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적인 표적이나 증거를 따라 살지 마세요.
표적 5 : 표적을 이용하지 말라.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요 6:14-15)
교회를 떠나지 마세요.
내가 아주 잘 아는 목사님이 계신다. 은사가 탁월하신 분이어서 영성훈련 지도자이며 많은 분들이 인정하는 사역자이다. 이분이 한 번은 화초를 구입하기 위해 비닐하우스로 만들어진 화원에 갔다. 화초를 구입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자신이 목회자임을 밝히게 되었고 주인도 교회 집사임을 밝혔다. 계산을 다 마치고 나서 인사를 하고 나가려고 하는데 화원 주인이 이야기를 걸었다.
“저기, 목사님, 잠시 차 한 잔 하고 가시면 안 되겠습니까?”
“아 그래요? 그럼 차 한 잔 합시다.”
이렇게 말하고 화원 안에 있는 허름한 의자에 앉았다. 이 목사님은 앉아서 잠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마음속에 음성이 들렸다.
“지금 다니는 교회를 떠나지 말라고 하여라.”
화원 주인이 목사님 맞은편에 앉았을 때 주인에게 이야기를 했다.
“저, 집사님, 하나님께서 지금 다니는 교회를 떠나지 말라고 하시는데요!”
“ … 네? 정말이요?? 사실은 처음 뵙지만 어디다 말할 데도 없고 해서 바로 그 문제를 상담 드리려고 한 건데요.”
사실 집사님 내외는 다니는 교회의 핵심 일꾼들이었다. 상세한 교회 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그 교회를 떠나는 것으로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고 하였다. 결국 이 집사 부부는 그 교회를 떠나지 않고 출석교회 목사님을 돕기로 결정하였다.
이 목사님은 받은 은사를 올바르게 사용하였다. 교회를 떠나게 하거나 자기 교회에 오게 하거나 헌금을 하게 만드는 것은 결코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다. 물론 때로는 교회를 떠나라는 응답을 주실 때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표적은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일을 왕성하게 하는 일에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은사는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은사를 어떻게 사용하는가 하는 것은 훨씬 더 중요한 문제이다. 성경에는 표적을 나타낼 수 있는 은사들이 참 많다. 그 중에서도 예언의 은사나 영분별의 은사 등은 참으로 잘 사용해야 한다. 예언의 은사를 이용하여 자기 유익을 위해 사용하거나 성도를 지배하려고 든다면 그 사람은 차라리 은사를 받지 않는 것이 낫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게 은사를 사용하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기도원 간판을 내걸고 사람들이 모이면 각종 예언을 해 준다. 대부분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오는데 그들에게 해라 말라, 떠나라 머무르라, 마치 자기가 하나님인 것처럼 지시하고 명령한다.
하지만 이런 예언에 빠지면 그 사람의 신앙에는 결코 성장이 없다. 신앙이란 자기와의 싸움이고 세상과의 싸움이고 사탄과의 싸움인데, 그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신앙의 힘이어야 하고 그렇게 이겨내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인데, 그때그때 은사를 가지고 표적을 드러내는 사람의 지시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인다면 어떻게 그 사람에게 영적인 근육과 힘이 생긴단 말인가!
정말 하나님의 예언은 성도를 성장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성도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예언의 은사이든 방언통변의 은사이든 영분별의 은사가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피하라는 것은 성령의 음성이 아닐 가능성이 아주 높다. 피하지 말고 싸우라는 것은 성령님의 음성일 가능성이 크다.
내가 평신도 시절에 강한 은사를 가진 분을 만난 적이 있다. 원래 알던 분이었는데 독일에서 사역을 하나다 잠시 한국에 왔을 때 만난 것이었다. 이분이 나를 위해 기도하는데 방언으로 기도하고 이 방언을 통변하며 이야기해 주었다.
“환상 중에 집사님의 모습이 보였는데 옥수수가 보였습니다. 그런데 알맹이는 다 파먹고 속껍데기만 남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당시 나의 영적 상태가 다 파먹고 말라 비틀어진 옥수수 속껍데기와 같다는 말씀이었다.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나름대로 큰 은혜를 받았다. 나의 영적 수준을 가감 없이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성령님께서 누군가를 통해 표적을 주신다면 반드시 도움이 되게 해 주신다. 그 자리에서이든 아니면 아주 나중이든 깨닫게 해주시고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되게 해 주신다. 그렇기 때문에 은사자는 말씀에 철저하게 근거한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은사자는 주신 표적이라고 해서 다 말해주면 안 된다. 그뿐 아니라 은사자는 자신과 관련되어 있는 내용이라면 더욱 신중하게 드러내야 한다. 그래서 은사자는 반드시 말씀으로 철저하게 훈련을 받았거나 온전히 말씀 속에 거해야 한다.
