보이는 사람일지는 몰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 어느 영혼보다 더 귀중한 영혼일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께 귀중한 존재이듯이 이웃도 하나님께 그만큼 귀중한 존재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


그런데 이렇게 소중하게 여겨야 할 사람들, 나만큼이나 하나님께 소중한 존재인 사람들이 문제이다. 생각해 보라! 우리 인간의 죄는 전부 누구 때문에 생기는 것일까? 전부 사람 때문에 생긴다. 사람들이 서로 부딪히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결국 전쟁도 사람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돈이라는 것도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다른 사람을 이기고 지배하고 과시하려고 해서, 다시 말하면 사람들 위에 군림하기 위해 돈이 필요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누리기 위해 돈이 필요한 것이다.

 

사람은 사람 속에서 살아가는데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가 문제이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자기 자신이나 자기 가족들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원수라도 사랑하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신다. 실천하기는 힘들지만 적어도 그런 마음가짐으로 사람을 바라보아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예수님은 사람을 조심하라고 가르치신다. 인간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 예수님은 분명하게 가르치신다. 예수님은 사람을 사랑의 대상으로 보아야 할 것을 가르치신다. 예수님은 사람을 어떤 수단을 위한 도구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신다.

 

예수님은 무슨 일이든지 사람에게 보이려고 행하지 말라고 가르치신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6:1)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6:5)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6:16)

 

또 예수님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하지 말라고 가르치신다.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23:5)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23:7)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6:2)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그 모든 일들은 대부분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이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책망 받아야 할 모든 일들은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일들이라는 것이다. 기도나 금식이나 의로운 일이나 복장이나 구제와 같은 일들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람을 의식하지 말고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무슨 일을 할 때에는 그 내면이 다 드러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23:28)

사람에게 칭찬받고 영광 받고 인정을 받게 되면 이미 하늘의 상이 사라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6:1)

 

그런데 그렇게 하면 오히려 사람들에게서 외면을 받게 된다고 하신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10:22)

외면이나 박해나 위협 등 사람에게서 나오는 반응에 굴복하지 말라고 하신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10:32)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은 다 아신다.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6:18)

하나님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겉으로 드러내는 행위보다는 진실된 마음을 원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16:15)

 

사람을 버려야 한다.

나는 공장도 다녀보고 사진 스튜디오도 운영해보고 직장도 다녀보고 회사운영도 해보았다. 그런데 직업 중에 가장 힘든 직업을 꼽으라면 나는 첫 번째로 목회를 꼽는다. 늦게 목회를 시작한 지 6개월 정도 되면서 수십 년 간 사회에서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들을 자주 만났다.

 

처음으로 구역장을 맡아서 2년 동안 열심히 섬겼던 집사님이 있었다. 목장이 잘 되고 전도도 이루어지고 있어서 고맙게 생각했는데 한번은 이런 질문을 하였다.

목사님은 성도들이 이렇게 저렇게 여러 가지 이유들로 나가는데 어떻게 견디세요? 저는 같은 성도인데도 구역원들로부터 너무나도 상처를 많이 받는데요.”

사실 모든 상처는 사람들로부터 받는 것들이다. 사람으로부터 받는 상처가 가장 크고 빈번하게 일어나는 곳이 교회이다.

 

보통의 경우에 목회자들은 크고 작은 상처들로 얼룩져 있다. 어느 목사님이 산에 갔다가 속이 꺼멓게 썩어있는 큰 나무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무야. 너도 개척교회 목사인가보다. 속이 시꺼멓게 썩어있는 것을 보니.”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이런 상처를 속에 품고 살아간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성도가 배반했다고 이야기할 때가 있다.

그 집사가 그럴 수가 있나?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데

하지만 목회를 오래 했던 목회자들은 이렇게들 위로하고 권면한다.

그러니까 성도를 내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안 돼. 목사만 상처받아.”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 성도를 자랑거리로나 교회 일을 위한 수단으로나 반대급부를 바라는 대상으로 삼지 말라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양으로, 사랑과 희생의 대상으로 생각하라는 것이다. 성도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하거나 성도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목회자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마음가짐을 가질 것을 원하신다. ‘나는 목회자가 아니니까하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에게 그럴 수는 없지만 내 주변에서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마음을 품으라는 것이다. 항상 그럴 수는 없지만 이웃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는 그런 마음으로 돌보라는 것이다. 사람을 보는 시각을 바꾸라고 하시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제대로 믿으려면 사람을 버리는 수밖에 없다. 사람을 의식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 방법은 사람을 버리는 수밖에 없다. 자랑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되 자기 몸처럼 생각하고 도와주라는 것이다. 아무런 반대급부도, 심지어 심리적인 반대급부도 돌려줄 수 없는 사람들을 챙기라는 것이다. 사람을 배반하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을 완전히 바꾸라는 것이다.

 

사람의 본성이 있는데 그것이 되겠는가! 명예욕구와 지배욕구와 내가 받을 기대욕구가 인간의 속성인데 그것이 되겠는가!

되니까 하라고 하신다. 가능하니까 실천하라고 하신다. 하나님이 온전하시니 우리도 온전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5:48)

 

사람을 버리자. 그리스도인의 일평생은 사람을 버리는 연습이다. 버린 사람의 자리에 하나님으로 채우시란다. 사람을 사랑의 대상으로 보라고 하신다. 사람을 섬김의 대상으로 삼으라고 하신다. 사람의 희생의 대상으로 여기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자랑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버리자. 명예를 얻는 수단으로서의 사람은 버리자. 지배나 권력의 대상으로서의 사람은 버리자.

 

사람을 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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