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하늘의 상을 바라보고 헌신하세요.
하늘의 상 2 : 이웃 돌봄의 상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눅 14:13-14) 전도의 상 하늘에서 상을 주신다면 어떤 일에 가장 큰 상을 주실까? 흔히들 하늘에서는 전도의 상이 가장 크다고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전도는 성도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행해야 하는 귀중한 사역이기 때문이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하지만 사도 바울의 말씀에 의하면 그렇다고 전도에 따로 상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고전 9:16-17)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상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전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상을 주시는 것은 아니다.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9-10) 그래도 충성한 종에게는 더 많은 것을 맡기고 주인과 함께 할 수 있는 상을 주신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마 25:21) 아무튼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큰 사명은 죄인을 구원시키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 예수님께서도 바로 그것 때문이 오셨기 때문이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막 1:38) 물론 그리스도인이 전도를 하지 않았다고 화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마땅히 받을 상이 줄어들게 될 수는 있을지도 모르겠다. 때로는 전도의 열매를 맺어놓고도 말씀대로 살지 못하여 역효과를 일으키기도 한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 23:15) 나는 지금 전도의 부정적인 측면을 이야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전도는 어떤 경우에도 귀중한 일이며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을 구원하는 데 쓰임 받는 사람은 하늘에서 상이 클 뿐 아니라 밤하늘의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고 하셨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 12:3) 다만 전도에 상이 가장 크다고 하여 전도제일주의에 빠져 삶이 없이 오로지 사람을 교회에 데려다 놓는 것만으로는 전도의 상을 논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교회 개척 초기에 열심히 전도하러 다녔는데 교회 주변에 있는 주민이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왜 교회를 안 나가냐 하면요, 어떤 집사 때문입니다. 교회 집사라는 사람이 교회에 무슨 행사가 있다 하면서 나한테 매일같이 과일이나 음료수 들고 찾아와서 행사일에 교회에 꼭 나와 달라고 하는 거예요. 하도 열심히 하길래 정말 나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날 누가 찾아와서 도저히 교회에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에요. 나한테 그렇게 열심히 친절하게 대했던 그 집사가 내가 행사 날에 못 간 이후로는 길거리에서 봐도 인사도 안 하는 거예요. 나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실적을 위해서 그러는 거예요. 그렇다고 해도 그 후로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네요.” 전도의 상은 누구를 많이 데려왔다고 해서 전부 자기의 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정말 참다운 전도는 예수님의 전도이다. 순종이 많은 사람을 구원하는 수단이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 그리고 다른 사람의 종이 된 사람이 구원의 열매를 맺는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19) 이런 섬김과 사랑의 삶을 통하여 전도하지 않으면 그것은 온전한 열매로 열리기 힘들 것이다. 그리고 전도는 수많은 사람들의 합작품이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눅 16:29) 그리고 전도의 열매는 심는 자와 거두는 자가 다를 수 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고전 3:6) 또한 전도의 열매를 거두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7) 이렇게 전도는 여러 전도자들의 오랜 노력으로 이루어지지만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전도자에게 상을 주신다. 다만 전도의 상은 여러 사람이 나누어가진다.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전 3:8) 우리가 누구를 전도하여 교회에 출석하게 했다고 할 때 그 상은 온전히 그 사람만의 상이 될 수 없다. 여러 사람들의 오랜 동안의 수고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열매로 맺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러 전도자의 협력으로 열매가 맺히는 것이므로 상을 주시지만 나누어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전도의 상이 크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전도라고 할 때 그 의미를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보통 교회에서 전도라고 하면 교회 예배에 초청하는 의미가 더 크다. 사람들을 교회에 초청은 잘 하지만 세상 속에서 살면서 그리스도인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그 전도의 상도 헛것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전도의 상보다는 삶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이 더 클 수도 있는 것이다. 가장 큰 상 그러면 어떤 일을 하면 하늘에서 큰 상을 받을 수 있을까? 우리 신앙생활에서는 여러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다. 예배, 말씀, 기도, 찬송, 교제, 봉사 등이다. 더 여러 가지로 분류하거나 첨부할 수 있겠지만 이런 것들이 교회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들이다. 