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편에 서기

하늘의 상 3 : 박해받음의 상

김완섭 목사 2017. 10. 29. 10:55



박해받음의

 

회사의 근무조건을 바꾼 집사

이미 언급했던 대로 신약성경에서 큰 상을 주실 것이라는 구절은 세 군데 나온다. 첫 번째는 이미 살폈던 것처럼 원수를 사랑하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주는 이웃사랑의 상이다. 두 번째는 믿음 때문에 박해를 받은 것에 대한 상이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5:11-12)

 

그런데 놀랍게도 박해를 받는 그 자체로 이미 상을 받은 것이라고 하신다.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받는 박해와 비난 자체에 대하여 이미 하늘에서는 큰 상을 준비하신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어찌 보면 박해받을 짓을 하라는 말씀으로까지 들린다.

나를 믿고 살아가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고 박해를 받고 거짓의 악한 짓을 당하면서 살아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너희에게 큰 상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예수님을 제대로 믿으면 저절로 박해가 따라오게 되어 있다는 말씀과 다름 아니다.

 

거여동의 어느 교회에 한 집사님이 있었다. 이 집사님은 평택에 있는 어느 전자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이 집사님은 교회에 매우 충성된 사람이었고 열정을 가지고 헌신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주일은 아예 교회를 위해 온전히 섬기는 일꾼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다니는 회사는 하루 3교대씩 일하는데6일 일하고 하루 쉬면서 3개월마다 근무시간을 변경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는데, 회사 전체가 5일 일하고 하루 쉬면서 매주 시간을 바꾸게 된 것이었다. 6일 일하고 하루 쉬게 되면 다른 사람과 쉬는 날을 바꾸거나 해서 주일에 쉴 수 있었는데, 5일 일하고 하루 쉬면서 매주 근무시간이 바뀌면 주일을 제대로 쉴 수가 없게 되는 것이었다. ,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나?

 

물론 주일에 교회에서 온전히 일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이 집사님은 주일만큼은 교회를 위하여 헌신하는 날로 정해놓고 있었다. 집사님은 회사에서 정한 근무 제도를 바꾸어 주일에 교회에서 일할 수 있도록 만들기로 했다. 일단 교회와 목사님께 기도제목을 알렸다. 목사님이 우리 기도회 멤버였으므로 자연스럽게 거목회 목사님들과 사모님들도 모일 때마다 기도했다. 이 근무조건이 바꾸어질 때까지, 주일이 오면 다른 직원들과 근무를 바꿀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바꾸었고,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에는 회사에서 허락한 한도 내에서 휴가를 하루씩 사용하기로 했다. 그러는 한 편 직원 건의함에 꾸준히 건의문을 올렸다. 물론 익명으로.

 

그렇게 한 결과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가? 그 회사 직원이 3,000여명 되는데, 다른 부서는 이미 결정된 대로 5일 근무하고 하루 쉬는 것으로 시행되고 있었지만, 이 집사님이 근무하는 부서 직원이 70명가량 되는데  그 부서만 6일 일하고 하루 쉬는 것으로 결정되었다고 하였다. 회사 전체가 변경하여 시행하고 있는 근무 제도를 집사님의 부서만 그대로 유지하게 된 것이었다.

 

이것은 현대 산업화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생활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 하는 문제와 함께 그 복잡한 불신 세계에서 그리스도인이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물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그런 문제들을 극복해 나갈 것인지에 대한 일종의 방향 제시와 같은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 집사님이 이야기처럼 그냥 아무런 저항 없이 이런 성취를 이루어낸 것은 아니다. 숱하게 상사와 부딪치고 주일이면 합법적인 휴가 중 하루를 써서라도 쉬려고 노력하고, 회사 내에도 교회 사모를 위시하여 권사, 집사 등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있는데 회사의 모든 조건을 그냥 감내하고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는 그들에 대한 서운함 또는 그들의 부정적인 시각과 싸우고, 교회에서는 한 끼씩 금식하며 풀릴 때까지 작정기도하며, 심히 걱정하는 목사님과 사모님을 오히려 격려하는 일까지 이 집사님은 그렇게 환경과 사람과 자신과 싸워서 이겨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집사님과 박해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성도는 자기 신앙양심대로 살아내려고 하면 할수록 박해는 더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따라가면 박해는 오지 않고 고난도 피할 수 있다. 아무 문제 없이 먹고 살고 학교 보내고 휴가 갈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자기 신앙양심을 따라 살려고 하면 반드시 박해는 따라오게 되어 있다. 마태복음 5:11 첫 절 나로 말미암아라는 말씀이 바로 그 말씀인 것이다.

