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독교 신앙의 핵심
기독교신앙의 관계성
하나님과의 관계, 형제와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가 신앙의 핵심이다. 관계성이 빠지면 우리의 신앙이라는 것은 그냥 겉껍데기만 남을 뿐이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자기는 가만히 있고 하나님을 움직이려고 애를 쓰는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철야기도, 작정기도, 금식기도를 여러 가지 제목을 붙여 행하는 것을 본다. 관계를 떠나서 오직 자기목적이 우선된다면 그 많은 기도와 예배와 헌금과 찬양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철야기도, 작정기도, 금식 기도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과연 무엇을 위한 기도인가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내가 처음 예수님을 믿은 이듬해 1월 1일에 한얼산기도원에 간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선교회에서 단체로 한 해를 시작하기 위해 찾았었다. 그 때 아직도 잊히지 않는 몇 가지 말이 있었는데, 하나는 한얼산에 오면 강아지도 방언을 다 받는다는 말이었고 다른 하나는 산 속에서 소나무를 붙잡고 밤새 씨름하듯 기도하여 소나무가 뽑힐 때까지 기도하라는 말이었다.
“내가 과연 그 방언이라는 것을 받을 수 있을까?”
방언에 대해서는 이런 생각이 들었고, 소나무 뿌리가 뽑혀야 한다는 말에는 그런 절박함이 내게는 없었으므로 피식 웃고 만 기억이 난다. 소나무 뿌리에 대해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절박함이다. 절박함이 없는 사람은 은혜도 적게 받을 수밖에 없다. 성경에 나오는 기적의 주인공들, 칭찬의 주인공들에게는 모두 이 절박함이 있었다. 그래서 소나무를 붙잡고 밤새 씨름하여 뿌리가 뽑힐 정도로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내가 말하려는 것은 소나무 뿌리가 뽑힐 때까지 기도하라는 그 자체가 아니다. 정말 절박함이 있다면 느티나무 뿌리라도 뽑으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과연 무엇을 위한 소나무 뿌리인가 하는 점이다. 우리가 착각하기 쉬운 것 중의 하나가 무조건 기도하면 다 들어주신다는 생각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거룩한 목적을 가지고 기도하기 때문에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을 따라서 비전을 가지고 행해 나가는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이라는 확신이다. 그래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 하나님께 떼를 쓰게 된다. 더 이상 말하지 않겠지만, 은사를 주장하는 분들 중에 이런 식으로 기도하기를 강요하는 분들이 많다.
하지만 그렇게 생명이라도 걸 것 같은 그런 기도보다 우선되어야 하는 아주 중요한 문제가 있다.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과연 어떤 관계가 하는 점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서 있는 사람이라면 정말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은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 아무리 내가 생각해볼 때 내 기도제목이 옳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를 고려해 볼 수 있어야 비로소 기도의 올바른 출발점이 시작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각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기의 필요를 가지고 소나무 뿌리를 뽑으려 한다면 아무리 기도에 큰 응답을 받았고 기적을 체험하였더라도 어쩌면 하나님과 관계없는 사람일 수도 있는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과 정상적이고 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어떤 일을 행하기 전에 정말 간절히 하나님의 뜻을 구할 것이다. 내가 아무리 절박하게 원하는 일이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생각을 묻지 않고 먼저 추진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에 어느 회사의 사장이 예산이 많이 들어가는 신제품 개발에 관한 일을 시작하면서 그룹의 회장에게 묻지도 않고 시작하고 나서 일이 진행된 상태에서 회장에게 예산을 요구한다면 그것이 온전하게 진행될 수 있을 것인가? 회장의 의중도 중요하고 그룹의 사정도 중요하고 기업의 환경도 중요한데 자기가 하는 일이 시의적절하고 반드시 필요하다고 해서 무작정 시작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회사의 운영과 같은 차원일 수는 없지만 원리적으로 생각해 볼 때 아무리 하나님의 큰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이렇게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으로 일을 하고 있다면 그 사역은 결국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무너지게 될 뿐이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 7:26-27)
하나님과 관계없는 사람은 아무리 큰 집을 짓는 것 같아도 다 무너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짝사랑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연애 이야기로 비유해보자. 고백하기 부끄럽고 창피한 이야기이지만 20대 초반에 짝사랑을 한 적이 있었다. 대개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인데, 짝사랑의 경우 그 대상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감정적인 그리움과 함께 섞여서 그 사람 아니면 죽을 것 같은 마음만 가득하게 된다. 짝사랑은 사랑인 것은 맞지만 중요한 것은 일방적인 사랑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사랑하는 사이라면 쌍방적이 되어야 하고 배려해야 하고 사랑을 더 키울 수 있어야 한다.