표적은 교회를 돕기 위해 주신다.
은사자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표적은 복음이 효과적으로 전파되게 하는 데 일차적인 목적이 있다. 결코 개인의 유익이나 어떤 다른 목적이나 은사자 자신을 위하여 주시지 않는다. 예언과 같은 성령의 은사를 사용할 때에는 그것이 복음전파의 목적에 합당한지를 먼저 분별해야 한다.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롬 15:19)
그리고 은사를 통하여 주시는 표적은 말씀을 증명하는 데 사용된다.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막 16:20)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행 14:3)
표적을 보고 “신령하네.” 하고 따른다면 그것은 무당과 무엇이 다른가! 표적은 말씀을 말씀되게 하고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한다. 사역자를 신격화하기 위해 주시는 것은 절대 아니다.
또한 은사는 교회에 유익이 되게 하기 위해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말씀을 선포하시고 교회를 통하여 일하신다. 아무리 교회가 약하고 교회다워 보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일하신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모든 은사와 표적은 교회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 어떤 은사라도 교회의 질서 안에서 행해져야 한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고전 14:4)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고전 14:12)
교회에 덕을 세우지 못하는 예언이나 표적의 사용은 상당한 위험성을 안고 있다. 이미 앞 절에서 나온 바와 같이 예언과 같은 표적을 잘못 사용하면 복이 아니라 저주가 올 수 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왜 주님은 이렇게 은사를 사용하여 표적을 일으킨 사람들에게 경고하시는 것일까?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했다면 능력 있는 사역자가 아닌가? 아마도 수많은 사람들이 집회 때마다 몰려와서 기도 받고 권능을 체험하고 예언을 받았을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러한 표적들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병 고침 받고 아멘, 할렐루야 외쳤을 것이 아닌가! 그런데 왜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신 것인가?
심판은 교회로부터 시작된다고 흔히들 말한다. 맞다. 심판은 이스라엘부터 시작되고 그 중에서도 지도자들로부터 먼저 시작된다. 그렇다면 은사를 받은 특별한(?) 사람들로부터 심판이 시작되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이치이다. 성령께서 은사를 주심으로써 표적을 행할 수 있게 되었다면 거기에 합당한 목적에 사용되어야 한다.
합당한 목적이란 무엇인가?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행 20:28)
그 어떤 은사라도 주님의 양떼를 위하고 교회를 세우기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그 어떤 능력자라도 교회를 세우는 데 쓰임 받지 못한다면 결국 무엇을 위해 부르셨을까? 그러므로 은사를 합당하게 사용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심판이 따라오게 되어 있다. 이런 전율이 흐르는 사실을 모르고 무작정 은사를 휘두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은사나 표적이 성도를 지배해서는 안 된다. 은사나 표적이 교회를 지배하게 해서도 안 된다. 은사나 표적은 교회를 세우고 성도를 변화시키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 은사나 표적은 하나님의 은혜의 극히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 13:9-10)
그렇다면 지금 은사자는 개인기도원을 운영하면 안 된다. 은사를 이용하여 사람들을 모으지만, 그리고 때로는 피상담자에게 일시적인 유익을 주는 것 같지만, 수많은 경우에 오히려 교회를 허무는 역할을 하고 있다. 마치 당의정(알약)을 입에 넣고 단물만 빨아먹고 나서 정작 약은 뱉어버리게 만드는 것과 똑같다. 그 표적을 이용하여 자기사람으로 만들고 있다. 담임목사보다 더 높은 권위를 사용하여 성도를 허물고 있다.
물론 개인기도원 사역자도 교회를 세우기 위해 애쓰는 분들도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수많은 은사자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점은 거의 대동소이하다. 교회의 테두리 안에서, 허락받은 범위 내에서 교회를 위해 사용하지 않는 은사는 해악이 될 뿐이다. 물론 담임목회자가 영적인 은사를 알고 이해하는 일도 선행되기는 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고 할지라도 은사를 제멋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어찌하든지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해 받은 은사를 사용하자.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전 14:26)
표적이 곧 세상에서의 성공은 아니다.
