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하늘의 상을 바라보고 헌신하세요.
하늘의 상 1 : 냉수 한 그릇의 상
천국은 포인트제일까?
재미있는 상상을 해 보았다. 예수님은 분명히 천국에 보물이 쌓인다고 하셨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마 6:20)
그러면 그 상급은 어떻게 쌓이는 것일까? 포인트로 쌓이는 것일까? 아니면 호봉 또는 승급제로 올라가는 것일까? 아마도 승급제와 포인트제가 포함된 제도가 아닐까 한다.
상상해 본 이야기지만 사실 포인트로 하늘에 보물이 쌓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물 한 그릇 대접하는 일에도 결코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막 9:41)
작고 보잘 것 없는 일일지라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한 일은 반드시 기억하시기 때문이다.
나는 과거에 출판사를 차려서 운영하다가 경제적으로 너무 힘이 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 때 암웨이 다단계 판매를 잠시 한 적이 있었다. 다단계라 하면 부정적인 생각들을 하지만, 국가도 인정하는 정상적인 유통구조의 상업행위라고 할 수 있다. 비록 나는 그런 영업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 8개월 만에 접었지만, 다단계의 원리가 너무 재미있었다.
다단계의 기본적인 성격은 상품을 소비하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피라미드와 같이 비정상적인 다단계와는 달리 정상적인 다단계는 사람장사가 아니다. 그런데 다단계 사업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 매력이 있는 것은 판매조직을 통한 이윤의 확보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설득해서 자기 이름 밑에 등록하기만 하면 등록된 사람들이 소비하는 물품가격에서 일정부분이 자기에게 이윤으로 지급되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밑에 등록된 사람들 뿐 아니라 그 밑에, 또 그 밑에 등록된 사람들에게서도 이윤이 지급된다. 이렇게 하여 자기 이름 밑에 수십 단계의 사람들이 등록하면 수백 명이 되기도 하고 수천 명이 되기도 한다. 오랫동안 이런 영업활동을 지속적으로 하면 수만 명의 소비자를 거느린 판매자가 된다. 비록 각 사람으로 따지면 아주 작은 이윤이기는 하지만 이 수만 명의 상품 사용을 통한 이윤이 쌓여서 연봉 수십억의 소득자도 탄생되는 것이다. 다단계 사업을 하는 사람들의 꿈이 바로 이런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 당시에 나는 이런 형태의 유통구조를 보고 참 감탄했었다. 만약에 전도를 이런 식으로 한다면 수많은 성도들이 전도하는 데 더욱 열심을 낼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단계 판매는 이윤이 직접적인 돈으로 제공되지만 전도를 이런 식으로 한다면 돈으로는 줄 수 없고 하늘의 상으로 준다고 할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다단계 판매가 사실 극도의 포인트 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천국의 상은 포인트가 쌓여서 영적인 보물로 지급되는 것이 아닐까? 그냥 재미로 생각해 본 것이다.
하지만 명칭은 별개로 하고 정말 천국의 상급이 포인트로 쌓인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물론 정말로 점수가 차곡차곡 쌓여간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우리가 이 땅에서 행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하늘에서는 다 기억되는 것은 틀림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어떤 행위에 상 주시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상을 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기준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최소한의 기준
마가복음에서는 하늘의 상의 최소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막 9:41)
물 한 그릇인데, 곧 물 한 컵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
20대 중반에 열흘 정도의 여행을 떠난 일이 있었다. 배낭에 거의 열흘치 쌀을 집어넣었더니 엄청나게 무거웠다. 동해안의 몇몇 해수욕장을 거쳐 마지막 코스로 오대산 정상을 넘어 반대편으로 내려가는데 날이 어두워졌다. 산에는 해가 빨리 지는데 우리가 거리 계산을 잘못하여 많이 늦은 것이었다. 캄캄한 산속에서 부스럭 소리가 나는데 덜컥 겁이 나기도 했고 산에서 죽을 것 같은 마음도 들었다. 거의 하루 종일 산을 타다가 보니까 지칠 대로 지쳐 있었고, 그 자리에서 그냥 잠들고 싶었다. 앞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 날 산을 넘자고 주장했던 후배가 앞서 정탐 같은 것을 하고 있었는데, 멀리서 소리쳤다.