짝사랑은 서로사랑보다 훨씬 더 뜨거울 수 있고 더 간절한 마음이 될 수 있지만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는 인격적인 만남을 결여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인격적인 교제가 없는 사랑은 아무리 그럴 듯하게 표현한다고 해도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지나가고 나면, 곧 환상이 깨어지고 나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 허상이 될 뿐이다. 그 당시에는 죽을 것 같았지만, 그래서 일상생활이 거의 무너져버리게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고, 환상이 사라졌을 때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며 그 사랑은 영원하다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짝사랑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짝사랑해야 하는데 거꾸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짝사랑하신다. 물론 사람의 짝사랑과 같다는 말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약속하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셨다는 말이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인간이 전부 그 사랑 안에 들어오기를 원하시는 사랑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신다고 해서 모든 인류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올 수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으로 성취되셨다는 사실을 믿어야만 하나님과의 서로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서로사랑의 관계 속으로 들어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짝사랑하셨지만 우리가 거기에 반응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기독교의 믿음이 비로소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 서로 사랑하는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서로 사랑이라고 해서 항상 그 사실을 그 깊이만큼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고 아이도 부모를 사랑하고 있다. 그래서 항상 함께 있어야 하고 부모가 아이의 사랑을 채워주고 아이는 부모의 사랑을 채워주고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아이가 부모의 사랑의 크기와 깊이의 정도를 다 알 수는 없다. 부모는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정말 목숨까지라도 내놓을 만한 깊이로 사랑하고 있지만 아이는 그 사랑의 은혜와 보호 안에서 사랑을 느끼면서 살고 있을 뿐이지 부모의 사랑의 정도에 대해 사실 그대로 깨닫고 갚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사이의 사랑 중에서는 가장 깊고 큰 사랑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아이가 부모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은혜에 감사해야 한다거나 부모와 아이가 같은 사랑이지만 거기에 대해서 서로 다르게 느낀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부모와 아이의 관계이다. 그러니까 아이가 아직 어려서 부모의 사랑의 깊이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려고 고집을 부리고 땅바닥에 쓰러져서 발을 휘젓고 떼를 쓴다고 해도 부모와 아이의 관계는 변함이 없는 혈육의 관계라는 것이다. 부모와 아이의 관계는 사랑을 얼마만큼 느끼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가 하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다윗과 하나님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신앙이 어리거나 자기중심적, 이기적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 속에서 일상생활을 영위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아직 신앙이 자라지 못하고 미성숙해서 하나님을 오해할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을 때 비로소 그 사람을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일 때에는 비록 하나님을 실망시키거나 아무 관계도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래서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유익만을 구하는 모습으로 비칠 수도 있지만, 그럴 때에조차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확실하다면 그 사람은 올바른 신앙인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다윗이 우리에게 그런 관계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을 행하는 큰 범죄를 저질렀지만 하나님은 다윗을 결코 버리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일찌기 다윗을 어떻게 생각하셨는가?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삼상 13:14)
다윗은 여호와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다윗이 죄의식 없이 간음죄와 살인교사죄를 저질렀을 때 그는 아무 느낌도 없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다윗의 관계는 끊어져버린 것인가? 만약에 죄를 지었다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버린다면 그것은 사랑의 관계가 아닐 것이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지적을 듣자말자 그 자리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였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삼하 12:13上)
그리고 깨닫고 회개하는 다윗을 대하여 하나님은 그 사랑을 버리지 않으신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삼하 12:13下)
반면에 다윗에게 있어서 가장 두려운 일은 하나님께서 떠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 51:11)
그리고 다윗은 다시 예전의 관계를 회복시켜 달라고 간구하게 된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시 51:12)
그러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신앙이라면,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을 진짜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이 자기 목적을 위하여 철야기도, 금식기도에 온 힘을 쏟는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으면서도 자기 마음대로 신앙 생활하는 사람은 무엇이 다르다는 것인가? 여기에서 비록 이기적이요 자기중심적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고 있는 것과의 차이가 드러나는 것이다. 말하자면 똑같이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으로 보이더라도 참된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인지를 알 수 있는 기준이 있다. 그것은 부모와 어린아이의 모습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관계성의 기준 1 : 절대의존적 관계
부모와 어린아이의 관계는 첫 번째 특징은 서로 절대적 의존의 관계라는 것이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아이는 부모 외에는 함께 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안으면 울음을 터뜨리게 되어 있다. 결코 자기 부모 외의 사람에게는 의존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부모가 돈이 많든 적든, 건강하든 건강하지 못하든 그런 것과는 관계없다. 다만 자기와 함께 있어온 부모라는 그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엄마에게서 결코 떨어지려고 하지 않는다. 부모와 떨어지면 죽을 줄 아는 의존성이 정상적인 부모자녀관계인가를 결정짓는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이 점을 잘 살펴보면 그 사람의 신앙을 알 수 있다. 나는 얼마나 하나님 의존적인가를 살펴야 한다. 사실 자기가 스스로 보기에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지 분별하기는 쉽지 않다. 나는 신앙생활을 꽤 오래 하고 나서도 내가 과연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일까를 생각하면 도무지 자신이 없어지고 정말 진정한 신앙인인지 확신이 없어질 때가 많았다.
