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편에 서기

하늘의 상 5 : 하늘의 영원한 상

김완섭 목사 2017. 10. 29. 13:30


   하늘의 영원한 상

 

보상종교냐 은혜종교냐?

우리는 지금 하늘의 상에 대하여 살펴보고 있지만, 이쯤 해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기독교 복음은 인간의 전적인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절대은혜에 의해서 오직 믿음으로만 성립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타락해 있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지하지 않고는 구원이 있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그 어떤 행위를 바친다고 해서 구원이 성립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의해 그 사실을 믿음으로써만이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 인간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써 공로 없이 얻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의문이 생길 수 있다. 하늘의 상, 보상은 뭐라고 설명할 것인가? 믿음에 의해서이기는 하지만, 어떤 행위로 말미암아 보상이 주어진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이 아닌가? 내가 뭔가 행위를 보여드림으로써 상을 얻는다면 그러면 다른 종교와 무엇이 다른가? 행함으로써 보상이 주어지는 종교라면 모순일 수밖에 없고 그러면 복음은 엉터리가 아닌가? 만약에 행위에 의해 보상이 주어진다면 한 걸음 더 나아가 믿음으로 인한 구원이 아니라 행위구원으로 잘못 알려질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점에 대해서 분명하고 명확한 정의를 내린 후에야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헌신한 이후에 받게 되는 하늘의 상에 대하여 제대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하늘의 상은 행위로 인한 보상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하늘의 상이라고 해서 어떤 일을 했을 때 주어지는 단회성 보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행위 자체에 대한 직접적인 보상이 아닌 것이다. 하늘의 상은 믿음의 결과를 따라오는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다. 어떤 행위를 하면 특별히 주어지는 보상이 아니라 그 행위를 따라 저절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꽃 한 송이를 피우기 위하여 씨앗을 땅에 심었다고 하자. 싹을 돋아나게 할 충분한 조건이 주어졌을 때 생명이 움트기 시작하는데, 이 때 그 어떤 식물도 땅속에 있는 씨앗에서 곧바로 꽃이 올라오지는 않는다. 아무리 조건이 좋아도, 아무리 씨앗이 건강해도 반드시 싹부터 올라오게 되어 있다. 그것은 자연현상이며 그 어떤 식물도 예외가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늘에서 주어지는 보상도 어떤 행위에 대해 곧바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씨앗을 심는 행위를 따라 곧바로 꽃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씨앗을 심고 물을 주고 햇볕이 비치면 자연스럽게 싹이 나오고 벌레나 바람에 해를 입지 않도록 가꾸면 줄기가 나오고 마침내 꽃이 피는 것처럼 우리가 이 땅에서 주님의 말씀을 따라 주님의 영광을 위해 열심히 헌신하고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돕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다 보면 우리가 하늘의 상을 의식하지 않더라도 하늘에서는 우리의 상이 차곡차곡 쌓이는 것이다.

 

다만 특별히 하늘의 상을 바라고 헌신하라고 권면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그리고 그럴 때 하늘에서는 어떤 보상이 꽃이나 열매처럼 맺히고 있을까를 보다 정확하게 앎으로써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가리켜 보상종교니 행위종교니 하는 말은 하지 말자.

 

기독교는 절대적으로 은혜종교이다. 하늘의 상이 보상으로 주어진다는 말씀은 성도는 그 어떤 보상도 필요 없을 만큼 복되고 복된 하나님의 자녀라는 권세를 받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들을 사랑하시어 그 위에 덤으로 하늘의 상을 주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참된 삶을 위하여 하늘의 상을 약속하시지만 그 상만 바라보고 이리저리 움직인다면 그것은 빈 껍데기밖에는 되지 않는 것이다. 똑같은 행위라고 하더라도 그 행위에 대해 무조건 똑같은 상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얼마만큼 진정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헌신하는가에 따라 하늘의 상은 천차만별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상을 받는 여러 길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는 간절함인 것이다. 자식이 귀신들려 고통당하는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악한 관원을 통하여 원한을 풀기 원하는 가난한 과부처럼, 길가에서 부르짖어 예수님께 소리치는 맹인들이나 나병환자들처럼, 또 군중들 틈에서 예수님 옷자락에 손을 댄 혈루증 앓는 여인처럼 그렇게 순수하고 최선을 다하는 행위에 대해서만 하늘의 상은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헌신에 대한 보상으로 하늘의 상이 주어진다고 생각하지 말자. 다만 어떻게 할 때 하늘의 상이 오는 것인지는 알고 살아야 할 것이다. 하늘의 상을 의식할 필요는 없지만 분별은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땅의 복에서 눈을 떼어 하늘을 쳐다보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더욱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늘의 상에 대하여 살며보아야 하는 이유이다.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

하늘의 상이라고 할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우리가 천국의 상속자라는 개념이다. 내가 과거에 아버님이 운영하시는 출판사 편집부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대학교재를 위주로 출판하는 회사라 봄, 가을 학기 직전까지 제작을 마쳐야 하므로 보통 12월부터 3월 중순까지, 6월부터 9월 중순까지 항상 야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밖에도 나는 다른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진척시키느라고 거의 1년 내내 야근을 하다시피 하였다.