“형! 집이 보여요!”
그 말에 힘을 얻어 후배가 있는 곳까지 가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니까 정말 불빛이 보이는 것이었다. 우리는 걸음을 빨리하여 민가가 있는 곳으로 급히 내려갔다. 그대로 주저앉고 싶었지만 마지막 힘을 내어 내려간 것이었다.
무작정 어느 집을 두드렸다.
“혹시 밥 좀 남은 것 없어요?”
우선 물 한 그릇을 달라고 하여 벌컥벌컥 들이켰다. 천하에 그런 맛이 없었다.
마침 밥이 남았다면서 식은 밥을 내주셨다. 깡보리밥에 감자가 듬성듬성 박힌 밥이었다. 우리 네 사람은 정신없이 밥을 물에 말아 짠지 쪼가리하고 밥을 먹는데 정말 꿀맛이었다. 밥을 다 먹고 우리가 어떻게 했는지 아는가? 상을 물리지도 않고 다들 밥 먹던 그 자리에 그대로 쓰러져 잠속으로 골아 떨어졌다. 그 강원도 화전민들은 얼마나 황당하셨을까?
이튿날 일어나서 주인 어르신께 백배 사죄하였다. 하지만 그 어르신들은 별 일 아니라는 듯이 마음 좋은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우리에게 남겨진 얼마 되지 않는 돈을 드리려고 하였지만 한사코 거절하셨다. 아침까지 얻어먹고 잠시 쉬었다가 그 마을 청년 몇 명을 만났는데 지금 뱀 잡으러 간다고 했다. 궁금하여 같이 가고 싶었지만 우리는 서울로 가는 마지막 길이라 포기하고 산을 내려왔다. 이럴 때의 물 한 그릇은 생명수와도 같이 느껴질 것이다.
천국에서 상을 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은 값없이 먹을 수 있는 물 한 그릇일 뿐이다. 하지만 단지 물 한 그릇일 뿐일까? 먼저 물 한 그릇을 주는 마음가짐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일 수도 있고 화가 나 있는 상태이거나 무감각한 마음일 수도 있을 것이다. 빨리 가버리면 좋겠다는 마음일 수도 있을 것이고, 두려운 마음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에 속한 자라 하여
하지만 물 한 그릇에 대한 말씀을 다시 살펴보면 물이 필요한 사람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막 9:41上)
물 한 그릇을 그리스도께 속한 자에게 베풀 때 상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단순히 물 한 그릇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속한 자라는 이유 때문에 베풀어질 때 상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에게 베푸는 물 한 그릇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인가? 물론 그렇지는 않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에게 베풀되 차라리 갚을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베풀라고 하셨다.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눅 14:13-14)
이 말씀의 초점은 겸손과 섬김에 있다. 이 말씀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섬겨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초청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을 보고 하신 말씀이기 때문이다(눅 14:7). 내가 누구를 섬기든지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사람들을 섬기면 반드시 갚음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상은 무엇을 얼마만큼이 아니라 어떤 자세로 섬기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에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 줄 때 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 이유는 따로 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 물 한 그릇 주어서 복을 받고 전도의 열매를 맺힌 한 여인이 나온다.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요 4:9)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치운 이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께 생수 한 그릇을 올렸다가 복의 주인공이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왜 물 한 그릇 주었는데 상이 따르는가에 대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사람에게 한 것이 곧 예수님께 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칭찬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으라고 말씀하신 의인들에 관해서 살펴보자.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마 25:35)
하지만 의인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주님을 대접한 적이 없었다.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마 25:37)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에서 물 한 그릇에도 복을 받아야 하는 근거를 말씀하신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 25:40)
그러니까 그리스도에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줄 때 상을 받는 근거는 바로 물 한 그릇을 예수님께 드린 것과 같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모든 일을 예수님께 하듯 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모든 이웃들에 대하여 성도가 취해야 할 자세는 모든 일을 예수님께 하듯 하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마가복음 9:41에 나오는 이 말씀의 주어는 우리가 아니라 ‘누구든지’이다. 믿는 사람이든 안 믿는 사람이든 어린아이든 어른이든 어떤 사람이라도 우리가 그리스도에 속하였다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줄 때에 결코 상을 잃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물 한 그릇을 받는 사람은 우리의 상대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다. 제자들이며 복음 전파자들이며 그리스도인들이다. 우리를 대접하되 그리스도에 속하였다는 이유 때문에 대접하는 것을 말한다.