 

선지자에 대한 박해

그런데 그렇게 받는 박해는 원래 누가 받았다는 말씀인가? 다시 말해서 박해의 역사는 어디까지 올라갈까? 성경은 박해받는 사람이 본받아야 할 박해의 원조를 선지자라고 말씀한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5:12)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선지자들이 다 그런 박해를 받았다는 말이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7:52)

 

그러면 선지자들은 어떤 박해를 받았을까? 이것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아주 적나라하게 말씀해주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다니며 박해하리라”(23:34)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거나 회당에서 채찍질하거나 이리저리 따라다니며 박해했다는 것이다.

 

선지자들이 받은 박해는 끔찍하였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11:35-38)

 

고문, 조롱, 채찍질, 결박, 옥에 갇힘, 돌에 맞음, 톱으로 겨짐, 칼로 죽임, 짐승가죽 입고 유리하기, 궁핍, 환난, 학대. 말로만 들어도 끔찍하다. 이것이 박해의 종류이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이런 끔찍한 박해를 받는다면 그 자체로 상을 받을 만하지 않겠는가? 물론 초대교회 시대의 이 성도들이 선지자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선지자가 받았던 박해를 동일하게 받고 있다면 그들은 모두 선지자다.

 

그들은 왜 선지자들을 박해했을까몇 가지 이유를 찾아보았다. 정의와 공의를 행하기 때문이다.

내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였사오니 나를 박해하는 자들에게 나를 넘기지 마옵소서”(119:121)

박해하는 자들이 교만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주의 종을 보증하사 복을 얻게 하시고 교만한 자들이 나를 박해하지 못하게 하소서”(119:122)

예수님을 믿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집권자들 앞에 끌어가려니와”(21:12)

 

예수님이 박해를 받았으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박해를 받게 되어 있다.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15:20)

하나님께서 보내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며 또 박해하리라 하였느니라” (11:49)

 

성령을 따라 난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4:29)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박해가 온다.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22:4)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박해가 따라온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

 

그러니까 박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예수님을 삶을 살려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선지자가 박해를 받는 것이나 성도가 박해를 받는 것이나 동일한 이유에 의해서 받게 되는 것이므로 하늘에서 주어지는 상도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팔복선언에서 주님으로 말미암아 박해를 받는 자에게는 선지자가 받을 상과 똑같은 상을 주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받는 박해

이런 박해들은 이미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바와 동일하다.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15:20)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집권자들 앞에 끌어가려니와”(21:12)

 

지금도 세계 속에서 이런 박해가 자행되는 나라들이 있다. 우리나라만 해도 일제강점기에 그리스도인들이 받았던 박해들을 잘 알고 있다. 625 때 북한에서 받았던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 현재도 북한에서는 예수님을 믿으려면 지하교회에서 몰래 믿어야만 한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지역과 시대에 따라서는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가치였다. 그래서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을 때 그 믿음이라는 단어 안에는 목숨 또는 생명이라는 뜻과 동일한 의미가 들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국가들에서는 단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때문에 이런 종류의 박해를 받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박해도 받지 않는 것은 아니다. 시대에 따라 여러 가지 얼굴로 나타나지만 평화시대에는 평화시대에 걸맞는 박해가 따라오게 되어 있다. 다만 그런 박해들은 박해라는 모습이 아니라 손해, 불이익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지금은 과거의 이야기가 되었지만 과거 권위주의 시절에는 공기관의 부정과 부패가 일반화되어 있었다. 많은 국가 기관이나 단체의 공무원들 전체가 뇌물을 상납금 형태로 받아왔었다. 군대에서도 그랬고 경찰이나 민원기관들에서도 공공연하게 자행되어 왔었다. 그런데 만약에 그 시절에 신실한 기독교인이 그런 조직 가운데 들어갔다고 하자. 실제로도 그런 보도를 그 당시 신문에서 본 기억이 어렴풋이 살아난다.

