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적인 표적이나 증거를 따라 살지 마세요.
표적 4 : 표적을 분별하라.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 10:17-20)
피하지 말고 이겨야 한다.
목회자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가슴 아픈 경우는 성도가 교회를 떠날 때이다. 그것도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성도가 어떤 이유에서든 떠날 때의 아픔은 목회자만이 알 수 있는 고통이다. 내가 목회한 지 9년 정도 되었을 때 가장 사랑하던 집사 내외가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에 가게 되었다. 당시 집사 부부는 떡집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몇몇 성도들과 함께 가서 개업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열심히 사업을 해서 자리가 잘 잡혀가고 있었다.
그런데 아내 되는 집사가 공황장애의 아픔을 겪게 되었는데 가슴이 답답하여 견딜 수 없고 숨을 쉬기조차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내가 몇 번 가서 예배드리고 기도했지만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당시 아내 되는 집사의 언니가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 와서 목사님께 기도 받으라고 해서 아마 몇 번 갔었고 그 여자목사님이 은사가 강한 분이라 기도해 주면 좀 나아서 돌아오곤 했었다.
그런데 아내 되는 집사가 치료를 받으러 언니가 다니는 교회에 가면 어떻겠느냐고 해서 나는 몇 주 기도 받고 치유가 되면 다시 돌아온다는 뜻으로 알고 허락하였다. 그런데 아내 집사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는지 우리 교회를 완전히 떠나게 되었다. 떠나는 과정도 너무 가슴 아파 견디기 힘들었지만, 더 가슴 아픈 아픈 일은 따로 있었다.
다른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고, 집사님 내외가 운영하던 떡집의 2층은 무당집이었다. 거리에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무당 깃발이 2층에 걸려있었다. 그곳이 시장통이었는데 그런 점집이 여러 군데 눈에 띄었다. 떡집 장소를 알아보려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이미 떡집을 하고 있던 그 자리에 들어간 것이었다. 나도 개업 예배를 드리러 갔다가 이 사실을 알았었다.
그런데 문제는 집사 부부가 옮겨간 교회의 목사의 태도였다. 그 교회 목사가 기도하다가 혼란스러움을 알았고 집사님에게 물어보니 떡집 2층이 무당집이었던 것이다. 이 때 그 목사는 아내 집사에게 이렇게 지시(?)하였다.
“집사님, 빨리 그 떡집 그만 두고 나오세요. 거기 그대로 있다가는 큰일 납니다.”
과연 이런 말은 맞는 말인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왜 자기 교회로 가야 한다는 말인가?
기도하다가 깨닫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떠나라고 가르치는 것은 무당들이나 하는 짓이고 결코 성경적이 아니다. 그런데도 은사가 강한 이 목사는 그런 식으로 성도들에게 이야기하고 자기 말을 듣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기 교회로 옮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응답 받았다고 해서 그 교회로 가게 된 것이었다.
무당이나 악한 영이 훼방하는 상황을 깨닫는 것은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실 때 여러 가지 증거나 표적을 자주 주시기 때문에 그 일 자체가 나쁜 일은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떠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싸우라고 하신다. 피하는 것이 아니라 이기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주신 은사를 잘 사용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에 보면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바울이 로마로 가기 위한 마지막 여정으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기로 정하였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두로에 상륙하여 이레 동안 머무르게 되었다. 그런데 바울의 제자들이 바울더러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권면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행 21:4)
중요한 것은 ‘성령의 감동’이라는 말이다. 귀신의 말이나 악령의 음성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이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아니, 성령의 감동이면, 그 다음 장면에서도 나오지만, 바울이 위험해진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런데 왜 성령님이 위험한 것을 알려주시는 것일까? 정말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시는 것일까?
그런데 바울을 향한 성령님의 역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바울은 두로를 떠나 돌레마이를 거쳐 이스라엘의 가이사랴에 도착하게 된다. 그리고 전도자 빌립의 집에서 여러 날 머무르게 된다. 그런데 그 집에 유대로부터 내려온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찾아왔다.
그리고는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손발을 묶고 이렇게 예언한다.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행 21:11)
이번에는 바울의 제자들의 예언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다. 아예 바울이 유대인들에 의해 결박당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 있는 다른 사역자들도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일제히 권면하게 된다.