중요한 이야기가 또 있다. 대부분의 은사자들은 피상담자의 성공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 나은 어떤 것을 위해, 더 큰 복을 위해 은사를 사용하고 있다. 물론 은사나 표적은 성도를 세우고 교회에 덕을 끼치기 위해 주신 것이다. 하지만 성도를 세우거나 교회에 덕을 끼친다는 그 개념을 우리는 잘 알아야 한다. 성도를 세운다는 말이 그의 문제가 풀리고 더 큰 성공을 가져온다는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유명한 분이 이런 말을 했다.
“하나님의 뜻인지를 분별하는 방법 중의 하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을 가지고 어떤 일을 시도할 때 잘 풀리고 사람들도 모이고 성취되어 가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보면 된다.”
하지만 이 말은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일 때 통하는 이야기이다. 하나님의 응답은 반드시 성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신실하게 믿는 사람에게는 어쩌면 어려움은 지속될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성공이라고 할 수 있는 경우가 있더라도 많은 연단을 거친 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고 할 때 이 땅의 성공보다는 하늘의 상급으로 주어지는 경우가 훨씬 많다. 초대교회 일곱 집사 중의 하나인 스데반 집사는 놀라운 은사를 가지고 표적을 강하게 드러내는 사람이었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행 6:8)
하지만 그 권능의 스데반이 성령충만하여 무리들 앞에서 설교를 마쳤을 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순교였다.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 7:59-60)
어떤 사람들은 스데반이 설교 한 번 잘못하여 순교했고, 베드로는 설교 한 번 잘 하여 삼천 명이나 회개했다고 말한다. 순전히 세속적인 수준에서 말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삼천 명이 모이면 성공한 것이니 하나님의 뜻이고 순교하면 실패한 것이니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인가? 그렇다면 세속적인 기준으로 볼 때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크게 실패한 것인가?
표적이 있는 곳에 사람들이 몰려가는 이유는 성공이라는 목적 때문이다. 물론 이 성공이라는 것이 꼭 물질적, 외형적 복을 뜻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여드는 사람들은 대부분 예수 그리스도라는 본질보다는 외형적인 현상을 보기 위해 모여드는 것만은 틀림없을 것이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
모든 은사나 표적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실체적 만남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성도를 세우거나 교회에 덕을 끼치는 것도 결국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최종 목표이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에는 기쁨과 소망과 평강과 감격이 수반될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삶에 적용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인내와 연단이 필요하다. 물론 믿음의 사람들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이겨내게 되어 있다.
은사자는 은사나 표적을 사용할 때 피상담자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은사자는 자신을 드러낸다. 은사자들은 대개 어떤 식으로 상담을 할까? 막힌 것이 뚫리고 장벽이 사라지고 병든 것이 고쳐지고 사업이 확장되도록 기도해준다. 자녀에게 좋은 배우자가 나타나고 좋은 학교에 입학하고 큰 회사에 취직이 되도록 기도해준다.
이것이 나쁜 것이 아니다. 이런 기도는 누구라도 할 수 있고 합심하여 간구할 수 있고 또 이런 기도를 반드시 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지 않은가? 하지만 은사자는 그 이상을 구해야 한다. 가장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한다. 그 사람의 신앙생활에서 막힌 원인을 찾아야 한다. 무조건 풀리도록 기도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 어떤 성도라도 하나님 앞에 설 때에 가장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 회개이다. 이 회개의 문을 열어주는 것이 은사자의 할 일이다.
무엇을 맞추는 것은 무당도 할 수 있다. 어떤 은사자는 그 날 누군가 온다는 것을 새벽에 안다고 한다. 무당들도 그 정도 하는 사람은 많다. TV 다큐멘터리에서 외국인 여성이 내림굿 받는 장면을 방영한 적이 있다. 모든 과정을 마치고 일종의 시험이 행해진다. 그날 모인 사람들이 모여 앉아있고 그 중에 한 사람이 어떤 물건을 감춘다. 그러면 그날 내림굿 받은 사람이 누가 가지고 있는지를 맞추어야 한다. 정상적으로 내림굿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이것을 맞춘다고 한다.