 

하여간에 이 기독교인이 속한 부서가 100명이라고 하자. 그런데 그 부서에 매달 평균 1,000만원의 상납금이 있었고, 말단 직원에서부터 부서의 책임자에 이르기까지 상납금을 나누어 받았다고 하자. 그런데 이 사람이 기독교인의 양심상 이 상납금을 받지 않기로 했다고 하자. 다른 99명이 받는 상납금을 혼자 받지 않기로 하는 것인데 정말 웬만해서는 이런 사람이 나타나기 힘들 것이다.

 

아무튼 이 사람이 그렇게 결단했을 때 그가 선택할 수 있는 행동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냥 받아서 전액을 빈민 구제하는 데 사용한다. 일단 받기는 하되 받은 내역 전체를 상급기관에 보고한다. 받아서 부서의 책임자에게 이야기해서 돌려준다. 부서의 다른 많은 직원들을 생각해서 그냥 받도록 한다. 동료직원들이 뭐라고 하든지 무조건 거부한다. 이밖에도 여러 가지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자신이 참된 기독교인이라면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기독교인은 비둘기처럼 순결해야 하지만, 동시에 뱀처럼 지혜롭기도 해야 한다. 사실 위에 예시한 것들 중 그냥 함께 받는 것 외에는 어떤 것이라도 선택이 가능하다. 어떤 식으로든 거부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 무엇이 따라오겠는가? 말할 것도 없이 박해가 따라오게 되어 있다. 사람들은 옳은 것보다는 자기 안위를 먼저 생각한다. 자기들 동료 중에서 상납금을 받지 않겠다는 사람이 나타나는 순간 그 사람은 이방인 혹은 적이 되어 버린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이라면 당연히 거부해야 한다. 물론 기독교의 구원에 세상 윤리를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사실은 세상윤리보다 훨씬 엄격하고 깨끗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두려움이 없거나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깊은 고민에는 빠져야 한다. 그런 기독교적 윤리의식을 우리 기독교인들이 다 품고 있다면 훨씬 이겨내기 쉬웠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처럼 이토록 세상이 썩어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라가 부정과 부패와 위기에 처한 것은 전부 기독인들이 기독교인의 윤리를 가지고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625 전쟁이 터진 가장 큰 이유는 일제강점기 목사들의 산사참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동방의 예루살렘이라던 평양이 어떻게 그렇게 무너질 수가 있단 말인가? 한국 기독교의 부흥은 전부 북한 지역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기독교신앙의 그루터기였던 북한이 어떻게 공산주의자들의 군화에 짓밟힐 수 있단 말인가? 일본 왕과 그 나라에 대한 신사참배라는 가장 큰 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나라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모르기는 몰라도 큰 고난이 닥쳐올 수도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이 전부 물질과 명예와 출세의 우상숭배를 자행했기 때문이다. 축복! 축복! 또 축복! 하면서 끊임없이 기복신앙을 부르짖었기 때문이다. 또는 끝없이 치유, 회복만 이야기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복음을 잃어버리고 변질된 복음만을 부르짖고 있으니 나는 하나님이 몹시도 두려울 뿐이다. 단언하건대 나라를 구해달라고 아무리 부르짖어도 하나님은 듣지 않으신다. 참된 복음으로, 믿음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나라는 회복될 수가 없을 것이다.

 

지금 그리스도인이 받는 박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왜 그렇게 세상을 쫓아가기만 했는가? 박해가 두려워서이다. 내가 신앙양심을 따라 행함으로써 나에게 돌아올 손해, 불이익, 위협 같은 것들이 우리를 협박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흐름을 쫓아가면 박해는 없다. 하지만 거짓 평안의 다음에는 무서운 심판이 따라온다.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살전 5:3)

 

지금 한국의 교회에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은 과거에 받던 박해를 다시 받도록 개혁하는 것이다. 부정과 부패와 편법과 불법과 싸워야 하는 것이다. 어떤 정권이나 정부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 이 사회 전반에 걸쳐 있는 잘못된 의식들과 싸워야 하는 것이다. 먼저는 불법, 편법을 일체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교회 안이든 교회 밖이든 사탄이 지배하는 의식들을 과감하게 배격하는 것이다. 교회가 먼저 선포하고 시행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 그렇게 하면 교회는 세상의 칭찬도 받지만 박해를 먼저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먼저이다.

