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과의 동행 상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요 12:26)
담대함이 만들어주는 상
성도가 받을 수 있는 세 번째 큰 상은 고난과 비방과 환난 중에도 담대함으로 이겨낸 데 대한 상이다.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히 10:32-35)
담대함 자체로 상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고난과 박해와 역경 중에서도 그리스도인답게 담대하게 승리하라는 말씀이다. 신앙생활은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연약하고 무능하고 편견에 사로잡힌 듯이 보일 수 있지만, 그러한 모든 상황들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다운 담대함이 필요하다는 말씀이다. 신앙 때문에 어떤 어려움에 직면하더라도 끝까지 담대한 마음으로 당당할 수 있어야 한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담대함은 언제나 반드시 필요하다.
복음을 전할 때 주님께서 주시는 담대함이 있어야 자신 있게 전할 수 있다.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행 14:3)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빌 1:14)
나는 처음 신앙생활을 선교단체에서 시작하였다. 교회에 출석하는 첫날부터 경찰병원에 가서 전도에 참여하였다. 사실은 전도 참여가 아니라 전도하는 모습을 구경만 하고 있었다. 몇 년 후에 일반교회에 가서 신앙생활을 새로 시작했지만 병원선교회 생활을 포함하여 10년 이상을 병원에 전도하러 다녔다.
처음에는 가락동에 있는 교회에 다니면서 성가대원이나 청년회와 함께 강남시립병원(현 강남병원)에 주일 낮 예배 후 전도를 다녔다. (그 당시에는 거의 모든 교회가 주일 저녁예배를 드릴 때여서 오후 시간을 낼 수 있었다.) 그 후 암사동에 있는 교회에 다니면서 역시 성가대나 청년회와 함께 근처 병원에 전도를 다녔다. 나중에 3-4년간은 함께 전도할 사람이 없어 혼자서 다녔다. 당시 길동사거리 쯤에 있던 송천병원과 다른 두 병원에 주일 낮 예배 후에 혼자서 병실마다 찾아다녔다.
무엇이 나를 그렇게 담대하게 만들었을까? 첫 신앙생활부터 그렇게 배웠기 때문일 수 있다. 어떤 의무나 책임감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내가 나의 감각으로 깨달은 것은 아니지만 성령께서 나를 재촉하셨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담대함이 없이는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나는 사실 아무하고나 잘 사귄다거나 처음 보는 사람하고도 잘 어울리는 형은 아니다. 여행을 가서도 이리저리 잘 묻는다거나 용기 있게 앞장서서 행동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담대함을 주셨기에 혼자서 병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간절히 기도해주는 일을 오랫동안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담대함이 없이는 하나님의 일을 용기 있게 행할 수 없다. 담대함이 하늘의 상으로 이끌어가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신앙생활의 필수과목 ‘담대함’
성도들을 향한 권면에도 담대함은 필요하다.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 담대히 대략 너희에게 썼노니”(롬 15:15)
몇 년 전에 어느 목회자 세미나에서 대형교회 유명 목사님이 강의한 적이 있었다. 나는 거기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다른 목사님을 통하여 들을 수 있었다. 이분이 강의 중에 특별히 강조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여러분, 설교 중에 절대 성도를 책망하는 설교는 하지 마십시오. 마음에 부담이 되거나 짐이 되는 설교를 하지 마십시오. 죄를 지적하는 설교를 결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이분의 말씀 속에 들어있는 본의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죄를 지적하거나 책망하는 설교를 하면 마음에 상처가 되어 떠날 수 있다는 것이다. 성도들은 신앙이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신앙이 성장하면 자연스럽게 알 수 있는 것을 의도적으로 지적하면 믿음을 떠나게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신앙이 자연스럽게 자라나서 저절로 깨닫게 될까? 깨닫는 사람도 있고 못 깨닫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 모두 칭찬만 있는가?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가 전부 좋기만 한 이야기인가? 성경은 믿음의 승리자들의 책인 동시에 온갖 종류의 실패자들의 책이기도 하다. 실패해보지 않으면 결코 깨닫지 못하는 진리들이 너무나도 많다.