무엇을 맞추는 것이 중요한가? 예언이란 현재의 무엇이나 미래의 어떤 일을 맞추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가지고 있는 것이 예언이다.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이것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성도나 교회가 세워질 수 있도록 전달하는 것이 예언이다. 그렇지 않고 앞날을 맞추는 것이 예언이라면 무당과 무엇이 다른가?
마귀의 표적도 있다.
우리가 은사나 표적을 목적에 맞게 사용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마귀도 그런 표적을 행한다는 것이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 24:24)
기도를 깊이 해 본 사람이면 알겠지만, 받은 음성이 전부 성령님의 음성은 아니다. 엉뚱하거나 전혀 생각 밖의 음성도 결국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첫째는 자기 생각, 자기 욕심이 들어가 있는 경우이고 둘째는 악한 영이 속이기 위해 혼란을 주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사탄은 예수님께도 나타나 속이려 들었다.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막 1:13)
마귀는 어떤 때에라도 천사로 가장하여 나타날 수 있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4-15)
요한계시록에 보면 사탄은 심지어 예수님의 부활까지 비슷하게 흉내 낸다.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놀랍게 여겨 짐승을 따르고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이르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누가 능히 이와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계 13:3-4)
어느 누가 작두 타는 무당과 겨루어 이기겠다고 하겠는가? 마귀가 보여주는 이적은 은사자들이 일으키는 표적들보다 강한 경우가 많다. 그냥 겉으로 드러나는 은사나 표적들을 그대로 따르다가는 그들과 같은 길에 빠질 수 있다. 은사 자체보다 은사나 표적이 목적하는 바를 깨달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오래 전에 내가 알던 여집사님은 어릴 때부터 귀신을 보면서 생활하고 있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인이 항상 이 집사님을 따라다녔다. 버스를 타면 귀신도 같이 버스를 타고, 시장에 가도 귀신이 조금 떨어진 채 따라다녔다. 물론 눈으로 보거나 만질 수 있는 귀신은 아니고 집사님의 눈에만 보이는 귀신이었다. 교회를 다니는데도 이 귀신은 떠나지 않았다. 집사님은 이것을 그냥 일상생활로 받아들이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집사님처럼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성도의 삶의 주변에는 악한 영들이 존재한다. 우리가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할 뿐이다. 그렇다면 이 악한 영들은 성도들이 연약해진 틈을 타 신비하게 보이는 표적을 보여줄 수 있다. 여기에 넘어가면 이단에 빠지거나 잘못된 신앙으로 들어가 버리게 되는 것이다.
은사나 표적은 중요하고, 우리는 은사를 사모해야 한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31)
은사나 표적에 대하여 무조건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영적으로 무지하다는 이야기이다. 사역을 하려면 은사자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은사나 표적에 관하여 바른 개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받은 은사를 다른 목적에 이용하려 한다면 차라리 은사에 무지한 편이 낫다.
은사가 없이도 말씀에 순종하면 하늘에서 큰 상이 기다린다. 하지만 아무리 강한 은사를 가지고 있어도 순종이 따르지 않으면 오히려 심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은사나 표적은 더 바르게 믿도록 이끄는 안내자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자기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은사나 표적을 일으키는데 사실은 자기 자신은 하나님과 아무 관계없는 자기의 일을 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은사자는 정말 조심해야 한다. 은사를 주신 목적을 잘 이해하고 날마다 자기를 쳐서 복종시켜야 한다. 은사자 자신이 드러나지 않도록 겸손, 또 겸손해야 한다. 자기를 낮추고 자아를 버리고 욕심을 깨뜨리고 영광을 버려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은사와 표적을 주신 은혜를 갚을 길이 열린다.
동시에 은사나 표적을 받아들이는 성도들도 분별력을 길러야 한다. 우선 은사나 표적을 따라다니지 말아야 한다. 만약에 정말 표적이 필요하다면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일일 때에만 구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신앙성숙에 유익하다고 생각될 때에만 구해야 한다. 은사나 표적을 구하는 성도들이 많으니까 은사자들이 잘못된 길로 빠질 수 있는 것이다.
은사나 표적을 무시하지 말자. 하지만 그것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을 결코 잊지는 말자. 성도를 세우고 교회에 덕을 끼치도록 하자. 복음전파와 말씀사역의 증인으로서의 역할을 하도록 애쓰자. 표적을 일으키고 무엇을 요구하거나 요청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어찌하든지 교회 테두리 안에서 순기능을 할 수 있도록 힘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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