어느 것 하나라도 빠지면 신앙이 기우뚱하게 된다. 신앙생활의 이 기본적인 사항은 모든 성도들이 최소한의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 이런 기본적인 수행요건들을 충족시키면서 자신에게 있는 달란트를 개발하면 아무 이상이 없다. 예를 들면 기본적인 활동은 갖춘 상태에서 기도에 집중하거나 말씀을 깊이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요소가 결여되어 있다면 그 신앙은 비뚤어지거나 잘못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배를 철저하게 드리거나 기도를 열심히 하거나 말씀을 깊이 배우는 것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실까? 쉽게 말해서 말씀을 깊이 안다고 해서 하늘의 상이 주어질 수 있을까? 기도할 때 삼층천까지 올라갈 수 있는 사람, 예언을 모두 맞히는 사람이라고 해서 큰 상을 받을 수 있을까? 찬송을 기가 막히게 잘 해서 듣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은혜를 받게 한다고 해서 상이 주어질까? 결론을 말하자면 성경에는 그런 상은 없다.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행하는 기본적인 사항들은 성도가 상을 받도록 이끄는 수단일 수는 있어도 찬송을 잘 하거나 성경을 전부 외우거나 성도들과의 교제를 잘 나누는 그 자체가 상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예배나 기도나 말씀을 소홀히 해도 된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예배를 철저하게 드리고 말씀공부를 열심히 하고 올바른 기도를 많이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 의미를 잘 깨닫고 그 목적하는 바를 정확히 알고 신앙 생활해야 한다는 뜻이다. 심지어 금식을 많이 해도 전혀 상과는 무관할 수 있는 것이다.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 6:16) 구제를 많이 해도 상과는 전혀 무관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 6:2) 그러면 어떤 신앙행위에 가장 큰 상이 주어질까? 신약성경에서 큰 상을 주실 것이라는 구절은 세 군데 나온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눅 6: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히 10:35) 그 중에서 가장 알뜰한(?) 상은 이웃사랑의 상이다. 왜냐하면 이웃사랑은 그 사랑을 진실한 마음으로 베풀 때마다 전부 다 기억하시기 때문이다. 심지어 물 한 그릇이라도 반드시 상을 주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 10:42)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어떤 사람을 가장 좋아하실까? 자기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예수님은 가장 좋아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목숨까지라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다음으로는 이웃 사랑을 가장 기뻐하신다. 이웃 사랑의 정의 그러면 어떤 것이 이웃사랑인가?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어떤 사마리아 사람에게서 이웃사랑의 모습을 제시하신다.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는 낯선 사람, 사업차 출장길에 처음 만난 사람, 하지만 그 사람은 강도당하고 매를 맞아서 거의 죽게 된 지경에 처해 있던 사람이었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죽을지도 모르는 그런 사람이었다. 한 제사장은 그것을 보고 부정하다고 그냥 지나갔고 어떤 레위인은 바쁘다고 그냥 지나갔지만, 어떤 사마리안 사람은 지나치지 못하고 상처를 싸매주고 주막에 데려다 주고 비용이 모자라면 돌아오는 길에 주겠다고까지 하면서 사랑을 베풀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눅 10:36) 물 한 그릇 대접하는 사람에게도 상을 잃지 않으리라고 하신 주님께서 이렇게 환자를 돌보고 주막에 데려다 주고 비용까지 대 준 사람에게 어떤 상을 주시겠는가?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전도하러 전국으로 다닐 때 어떤 작은 시골 마을을 다니다가 쓰러진 한 여자를 보았다. 대낮이지만 술에 취해서 밭가에 혼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면서 이 사마리아 사람이 생각났다.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마을 사람 중 한 사람도 지나다니지 않았다. 물론 술에 취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바로 서울로 올라가야 해서 그냥 지나쳤었다. 어떤 이유에서이건 나 자신에게 참 부끄러운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에 그런 일을 만난다면 깨워서 일단 대화라도 나누고 보내든지 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나는 상 받을 기회를 놓쳤던 것이다. 반면에 나의 작은 도움으로 하나님의 크신 섭리를 체험한 이야기도 있다. 우리 동네에 작은 교회 목사님이 계시는데 오래 동안 반지하 셋방에서 자녀들 셋과 생활해오셨다. 여름이면 물이 넘치고 쥐가 많아 몇 번인가 집안에 들어온 쥐를 쫓느라고 난리를 친 적이 있었다. 반지하라서 건강에도 아주 안 좋은데 10년이 넘는 동안 정말 힘겹게 생활해 왔었는데 그런데 건물 주인이 재건축을 한다 하여 그나마도 쫓겨날 신세가 되고 말았다. 평소에도 보증금 300만 원에 월세 몇 십만 원의 어려운 생활을 보면서 너무나도 안타까운 마음이 간절했지만 정작 쫓겨난다고 했을 때 보증금은 오래 전에 다 까먹은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나는 내가 쫓겨나서 가족들이 당장 잠 잘 데조차 없는 그런 상황을 맞이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큰 도움은 못되어도 기왕에 있던 보증금 300만 원이라도 해 주고 싶어졌다. 그래서 모아 놓은 돈은 없지만 카드로 소액대출해서 입급해 드렸다. 그런데 이것을 보고 그 교회 집사님 한 분이 도전을 받은 것 같았다. 이 기회에 교회 사택을 준비해서 목사님이 집 걱정 하지 않고 목회하실 수 있도록 하겠다고 결단하였다. 그리하여 300만 원의 100배 정도 되는 3억 원쯤 되는 빌라를 마련하기에 이르렀다. 이 집사님도 재력이 조금 있기는 해도 선뜻 목돈을 준비할 여건은 되지 않아 대출을 많이 안고 넓지는 않지만 깨끗한 주택을 준비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내가 마음 쓴 것은 300만 원밖에 되지 않지만 그것으로 말미암아 또 다른 이웃사랑을 실천하게 된 집사님으로 인하여 이제 남은 목회 기간 동안 쾌적한 환경에서 목회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이웃사랑은 먼저 이웃의 형편을 자기 상황으로 느끼는 데에서부터 출발한다. 