그 다음 절인 마가복음 9:42를 보면 ‘작은 자’라는 말이 나온다. 이 작은 자라는 표현에도 ‘나를 믿는’이라는 전제가 들어간다.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막 9:42)
그러니까 작은 자이든 어떤 자이든 그리스도인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무엇을 베풀 때 반드시 복을 받게 되어 있다는 말씀인 것이다. 물 한 그릇의 복이라고 할 때 그것은 그리스도인에게 베풀어졌을 때 상을 받을 만한 것이 된다.
예수의 이름으로
하지만 그것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니다. 한글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영어성경에 보면 ‘in My name'이라는 구절이 들어간다. ‘주의 이름으로’인데, 이 말은 막 9:37에도 나온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그러니까 물 한 그릇을 ‘주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에 속한 자라 하여’ 베풀면 보상을 받는다는 말씀이다.
세상에는 좋은 일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나 기관들이 참 많다. 그 중에 몇 년 전 방영했던 TV 다큐멘터리가 생각난다. 인도의 어느 큰 사원에서는 매일 무료급식을 베푸는데 한 번에 십만 명이나 급식을 한다고 한다. 어느 사원인지 생각나지 않아서 인터넷을 찾아보았는데 정확히는 찾을 수 없고 대신 인도 펀자브주 암리차르의 시크교 황금사원 무료급식이 나온다. 이곳에서도 하루 2만-4만 명에게 무료급식을 베푼다고 한다.
우리나라 청량리의 밥퍼 사역보다 훨씬 큰 섬김이다. 밥퍼 사역이 작다거나 별 일 아니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뭘 조금 베푼다고 내세울 것이 없다는 말이다. 베푸는 일 자체만 보면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베풀어주는 곳은 많으니까. 더 많이 베풀고 더 오랫동안 섬긴다고 해서 보상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언제인가 지자체 기관에 간 일이 있었는데 불교 자선단체가 참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있었고 그 속에서 함께 섬기는 불교신도들의 봉사를 통하여 그런 일들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물론 봉사사역 전체를 놓고 보면 기독교기관에서 섬기는 일이 훨씬 많다. 태안 기름유출사고로 기름때 제거하는 일에도 거의 80% 이상이 교회단체에서 봉사를 왔다고 한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봉사하고 섬기는 교회가 얼마나 많은가?
무조건 봉사를 많이 한다고 해서 주님께서 보상해 주시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는 그리스도인이 과부와 고아와 옥에 갇힌 자를 돌보았을 때 상을 주신다고 약속해 주신다. 그리고 복음전도자 등 그리스도인에게 그리스도에 속한 자라는 이유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섬길 때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보상해 주신다고 약속해 주신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좋은 일을 했을 때 그 사람이 아무런 보상 없이 순수하게 섬기면 귀한 것으로 인정해준다. 하지만 정말 아무런 보상도 받지 않는 것일까? 대부분의 경우에 어떤 형태이든 보상을 받게 되어 있다. ‘자기 의’라는 보상을 받을 수 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마 6:1)
영광이라는 보상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 6:1-2)
‘사랑’이라는 보상을 받을 수 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 5:46)
‘종교적 권위’라는 보상도 가능하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 6:5)
‘종교적 거룩함’이라는 보상도 가능하다.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 6:16)
하지만 주님께서는 세상에서 받을 수 있는 그런 보상들은 이미 자기 상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하늘에서의 상은 줄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하면 하늘의 상을 받을 수 있을까? 무슨 일에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면 된다. 어떤 일에서도 자기를 내세우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해야 한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7)
물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한다고 해서 무조건 상을 주시는 것은 아니다. 주의 이름으로 행했어도 주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시는 경우도 많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밣기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그러므로 주의 이름으로 모든 일을 행하되 자기 자랑이 아니라 주께서 칭찬하시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고후 10:18)
그리스도인은 모든 일에 그리스도 예수님을 항상 앞세워야 하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해야 한다. 그럴 때 주께서는 냉수 한 그릇에라도 반드시 상을 주시는 것이다.