 

정말 가장 열심히 일했는데 그렇게 헌신적으로 일한 것에 비하면 월급은 적었다. 그런데 회사에 영업부장이 있었는데 나이가 나보다 6-7세 적은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영업실적이 좋아서 거기에 합당한 월급을 받고 있었지만 내 월급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나는 이미 결혼하여 아이들도 있었으므로 생활이 안정되면 더 열심히 일하겠는데 우리의 옛 어른들 마음에는 젊을 때 고생 좀 해야 한다는 의식이 자리 잡고 있을 때여서 월급을 충분하게 주지 않으셨다.

 

영업부장과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그 영업부장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부장님은 사장님 아들이잖아요? 나중에 다 부장님 건데요 뭐. 회사가 힘들면 부장님은 사장님과 같이 굶겠지만 나는 다른 데 가면 되죠. 그래도 고생하시면 나중에 다 부장님 거 되잖아요?”

용어는 다를지 몰라도 뜻은 내가 상속자라는 것이다. 상속자니까 결국 다 자기 것이고, 좀 월급이 작아도 그것을 이겨내야 상속자가 된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상속자란 무슨 뜻일까? 우리는 믿기만 하면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저 마음의 동의만으로 끝날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믿는다고 할 때 그 믿음의 내용은 상당히 다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지금 우리 시대에 기독교인들이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과 초대교회 시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많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 시대에 믿는다고 하면 자기 모든 것을 잃어버릴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는 인생의 큰 결단이었다.

 

물론 지금도 교회에 다니면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일은 큰 결단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처음에는 그 속에 자기 손해, 희생과 같은 개념인 들어있지 않다. 헌신이나 버림이 없이 어떻게 참 믿음이 가능하며, 어떻게 그런 믿음으로 상속자가 될 수 있을까? 여기에서 꼭 무엇을 해야 상속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참된 믿음의 결단이 있으면 모든 것이 감사함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절대로 갚을 수 없는 구원을 얻었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행위-보상 개념이 아니라 나의 마음을 하나님께 보여드리는 것일 뿐이다. 그런 믿음 안에서라면 그 사람은 이미 상속자가 되어 있고, 나머지는 하나님의 보상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보답해드리는 일만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나라의 상속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주시는 보상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보상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상속은 자연히 따라오는 것이고, 그 상속을 받기 위하여 애를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면서 예수님 마음의 통로가 되어 세상에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다.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3:7)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가진 믿음이 과연 어떤 것인가를 점검해보아야 할 것이다.

 

믿음이라는 단어 말고 주님이라는 말을 생각해보자. 주님이라고 부를 때 사람에 따라 그 개념은 천차만별일 것이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믿음에 따라 다양한 모습들이 나타나리라고 생각한다. 마음을 평안하게 해 주는 주님일 수도 있고, 문제를 해결해주는 주님일 수도 있다. 사업을 흥하게 해주는 주님일 수도 있고, 좋은 데 취직하게 해 주시는 주님일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기꺼이 고난을 함께 할 수 있는 주님일 수도 있고, 생명이 위협받을 때도 결코 떠나지 않을 주님일 수도 있다. 물론 그 모든 개념을 전부 포함하시는 주님이시다.

 

하지만 내가 어디까지 주님으로 생각하느냐가 얼마나 중요한가? 예수님은 주님을 엉뚱한 개념으로 사용한 사람들을 나무라셨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7:22-23)

듣기 불편한 말씀이지만 주님을 부른다고 전부 상속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도 마치 어떤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상속이 주어지는 것처럼 말씀하신 경우가 있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19:29)

마치 가족이나 전토를 버린 사람에게 상속이 주어지는 것으로 설명하셨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25:34)

그러면 오른편에 있는 자들이 무슨 일을 하였는가?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25:35-36)

마치 소외된 이웃들을 돌봄으로 말미암아 상속자가 되는 것으로 말씀하셨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들은 상속자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나타내는 표지일 뿐이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2:5)

결코 율법의 어떤 행위나 헌신에 대한 보상으로 상속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4:13-14)

 

우리가 이 땅의 복이 아니라 저 하늘의 상을 바라본다고 할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상은 가장 우선적으로 하늘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상속자가 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상속자가 되었으면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에 함께 동참할 수는 있어야 한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8:17)

상속자가 되기 위한 고난이 아니라 상속자로서 당연히 주님과 함께 받을 고난인 것이다. 고난을 피하는 것이 상속자의 길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상속자라면 고난을 회피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상속자인지 아닌지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보아야 한다. 상속자가 되기 위하여 이 땅에서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인하여 주님이 주신 계명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실행함으로써 우리 스스로 하늘나라의 상속자임을 증명해 보여야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하늘나라의 상속자로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실현해 나가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상속자로서 아무리 애를 쓰고 목숨까지 바친다고 해도 하늘나라가 이 땅에 성취될 수는 없지만 우리의 상속자로서의 삶을 통하여 이 땅에 하늘나라의 모델을 제시할 수는 있는 것이다. 스스로 하늘의 상속자임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자.