자, 이쯤 되면 바울은 어떻게 결정해야 할까?
“성령님께서 막으시는 것으로 보아서 내가 예루살렘에 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닐 거야.”
이렇게 생각하고 예루살렘에 가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신앙적이 아닐까? 하지만 사도 바울의 대답은 그것이 아니었다.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느니라”(행 21:13)
그리스도인은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를 확실하게 정해야 한다. 성령님께서 어떤 표적을 주실 때에는 분명하게 뜻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우선적인 순위이다. 그것은 바울의 일생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계획이고 바울은 이 계획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바울의 앞길을 예언하게 하시는 것은 피하라는 음성이 아니었다.
성경에는 피하라고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물론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나 노아의 홍수 이야기 때에는 피하라고 하셨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일에 있어서는 성령의 음성은 피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기라는 것이다. 그것을 피하거나 도망가라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엄청난 오해가 아닐 수 없다.
2층이 무당집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계약을 하여 사업을 시작한 것은 무엇이라고 판단할 수 없는 일이다. 기왕이면 영적으로 깨끗한 장소를 얻어서 사업을 하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운영하던 사업을 접고 빨리 피하기 위하여 폐업하라고 한다는 것은 정말 잘못된 가르침이다. 피하라고 가르치고, 어디로 가야 한다고 가르치는 목사가 있다면 그 사람은 무당과 비슷한 목사이다. 성도들은 그런 사람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표적을 주시는 이유
나는 처음에 교회를 개척하고 나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표적으로 인하여 많은 갈등을 겪었다. 처음 교회를 시작하고 전도를 정말 열심히 했는데, 내가 알고 있는 전도방법은 다 사용해보았다. 기본적으로 16쪽 정도의 소책자를 5-6가지 개발하여 끊임없이 주민들마다 주택마다 배포하였다. 직장인들 출퇴근 시간에 전철역에 나가 꾸준히 나누어주었으며, 아파트마다 가능한 곳에는 다 돌렸다. 문화센터를 만들어 영어회화, 컴퓨터 등 강좌를 만들어 교회를 개방하였다.
동네 아파트 입주 때에는 몇 달씩 매일 팥죽이나 호박죽을 쑤어 이사 오는 주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동네에 주차되어 있는 차량들을 세차하는 서비스를 시작했는데 리어카에 큰 물통을 싣고 걸레를 수십 장씩 가져다가 자동차 유리창을 닦았다. 처음에는 전체세차를 했지만 그것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유리창세차로 바꾼 것이었다. 또 선교단체와 연결이 되어 주일 저녁예배 때마다 각각 가른 팀들이 와서 열린 예배를 드렸다.
전도하는 목사님과 연결이 되어 함께 동네 건물 전체를 돌아다녔는데 사무실이든 가게든 관공서이든 전체를 샅샅이 뒤지면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어 복음을 전했다. 교회에 주거공간이 조금 되어 있어 청년 2명을 거주하게 하면서 주일학교 전도를 감당하게 하였다. 어린이도서관을 세우겠다며 주님 1,000여명으로부터 주민동의서를 받기도 하였다.
그렇게 2년 정도 모든 정열을 전도에 쏟아 40여명의 성도들이 모이게 되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1년이 넘도록 별 열매가 없어서 상당히 고민하면서 전도를 했는데, 개척 6개월 정도 되었을 때부터 토요일 저녁이나 주일 아침에 내 마음 속에 말씀을 주시는 것이었다. “내일 몇 사람 올 것이다.” 또는 “오늘 한 가정 올 것이다.” 하는 식으로 마음에 음성이 들렸다.
처음에 그런 음성이 들렸을 때에는 이게 뭔가 하는 생각으로 잊어버렸는데 정말로 예배 시간이 되니까 한두 사람이 개인이나 가족별로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었다. 한 번은 분명히 누가 온다는 음성을 들었는데 아무도 오지 않은 일이 있었다. 그 때 주일학교 전도사가 교회 현관 앞에서 영접을 하고 있었는데 어떤 부부가 교회에 찾아왔다가 교회 안내판을 보고 그냥 가버렸다는 것이었다. 당시 교회안내판에 10시30분 예배라고 되어 있었는데 그것을 보고 시간이 늦었다고 가버렸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6-7개월 동안 거의 매주 새로운 성도들이 찾아왔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예배에 처음 참석한 사람들이 예배가 끝나자말자 바로 가버리는 것이었다. 거의 매주 사람들이 왔지만 대화를 나누어본 사람들은 한두 가족밖에 없었다. 예배를 잘 드리고도 마치 벌에 쏘인 듯이 가버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참으로 힘이 많이 빠졌다. “왜 기껏 힘들게 작은 교회 왔으면서 말도 없이 가버리는 것일까?”