과연 어떻게 하면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까? 방언을 하고 통역을 할 줄 알면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일까? 찬양을 할 때 감동이 되고 눈물이 나면 그런 관계가 이루어진 것인가? 40일 금식기도를 하면 그러면 예수님과 바른 관계가 되어 있는 것일까? 십일조를 철저히 하고 금식을 정기적으로 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면 바른 관계일까?
그러나 그런 것 가지고는 예수님과 바른 관계인지를 확인할 수 없다. 비록 각종 은사나 예배나 기도가 정상적인 신앙인의 특징들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런 외적 현상 자체가 곧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 물론 그런 현상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는 그런 은사들을 적극적으로 사용할 줄 알면 많은 도움이 된다. 하지만 그런 은사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했지만, 그래서 엄청난 역사를 이루어낸 것 같았지만 사실은 주님과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는 것이다.
자녀만 부모를 절대 의존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부모도 자녀에게 절대 의존적이다. 자녀가 부모의 사랑에 절대적으로 의존한다는 그 자체가 사랑에 대한 보상이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로 성도에게 절대 의존적이시다. 무엇을 보고 알 수 있겠는가?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심을 볼 때 성도에게 절대의존성을 가지고 계신 것이 틀림 없다.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증한 것으로 그의 진노를 격발하였도다”(신 32:16)
하나님의 백성이 다른 신을 의지할 때 성도 의존적이신 하나님께서 질투하시고 진노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적으로 간음하고 돌이키지 않을 백성들을 버리신 후에는 결코 질투하지 않으신다.
“그리한즉 나는 네게 대한 내 분노가 그치며 내 질투가 네게서 떠나고 마음이 평안하여 다시는 노하지 아니하리라”(겔 16:42)
그러므로 부모자녀관계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성도는 절대의존성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 대하여 절대의존적인 상태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관계성의 기준 2 : 최우선적 관계
둘째로, 부모와 아이의 관계는 서로가 최우선적인 관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부모는 아이를 최우선으로 삼고, 아이는 부모를 최우선으로 삼는 관계가 부모자녀관계이다. 예수님은 이런 관계를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의 비유로 말씀하셨다.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마 25:10-12)
이 때 슬기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신랑을 맞이하는 일을 최우선으로 삼았는가의 여부이다. 미련한 처녀들도 등을 가지고 왔고 슬기로운 처녀들도 등을 가져왔다. 하지만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을 맞이하는 것이 최우선이었기에 기름그릇을 따로 준비해왔다. 그러나 미련한 처녀들은 비록 긴급한 사정이 있었을 수 있겠지만 신랑을 만나는 일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지 않았기에 꼭 가져와야 할 것을 가져오지 못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을 향하여 가차 없이 결판을 내버리신다.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마 25:12)
미련한 처녀들은 예수님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최우선순위에 놓아두신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뜻을 따라 나아가고자 하면 하나님께서 먼저 가서 준비해 놓으신다.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신 1:33)
최우선순위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대신 싸워주신다.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신 1:30)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우리를 최우선순위에 두실 뿐만 아니라 최고로 소중하게 여기시는 증거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일 4:9)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최우선순위에 두는 사람이다.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에 두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여호와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었다.