결론은 진리는 지혜롭게 전해야 하지만 담대하지 못하면 제대로 전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책망하는 설교를 듣지 않으면 성도의 신앙은 정말 자라기가 힘들다. 상처가 될 수도 있고 혹 잠시 교회를 떠나거나 다른 교회에 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는 담대하게 전해야 하는 것이다. 책망하는 설교를 하지 않음으로써 교인들의 숫자가 줄어들지 않을 수 있지만 책망하는 설교를 하지 않음으로써 교인들의 신앙을 책임지지 못한다면 하늘에서는 어떤 상도 주어질 수 없을 것이다.
담대함은 우리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도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 2:28)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나아갈 수 있을까? 우리가 우리 자신의 영적인 모습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 앞에 나타날 수 없다. 신앙이 성장해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믿음 좋은 사람은 기도해서 응답을 받아 내거나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아 감동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작은 죄에도 민감하게 느끼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좋은 사람은 정말이지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나타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담대함이 있으면 하나님 앞에도 떳떳하게 나아갈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실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 부끄럽기는 해도 책망 받을 것이 적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모자라기는 해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하여튼 우리가 담대하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 머리를 들고 나갈 수 없다. 성도의 신앙생활 가운데 담대함이 있어야 하늘의 상으로 이끌려갈 수 있는 것이다.
담대함의 뿌리 : 예수님과의 동행
그러면 이 담대함은 어떻게 생기는 것인가? 성경에 보면 담대한 마음은 하나님께서 주신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행 23:11)
베드로는 원래 겁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담대한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그리하여 3,000명 이상이 모인 곳에서 담대하게 설교하여 그 자리에서 회개하게 만들었다. 마가 요한은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선교여행을 갔다가 포기하고 돌아갔던 사람이었지만 나중에는 바울의 인정을 받을 만큼 담대한 사람으로 변하였다.
이러한 담대함은 주와 함께 있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고후 5:6-9)
그러므로 담대함이란 곧 예수님과 함께하며 예수님을 따르는 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이 계신 그곳에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과 동의어이다. 생각해 보라!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그 어떤 담대함이 생기겠는가? 사실 우리가 주와 함께한다고 해서 몸으로 직접 함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몸으로 있든지 몸을 떠나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함께하는 것이다. 담대함은 어떤 형태이든 주님과 함께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물론 믿음이 담대함으로 이어진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엡 3:12)
소망도 우리를 담대하게 만들어준다.
“우리가 이 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고후 3:12)
성령 충만할 때 담대함을 주신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 4:31)
감사할 때에도 담대함을 주신다.
“그 곳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행 28:15)
그러나 담대함을 불러일으키는 이런 모든 요인들은 한 마디로 하면 예수님과의 동행이다. 그런데 동행이라고 하면 흔히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렇게들 알고 있으며 그렇게들 믿고 싶어 한다. 하지만 성경에는 하나님과의 동행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곳’에 방점이 찍혀있다. 나와 동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성경에도 예수님께서 동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예수님과 동행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눅 7:11)
생각해보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따라다니는 것이 예수님과의 동행이겠는가, 아니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것이 예수님과의 동행이겠는가? 예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섬긴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섬긴다는 것은 예수님 계신 곳에 함께 있는 것이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요 12:26)
그렇다면 이제 더 이상 내가 가는 곳에 예수님께서 따라오신다는 생각을 하지 말자. 자기중심적인 신앙으로는 예수님이 자신을 위하여 존재하시는 것처럼 생각하겠지만 자기가 다 결정해서 계획을 세워놓고는 하나님께 따라오라고 하지 말자. 그런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수가 없다. 물론 신앙이 어릴 때에는 들어주실 때도 있다. 하지만 주님과의 동행을 생각할 수 있는 신앙이 되면 이제는 예수님을 섬기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섬긴다고 할 때 내가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임을 잊지 말자.