나는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내가 나이가 많아서 그런가? 아니면 머리숱이 없어서 그런가? 설교가 엉망이라서 그런가?”
하지만 그렇게 갈등이 심해도 하나님의 음성은 계속되었다. 음성이 들리는 주에는 틀림없이 사람들이 오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예배 후에는 쌩 하고 가버리는 것이었다.
“하나님, 차라리 음성을 안 들려주시면 기대라도 하지 않을 텐데 왜 음성을 들려주십니까?”
나중에 시간이 흐르고 나서 생각하니까 나라도 그렇게 도망치듯이 나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책자 내용이나 전도하는 것을 보면 비전도 있고 함께 해볼 만한 교회인데 직접 와서 보니까 겨우 대여섯 명 앉아 있으니까 실망하고 말도 없이 그냥 가버리는 것이었다. 아무리 비전이 좋아도 그토록 적은 숫자가 앉아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테니까. 나는 나중에서야 사람들이 왔다가 급히 나가버리는 것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아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그것을 다 아시면서 누가 올 것이라는 음성을 주셨느냐는 점이다. 차라리 그런 음성을 안 들었다면 기대도 하지 않고 거기에 따른 갈등도 없었을 텐데 왜 원하지도 않는 음성을 주셔서 기대하게 만들고 실망하게 만드셨는가 말이다.
여기에 대한 대답을 나는 3-4년 후에 들을 수 있었다.
“내가 너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네가 알기를 원했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나님이 주시는 음성, 표적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생각해 보니까 그렇게 표적을 주시니까, 비록 예배 후에는 실망하기는 하지만 새로운 성도가 온다는 그 사실 때문에 설교도 더 열심히 준비할 수 있었다. 거의 매주마다 음성을 주시니까 누군가는 분명히 오게 되어 있는 것이고 그것을 생각하면서 설교를 준비했던 것이다. 만약에 그런 음성을 주지 않으셨다면 그토록 열심히 전도할 수 있었을까? 실망감이 뒤따르지만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기대감을 안고 전도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설교할 때에도 좌석에 4-5 명 앉아 있는 것보다 7-8명 앉아 있는 것이 훨씬 더 큰 힘이 되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표적
자기가 원해서 얻어진 표적이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시는 표적이든 모든 표적에는 분명한 이유와 목적이 있다. 예수님이 친구 나사로가 병든 소식을 듣고도 그가 죽을 때까지 이틀 동안이나 가지 않으신 것은 목적이 있었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요 11:15)
그리고 마침내 나사로의 무덤에 가셔서 돌을 옮겨 놓으신 것도 모인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하기 위함이었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1:42)
예수님의 행동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었다. 죽은 자도 살리시는 생명의 주인이심을 선포하신 것이었다.
갈리리 가나 혼인잔치에서 베푸신 포도주 기적에서도 예수님은 목적이 있었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요 2:11)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게 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제자들이 믿지 못한다면 다른 어떤 사람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친구 네 사람이 들것에 싣고 온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 죄 사함을 선포하셨다.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 9:2)
하지만 죄를 사한다는 말에 대해 서기관들이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아시고 중풍병자에게 명하신다. 그리고 그렇게 말씀하신 목적을 설명하신다.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마 9:6-7)
예수님이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전도를 보내신 후에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제자들이 전도를 마치고 돌아와서 흥분해서 예수님께 보고를 한다.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눅 10:17)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런 표적을 주신 것에는 다른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 10:20)
제자들이 전도하면서 행한 표적들은 그 상급이 하늘에 있음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표적의 의미를 잘 모른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건너가시자 사람들이 거기까지 쫓아왔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보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
표적의 의미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고 다시 기적을 얻고 싶어서 찾아온 것이었다.