“그 날에 다윗이 아삽과 그의 형제를 세워 먼저 여호와께 감사하게 하여 이르기를”(대상 16:7)
신약에 와서 예수님께서도 최우선순위에 무엇을 두어야 할지를 분명하게말씀해주셨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그리고 그 어떤 것도 하나님보다 우선순위에 두거나 더 사랑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아니고 어쩌면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일 수도 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부모와 아이는 아무리 다른 중요한 일이 있더라도 각각 부모와 아이보다 중요하게 여길 수는 없는 것이다. 과연 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최우선순위, 최고로 중요한 위치에 모시고 있는가? 물론 삶에서 일어나는 각양각색의 일로 인하여 잠시 게으름을 피운다거나 신앙생활의 상처로 인하여 낙심하고 회의적이고 소극적으로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성도라 할지라도 일평생 똑같은 열정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는 없다. 어쩌면 세상살이에서 잠시 욕심으로 인하여 이기적인 모습을 보일 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결정이나 어떤 일을 시작하거나 진행시키는 일을 앞두고서는 하나님의 뜻에 최우선선위를 두는 사람이어야 한다.
예수님은 자기 아버지를 장사하고 나서 따르게 해달라는 제자의 요청조차 들어주지 않으셨다.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마 8:21-22)
물론 문자 그대로 읽기보다는 제자에게 있어서 최우선순위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을 최우선순위에 두고 있는가? 그렇다고 대답하겠지만 실제 상황 앞에서는 언제나 흔들리는 것이 또한 우리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살아있으려면 비록 흔들릴지라도 하나님을 최우선순위에 둘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관계성의 기준 3 : 두려움 없는 관계
사랑하는 사이는 서로 보기만 해도 반갑고 기쁨이 생기고 마음에 평안이 나타난다. 사랑하는 사이라면서 서로를 볼 때 불안해지거나 불편하거나 두려움이 펼쳐진다면 그것은 가짜 사랑이다. 이것은 꼭 부모자녀관계가 아니라도 사랑하는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사랑의 특성을 두려움과 관련하여 설명하였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부모자녀관계에서는 두려움이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물론 일시적인 회피나 잘못했을 때 죄책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부모가 아이를 사랑한다는 기본 전제는 변함이 없다. 부모가 아이를 야단쳐도 그것은 사랑이 전제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이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혹시 부모의 지시를 벗어나더라도 아이는 이 사랑의 전제를 알고 있기에 멈추어야 할 시점을 알고 딱 거기까지만 저항하는 것이다.
자녀는 잘났건 못났건, 공부를 잘 하건 못 하건 사랑이라는 전제 안에 있다. 때로는 성적이 꼴찌가 나와도, 어쩌다가 다른 아이들과 싸워서 코피가 나도 그래도 여전히 집으로 돌아오고 부모에게 의존한다. 약간의 불안감이나 죄스러움은 있겠지만 그것이 부모자녀관계를 무너뜨리지는 않는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성도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거하고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고 있는 사람은 불안하지 않다. 때로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할 때가 있겠지만 그것은 일시적, 피상적인 모습일 뿐이다.
만약에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두려워질 때가 있다면 그것은 둘 중 하나이다. 죄를 지었을 때와 세상에 묻혀있을 때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을 저지르는 것은 죄이고 세상에서의 욕심에 이끌려 거기에 묻혀버리는 것은 일시적 격리이다. 비록 시간이 좀 걸릴 수는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은 빠르게 회복될 수 있다. 만약에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지속되는 사람이라면 어쩌면 아직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닐 수도 있다. 성도가 혹시 죄를 짓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있는 사람이라면 인간의 근본적인 두려움은 없다. 빨리 회복하고 싶은 부담만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있는 한 근본적인 두려움이나 염려는 없어야 한다. 이것은 한 번 구원받았으니 취소될 수 없다는 신학적인 이야기와는 다른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과연 진정한 혈연관계가 맺어져있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혈연관계가 되면 아무리 오랫동안 떨어져있어도 그 사실 자체가 변하지는 않는다.
하나님과 성도의 사이는 혈연관계로 맺어져 있는 사이이다.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인하여 하나님과 하나 된 사람들이 우리들이다. 염려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 그렇게 맺어진 관계에서는 절대적 의존성과, 최우선순위와 철저한 신뢰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과의 혈연관계로 맺어진, 결코 끊어질 수 없는 관계 자체를 뜻하는 것이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하나님 편에 서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관계 3 : 힘을 다하여 (0) | 2017.11.03 |
---|---|
관계 2 : 마음과 뜻을 다하여 (0) | 2017.11.02 |
하늘의 상 5 : 하늘의 영원한 상 (0) | 2017.10.29 |
하늘의 상 4 : 주님과의 동행 상 (0) | 2017.10.29 |
하늘의 상 3 : 박해받음의 상 (0) | 2017.10.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