 

하늘나라 상의 형태

예수님께서는 똑같은 상속자라도 천국에서 여러 가지 형태의 역할을 주실 수 있음을 말씀하신다. 우선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른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에서 보좌에 앉아 열두 지파를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주신다.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22:30)

그리고 상속자로서 모든 환난에서 끝까지 승리한 사람에게도 예수님의 보좌에 앉게 해 주신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3:21)

 

그런데 보좌는 어떤 자리인가? 보좌는 영광스러운 자리이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25:31)

보좌는 영원한 자리이다.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1:8)

보좌는 심판하시는 자리이다.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9:4)

장로들이 앉을 보좌도 있다.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4:4)

어린양이 앉는 자리이다.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7:17)

 

결론적으로 보좌에 앉아서 심판하는 권세를 받고 천년 동안 왕 노릇하게 되어있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20:4)

이것이 하늘의 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리고 이 땅에서 예수님의 계명을 친히 실천하면서 사람들을 가르치는 사람에게는 천국에서 모든 백성 가운데 큰 사람이라고 일컬음을 받게 하신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5:19)

또한 어린아이들처럼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사람도 천국에서 큰 사람이 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18:4)

 

천국에서 큰 자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는 성경에 설명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요한에 대한 묘사 중에 요한이 큰 자가 될 것인데 그 의미는 주님 앞에서 큰 자가 된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1:15)

천국에서도 천국시민들 중에서 큰 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큰 자가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렇다고 천국에서 큰 자가 작은 자를 다스리지는 것과 같은 계급적인 의미는 아니다.

거기서는 작은 자와 큰 자가 함께 있고 종이 상전에게서 놓이느니라”(3:19)

아무튼 하나님으로부터 큰 자라는 인정을 받는 것이 이 땅의 낮은 자리에서 섬긴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늘의 상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천국에서 결코 없어지지 않을 보물을 주실 것이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6:20)

특별히 자기 소유, 재물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사람에게 더욱 많은 보화가 쏟아질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19:21)

물론 재물을 팔아서 전부 나누어준 것만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하고 주님을 따라야 그 보화는 내 것이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값없이 전하고 자기의 권리를 다 쓰지 않은 것으로 상이 있다고 했다.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고전 9:17-18)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에게 주어지는 권리를 사용하지 않고 복음전파에 사용한 것도 하늘의 보화로 쌓여있을 것이다.

 

물론 이 보화는 금은이나 보석과 같은 물질적은 것은 아니다.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2:3)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도 정말 귀중한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 많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만 해도 얼마나 귀중한 보물인가?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5:22-23)

그러므로 천국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상으로서의 보물은 참으로 완벽한 심령의 보물들일 것이다. 그래서 모세도 이런 가치를 알고 심령의 보화를 받고자 모든 것을 희생하였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11:26)

 

완벽한 신뢰,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찬양, 조금도 어두움이 없는 행복, 속에서 저절로 넘쳐 흘러나오는 기쁨, 주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는 진정한 사랑, 이런 것들이 하늘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보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물질의 보물은 잠시 기쁨을 주지만 하늘의 이런 심령보물들은 영원토록 우리를 따라다니면서 영생복락으로 인도하니 그런 나라를 상상하면서 행복에 젖어본다. 그런 나라를 위해서라면 우리가 무엇인들 참지 못할 것이 있으랴!

 

상을 받기 위한 마지막 조건

하지만 우리의 심령은 늘 진심이어야만 한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진심이 아니면 아무리 열심을 다해도 상으로 주어지지는 않는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6:1)

그렇지만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남들에게 보이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래서 신앙은 훈련이 필요한 것이고 거듭되고 반복되는 삶이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은 성도의 진심에 대해 크게 기뻐하신다. 가난한 어떤 과부는 진심을 다해 헌금하였다.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12:44)

자기 하인을 고치고 싶은 백부장도 진심으로 예수님을 의지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8:10)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마리아도 진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14:8)

그 결과 예수님이 마리아의 진심을 영원토록 알리게 하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14:9)

 

우리도 신앙생활을 할 때에 항상 진심으로 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진심이 믿음이고 진심이 기도응답이고 진심이 사랑이다. 하늘의 상도 그 상을 바라보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늘의 상이 아니겠는가? 하늘의 상은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하여 진심을 다해 최선을 다해 달려갈 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다. 무엇에든지 진심으로 최선을 다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