담대함은 우리가 주님과 동행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주님과 동행하기 위해 주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는 담대함을 주실 수가 없다. 그리고 그렇게 담대함을 얻지 못하면 담대함으로 인하여 주어지는 하늘의 큰 상을 받을 수가 없다. 물론 우리가 단순히 상을 얻기 위해서 충성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음으로부터 충성하면 하늘의 상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다. 육신을 입고 있는 인간으로서는 자신의 힘만으로 하늘의 상을 받을 수는 없다. 주님과 동행할 때 주시는 담대함이 있어야만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주님과 동행해도 오는 고난
그런데 주님과의 동행에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주님과 동행해도 우리에게는 문제나 고난이 닥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 집은 원래 불신가정이었으나 외삼촌이신 황찬규 목사님으로 인하여 어머니가 먼저 믿게 되었고, 그리고 우리 3남매들이 믿게 되었는데, 삼촌과 고모님들은 여전히 불신 상태였다. 어머니께서 친척들을 만날 때마다 예수님 이야기를 하면서 교회에 다닐 것을 권면하시니까 작은어머니들과 고모님들이 우리 가족을 삐딱하게 보셨다. 그래서 우리 가정에 좀 어려움이 생기거나 아픈 일이 생기면 약간 빈정거리셨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왜 아플까요? 하나님이 지켜주신다면서 … ”
기독교에 대해서 부정적인 사람들 가운데는 이런 시각을 가지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었다. 그런데 교회에 다니면서 열심히 믿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이런 시각이 강했었다. 그래서 예전에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도 잘 살아야 되겠더라고요. 못 사니까 본이 안 되어 전도가 안 돼요.”
그래서 더 열심히 돈을 벌고 더 큰 (축)복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았었다. 부흥사들도 강단에서 설교할 때에 이런 이상한 논리로 성도들을 부축이곤 하였다.
하지만 기독교 신자가 못살아서 전도가 안 될까? 그렇다면 오늘날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시부터 초대교회를 지나면서 대부분의 성도들은 어려운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못살고 박해받고 쫓겨 다니던 사람들이 그런 시절을 거치면서 오히려 기독교는 확산되지 않았던가?
어느 정도로 확산되었느냐 하면 로마 황제가 기독교를 인정하고 나중에는 국교로까지 선포하지 않았던가? AD 313년에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로마의 종교 중 하나로 인정하였고, AD 380년에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포하지 않았던가? 물론 그 후에 복음이 종교에 갇혀버리게 되었지만, 초기 복음은 복받았다고 전도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주님과 동행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술술 잘 풀리고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주님과 동행할 때에 더욱 문제가 많이 생길 수 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동행하신 채로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를 건너던 중에 큰 풍랑이 일었다. 그리하여 배에 물이 가득 찰 정도까지 되었다. 평생을 바다에서 살았던 제자들조차 겁에 질릴 수밖에 없는 강항 풍랑이었다. 오죽하면 제자들이 이제는 죽었구나 하면서 고물에서 주무시던 예수님을 깨우지 않았던가?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눅 8:24上)
사도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어 가던 중에도 풍랑이 너무 강해서 살아날 여망마저 사라져버릴 정도가 되었다.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행 27:20)
여러 번 바울에게 주님께서 나타나셨지만 그렇다고 풍랑이 비껴간 것은 아니었다.
이쯤 되면 주님과 동행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주님과 동행하면 오히려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주님과 동행하면 사람들로부터 박해를 받을 수도 있다. 주님과 동행하면 세상에서 어려움을 당할 수 있다. 주님과 동행하면 사업이 망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과의 동행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주님과의 동행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무조건 기뻐할 일도 아니다. 여기에 말씀과 삶 사이에 엄청난 공간이 생겨버리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주제는 하늘의 큰 상으로 이끌어주는 담대함이다. 담대하지 못하면 하늘의 상을 바라기는 힘들다. 담대하려면 주님과 동행해야 한다. 주님과의 동행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라올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주님과 동행하면서 담대하게 이겨낸 사람에게는 하늘의 큰 상이 주어지는 것이다.