성경에서는 이웃사랑의 대상을 제시한다. 우선적으로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7) 갇힌 자를 돌보고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는 것이 이웃사랑이다. “너희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히 13:3)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도 아주 중요한 일이다.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 하였으나”(슥 7:10)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시 146:9)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대접해야 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마 19:21) 이웃사랑은 필요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다.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행 4:34-35) 이웃사랑의 상이 큰 이유는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이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롬 13:9) 그래서 이웃사랑은 율법의 완성인 것이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10) 성도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소홀하면서 이웃을 섬긴다고 열심인 것도 안 되지만, 하나님을 열심히 섬긴다고 하면서 삶 속에서 사람들을 돌보지 않는 것도 안 된다. 기도나 말씀이나 찬양 등 하나님과의 교제가 중요한 만큼 사람들의 필요를 느끼고 그것을 채우려는 노력도 중요하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만큼 사람들을 돌볼 때 하늘에서는 행한 대로 상이 주어지는 것이다. 상을 빼앗기지 말자. 그런데 성경에 의하면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죄이다. 야고보 사도는 이웃사랑과 반대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만으로도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하였다.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약 2:8-9)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 당연히 감당해야 할 일을 감당하지 않으면 심판이 뒤따른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 2:13) 이웃과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 사랑의 통로가 되는 일이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요일 3:17) 재미있는 구절이 눈에 띈다. 충성하는 사람에게 상을 주시는 것은 틀림이 없지만 반면에 벌점 같은 것도 있다는 말씀이다. 성경은 이것을 불시험이라고 표현한다.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고전 3:13) 그 불시험에서 승리하면 자기가 쌓은 공적을 그대로 인정받게 된다.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고전 3:14) 그리고 아무리 큰 공적을 쌓았어도 불시험에 타버리면 겨우 구원만 받게 된다고 말씀한다.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전 3:15) 저 하늘에서 영원토록 받을 상급을 놓고 재미있다는 표현이 지나칠 수도 있지만, 우리는 하늘의 상급의 원리나 이 땅에서의 상급의 원리가 동일하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다만 이 땅에서의 상은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고 사람 가운데에서 받는 것이지만 저 하늘에서의 상은 눈에 보이지 않고 만질 수도 없으며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 근본적인 차이점일 것이다.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서 우리가 추청해 볼 수 있는 것은 받을 상을 까먹는 행위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달란트 비유에서 두 달란트 받은 사람과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각각 두 배를 받지만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있던 달란트마저도 빼앗겨 버린다. 물론 달란트는 일하도록 주신 조건이지 상은 아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상을 받을 수 있는 수단이라는 점에서는 원리적으로 동일하다. 우리는 이 땅에서의 삶을 통하여 저 하늘의 상을 쌓을 수 있다. 성도들은 이 상을 교회 안에서 열심히 충성 봉사한 결과로 착각하기 쉽다. 교회에서 그렇게 가르치는 측면도 상당히 강하다. 그리하여 교회 안에서는 만점인데 세상에 나가서는 빵점일 수도 있다. 내가 성도로서 신앙 생활하던 교회에 수석 안수집사님이 계셨다. 교회 안에서 열심히 충성하고 목사님을 위해 헌신하는 분이었다. 하지만 이분은 삶 속에서는 전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뒤에서는 “저런 사람이 교인이냐?” 하는 소리를 많이 했다고 한다. 이래서는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사람이 될 수가 없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사람이 될 뿐이다. 그러므로 삼가 얻은 것을 잃지 말고 온전한 상을 받으라고 하신 것이다. “너희는 스스로 삼가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요이 1:8) 우리는 이 땅에서 받을 복을 생각하지 말고 저 하늘에서 받을 상을 생각해야 한다. 기준을 하늘에 두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가 더 또렷해진다. 기준을 땅에 두고 살면 더욱 땅바닥에 가까워질 뿐이다. 그러므로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길을 위해 기도하고 행함으로 옮기는 노력을 게을리 해선 안 되겠다. 더욱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예수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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