 

박해받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러면 한 가지 중요한 문제가 따라온다. 예수님의 제자답게 살아가다 보면 박해를 반드시 받게 되어 있는데 그런 박해를 만날 때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이다. 박해를 받을 때 성도가 선택할 수 있는 수단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가장 흔히 나타나는 반응은 박해를 피하는 것이다. 그리고 박해에 다수의 사람들을 동원하여 적극적으로 거부할 수 있다. 박해를 받을 때 법에 호소할 수도 있다. 그냥 묵묵히 참고 견디는 수도 있다.

 

하지만 성경은 박해를 받을 때 성도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을 자세하게 말씀해준다. 가장 주목해 볼 것은 박해를 받을 때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12:14)

사실 이런 행동은 예수님께서 먼저 본을 보이셨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23:34)

집사 스데반도 예수님을 따라 똑같은 말을 했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7:60)

 

물론 예수님이나 스데반의 말이 축복까지는 아닐지라도 그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벌을 면하게 해주시면 좋겠다는 기도에 해당할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박해를 받을 때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주자. 저들이 빨리 저들의 행동을 회개하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기도해주자. 하나님을 만나는 것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에 박해를 받을 때에는 저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두 번째로 박해를 받을 때 취해야 할 태도는 박해가 올 때 참고 견디는 것이다.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고전 4:12)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살후 1:4)

박해를 받을 때 어떻게 하면 참고 견딜 수 있을까?

 

참고 견디는 것도 여러 가지다. 마음속에 원한을 품고 언젠가는 이 원수를 갚고야 말겠다고 다짐하는 것도 참고 견디는 것이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사는 것도 견디고 참는 것이다. 하나님을 원망하며 술이나 다른 수단으로 시간을 보내면서 괴로움을 잊고자 하는 것도 참고 견디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박해를 기뻐하라고 가르치지 않으셨던가?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5:11-12)

 

그 다음 말씀에서 예수님은 박해를 받을 때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하는 이유를 말씀하신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5:12)

그리고 사도 바울도 박해받는 것을 오히려 기뻐하라고 말하는데, 바울은 하늘의 상과 함께 왜 기뻐할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10)

그 이유는 우리 성도들은 약할 때가 오히려 강할 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 성도가 박해를 받을 때가 가장 연약할 때이다. 박해뿐만 아니라 고난이나 역경이나 가난이나 억울함이나 아무튼 성도가 성도답게 살려고 애를 쓰다가 만날 수 있는 어려움이 닥칠 때가 가장 약할 때이다. 그런데 사실은 이 때가 가장 강할 때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때야말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때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을 그때, 대응할 수 있는 수단이나 방법이 하나도 없을 때, 그 때야말로 모든 인생보다 사랑과 능력이 크신 하나님께서 돌보아주시기 때문에 가장 강할 때라는 것이다.

 

그 때는 바로 팔복의 첫 번째 복인 심령이 가난한 복으로 충만한 때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아니면 죽음과도 같을 그때이기 때문에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게 되고 그것이 극에 달할 때 마침내 천국이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렇게 우리가 박해로 인하여 약해질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책임져주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 4:9)

 

이렇게 본다면 박해받는 것 자체로 인하여 하늘의 상이 주어진다고 할 때의 의미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분명히 성도가 박해를 받는 그 자체로 이미 하늘의 상은 보장되지만, 그 박해를 받기까지의 과정이나 박해를 대하는 자세까지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똑바로 믿으려고 하면 반드시 박해가 따라오게 되어 있지만 그 박해를 대하는 마음가짐을 보게 되면 그 박해가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분별이 되는 것이다.

 

박해나 고난을 만날 때 그 상대방을 위해 기도하고 축복하며 그런 박해를 인간적인 생각으로 저항하거나 편법을 써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묵묵히, 예수님께서 묵묵히 십자가를 기신 것처럼, 참고 견디면서 더 큰 유익이 있을 것을 기대하면서 오히려 기뻐한다면  하나님은 그런 박해를 받는 것 자체로 이미 하늘에 상을 준비해놓은 것이다. 박해를 일부러 받으려고 할 수는 없지만  세상을 거슬려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이 박해를 통하여 하늘에 보화를 쌓는 성도들이 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