주님과의 동행 자체가 큰 상
사실 우리 성도들이 아무 것도 상 받을 것이 없다고 느낄 때조차도 우리는 큰 상을 받을 수 있다. 주님과 동행함으로써 담대함을 얻고, 그 담대함으로 세상과 싸워 이길 때 하늘에서는 큰 상이 주어진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주님과 동행하는 것 자체가 이미 큰 상이라는 사실이다. 주님께서 내 곁에 오셔서 나와 동행하신다는 개념이 아니라 내가 주님 곁에 따라다니면서 동행한다는 개념을 가지고 주님 곁을 떠나지 않고 모든 고난을 이겨내는 것 자체가 큰 상이라는 것이다.
성경에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지만 누구보다도 더 큰 상을 받은 사람이 나타난다. 에녹은 별로 한 일이 없지만 하나님과 동행함으로써 산 채로 천국에 들려올라간 사람이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4)
하나님과 항상 동행하다가 결국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것이었다. 하나님과 얼마나 동행하였는지 알 수 없지만 에녹은 삶의 현장에서 언제나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창 5:22)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한 일이라고는 자녀들을 낳은 것밖에는 없는 듯하다.
물론 그것 밖에 없는 것은 아니다. 유다서에 보면 거짓교사들에 대하여 에녹이 예언한 것을 볼 수 있다.
“아담의 칠대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유 1:14-15)
지금 에녹이 한 일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동행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생활하는 과정 중에 수많은 문제와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에게 주어진 상은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에 간 것이었다. 이것보다 더 큰 상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데 성경에는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또 한 사람이 등장한다. 북이스라엘 여호람 왕 때 엘리야는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왕하 2:11)
엘리야는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설명 없이 산 채로 하늘로 올라갔다.
하지만 그의 제자 엘리사가 엘리야의 능력을 이어받아 겉옷으로 물을 쳤을 때 물이 이리저리 갈라지는 것을 보고 다른 제자들이 한 말에서 엘리야가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맞은편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제자들이 그를 보며 말하기를 엘리야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엘리사 위에 머물렀다 하고 그에게로 나아가 땅에 엎드려 그에게 경배하고”(왕하 2:15)
그러니까 엘리사에게 하나님께서 항상 성령님으로 동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엘리야가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에 간 것도 하나님과 동행에 대한 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담대함이란 하나님과 동행할 때 겉으로 가장 잘 드러나는 증거인데, 그 담대함이 이 세상과 자신과 싸워서 승리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고 그 승리가 하늘의 큰 상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꾸로 말해서 만약에 담대함이 없다면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는지 뒤돌아보아야 하는 것이다. 물론 담대함이 꼭 겉으로 용감하고 대답하고 활기차고 씩씩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조용한 담대함, 신중한 담대함, 거룩한 담대함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말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필요할 때 필요한 태도를 명확하게 드러낸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님과의 동행이 어떤 것인가를 더 정확하게 설명해 주셨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심지어 예수님과의 동행은 목숨조차도 아까워하지 말아야 할 때가 있음을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눅 9:24)
이만큼 주님과의 동행을 확신하지 않으면 담대함은 생길 수 없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 14:26)
우리의 삶은 이 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쉽게 말하면 이 땅에서의 삶은 저 하늘에서 주님과 영원한 동행을 누릴 수 있게 하는 훈련의 장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항상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주님이 계신 곳에 우리가 가서 주님과 동행해야 한다. 주님이 바라보시는 곳에 우리가 가 있어야 한다. 주님이 원하시는 곳이라면 여건이나 조건이 어렵더라도 박해가 있더라도 그곳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길에 그 어떤 문제나 고난이나 역경이 닥친다고 해도 우리는 결코 주님의 손을 놓지 말고 오히려 꽉 붙들어야 한다. 그렇게 우리가 주님과 동행할 때에는 어려워도 힘들어도 담대하다. 곤란을 당해도 담대할 수 있고 실패해도 기죽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길은 주님의 길이기 때문이다. 어찌하든지 주님과 동행하려고 애를 쓰자. 그리고 담대하게 우리의 갈 길을 열심히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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