한 맹인이 실로암 못에 가서 눈을 씻고 앞을 보게 되었다. 이 맹인은 그 표적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요 9:32-33)
하지만 눈이 가려진 유대인들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들이 욕하여 이르되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요 9:28)
표적의 뜻도 모르면서 그런 표적들을 쫓아다니면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표적을 받았으면 그 이유를 빨리 알아야 한다. 그 어떤 표적도 그 사람 자신에게 영광이 돌아가도록 하는 표적은 없다. 전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시는 것이다.
몇 년 전에 어느 큰 교회 여집사님이 암에 걸려 거의 말기에 이르러 죽음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이 집사님의 어머니는 전도사 신분이었다. 동네의 한 목사님이 어머니 전도사로부터 이 이야기를 듣고 기도하다가 매일 심방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머니 전도사와 의논하여 매일 환자에게 가서 정성껏 안수하며 기도하였다.
그런데 나중에 이 어머니 전도사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는데 한 달 이상 매일 찾아와서 기도해주던 목사님의 교회에 감사헌금을 딱 한 번 했다는 것이다. 이유를 불문하고 그 생명을 살려보겠다고 만사 제쳐놓고 찾아와 기도하는 분에게 감사헌금 딱 한 번이라니! 그것은 사람에 대한 도리도 아니고 하나님께 대한 도리도 아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바라는 마음이 아니라 그냥 한 번 던져보자는 이야기밖에 더 되겠는가?
자신의 목숨을 살릴 기회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기회도 다 놓친 것이다. 물론 한 달 동안 안수 기도한다고 반드시 낫는다는 것은 아니다. 감사헌금을 드리지 않아서 사망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표적을 구하는 영적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혹시 그렇게 전심으로 기도했는데 고쳐지지 않고 하나님께서 불러 가신다고 하더라도 그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귀한 보배를 쌓는 것이다. 표적을 구하는 자세나 받은 표적을 믿는 자세나 동일하다. 예수님이 아무리 많은 표적을 주셔도 사람이 그대로 받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표적을 주시는 이유에는 모두 동일한 원리가 적용된다. 비록 그 표적으로 인하여 그 사람의 이름이 높아지고 유명해진다 해도 하나님은 그 표적을 통한 목적을 가지고 계시는 것이지 그냥 베푸시기 위한 표적이 아니다. 이것을 오해하면 표적 얻는 능력을 주셨어도 엉뚱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표적을 분별하지 못하면
우리는 그 어떤 큰 기적이 일어나도 그 목적을 깨달아야 한다. 표적을 분별하지 못하면 전부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게 되어 있다. 그것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한다면 결국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린다. 주신 표적으로 자기 일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내가 아는 한 목사님의 사역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일이 있다. 작은 상가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몇몇 외부 성도들을 통하여 수십억의 헌금이 들어왔다. 이 헌금을 주시는 목적이 무엇인지는 나는 잘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기적으로 베풀어주신 거액의 헌금을 이 목사님이 잘못 사용했다고 생각한다.
인근 지역에 땅을 구입하고 건물을 지었는데 교회당보다 스튜디오 건물을 먼저 짓는 것을 보았다. 나는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이 목사님은 얼마 후에 그 건물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그냥 나왔다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놀라운 능력으로 역사해주셨지만 하나님의 의도와는 달리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못한 것을 보면서 표적을 주시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표적을 어떻게 받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님께서 표적을 행할 능력을 주셨음에도 오해하여 자기 목적대로 사용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표적을 잘못 사용한 사람들에게 무서운 말씀을 주신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표적을 받는 일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이야기이다. 표적이나 능력을 받지 못해도 주님께서 가르치신 뜻을 따라 살면 구원이 있지만, 아무리 큰 표적을 받아도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세상 원리대로 산 사람들에게는 구원이 주어지지 않는다. 어떨 때는 오히려 심판의 대상이 될 뿐이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 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눅 10:12-14)
숱하게 많은 표적을 아무리 많이 주셔도 깨닫지 못한다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그 표적을 받았기 때문이다. 차라리 표적을 받지 않았으면 심판은 줄어들지 모르지만 그 표적과 능력을 받았기 때문에 오히려 가장 먼저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표적을 분별하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자. 잘못 분별하면 오히려 심판의 대상이 될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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