작은 것의 힘
만약에 예수님께서 물 한 그릇에도 상을 주시는 분이시라면 그러면 어떤 때에 큰 상을 주실까? 다른 말로 하면 물 한 그릇의 상은 어느 정도의 가치를 지닌 것일까? 물 한 그릇에도 상을 주시겠다는 이 말씀의 숨겨진 의미는 무엇일까? 왜 겨우 물 한 그릇을 주께서 주시는 상의 최소한의 단위로 말씀하셨을까?
주님은 그리스도에 속한 자라는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 한 그릇을 제공할 때 상을 주신다. 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될 때 예수님은 보상해 주겠다고 하셨다. 이 두 가지 조건에 맞기만 하면 그 행위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반드시 기억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얼만큼 보상해 줄 것인가 하는 문제는 하나님의 권리이다. 주님은 최소한의 단위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최소한의 단위를 베푸는 중심을 보신다.
알다시피 예수님은 크기나 부피나 숫자에는 별로 관심이 없으시다. 한 과부가 드리는 가장 작은 헌금을 예수님은 가장 크게 기뻐하셨다.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막 12:42-44)
예수님께서 작은 것의 원리를 여러 곳에서 말씀하셨다.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마 13:31-32)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 25:40)
예수님은 인간의 속마음을 잘 아신다. 사단이 에덴동산에 침투하여 인간의 탐욕성을 자극하고 거짓을 이용하여 타락하게 만들었다. 그 이래로 인간은 속마음과 겉모습이 많이 달라졌다. 탐욕은 인간의 속성이 되었으며 거짓은 마귀의 속성으로 인간을 속이는 데 사용된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가장 큰 장벽이 탐욕과 거짓이 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복원시키는 데 가장 핵심이 되는 말씀을 주신 것이다. 인간은 큰 것을 지향하지만 하나님은 내면을 지향하신다. 성도의 내면이 외적인 크기가 아니라 내적인 심령에 맞추어지기를 하나님은 바라시는 것이다. 외적인 크기는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주실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역이다.
내가 아무리 외적인 크기나 숫자를 추구하더라도 그것을 이루어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것을 모르고 성공이나 크기가 하나님의 복이라고 착각하게 되면 작은 것의 소중함을 잃어버린다. 내가 외적인 크기를 성취했다고 해도 작은 것의 의미를 모른다면 크기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예수님은 계속하여 작은 것의 원리를 제공해주신다. 작은 것의 원리는 주님 앞에 불려갈 때까지 간직해야 할 그리스도인의 가치이다.
야고보 사도는 작은 것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약 3:4-5)
큰 것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작은 것이 지배한다는 말씀이다.
기독교는 바로 이 작은 것의 원리에 충실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큰 교회, 큰 사역, 큰 선교를 추구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작은 교회도 작고 바르며 세상을 좌우할 수 있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큰 교회를 비판하면서도 사실은 큰 교회를 지향하고 있다.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과 방향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이 작은 것의 힘이 어디에서 오는가를 잘 설명해 주신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 16:10)
우리는 작다고 무시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마치 인류를 구하는 일인 것처럼 대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정말 복된 사람이다. 상을 주시는 하나님, 작은 행위도 결코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 그 작은 일을 보시고 더 큰 것을 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믿고 작은 일에 충성하여 하늘의 상급을 받을 수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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