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편에 서기

관계 2 : 마음과 뜻을 다하여

김완섭 목사 2017. 11. 2. 11:29

2) 하나님과의 관계 1 : 마음과 뜻을 다하여

 

그렇다면 하나님과 사람은 과연 어떤 관계일 때가 가장 바람직할까?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일 때 가장 행복하게 되는 것일까? 행복이라는 단어 자체가 기분 좋음, 만족감, 평안함 등의 감정과 관련되어 있기는 하지만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행복이란 온전히 채워진 느낌이라고 하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만족감, 기분 좋음 등의 감정이 곧 행복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인간다움으로 꽉 채워졌을 때가 가장 행복할 때라고 할 수 있다.

 

인간다움이란 일반적으로 사람다운 사람, 온전한 사람답게 행하는 것을 뜻하지만 기독교 신앙에서는 인간의 근원에서부터 원래의 것으로 채워지는 것,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지만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버려진 것을 다시 회복하고 채워진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단순히 도덕적이고 인격적이고 성실하고 순수한 그런 온전한 사람으로서의 의미와 더불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친밀한 교제가 가능한 사람의 모습이 참다운 인간다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들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세워졌을 때 우리는 그것을 행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행복에는 외적인 환경이나 조건보다 더 근원적인 조건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형성되어 있으면 다른 외적 조건들은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내면을 채워야 한다면 원래 가지고 있던 내용이 채워질 때가 가장 정상적이다. , 본질이 채워질 때 비로소 인간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가장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세워져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채워지지 못했을 때 우리는 실패하고 낙심하고 두려워하고 염려한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지속될 때에는 그런 두려움이나 염려가 다 사라진다. 세상에서의 실패나 다른 사람들의 평가나 자기 내면에서의 열등감은 다 사라진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최대의 관심이 하나님과의 관계여야 하는 이유이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이고 유지되는 것일까?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자신도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 세상에서의 성공과 하나님 안에서의 승리는 많이 다르다.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세상에서의 실패가 하나님 안에서의 승리로 열매 맺게 되어 있다. 예수님을 잘 믿으면 세상의 가치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승리는 영원한 것이며 저 하늘나라에서 영원토록 하나님과 복락을 누리는 승리이다.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승리이며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승리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식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대해서는 성경에서 여러 번 확실하게 말씀해주셨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6:5)

예수님은 더 확실하게 관계를 설명해주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12:30)

하나님과의 관계는 성도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정말로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 만약에 이러 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의 구원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아니, 그 이전에 사람으로서 정말 하나님을 그 정도로 사랑할 수 있기는 한 걸까?

 

여기에 대한 대답도 부모와 아이의 관계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물론 평상시에 부모와 아이가 서로 목숨을 다해서 사랑해야지 하고 생각하는 경우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아이를 위해 목숨까지라도 버릴 수 있는 존재이다. 아이는 잘 알지는 못하지만 부모를 떠나면 죽을 줄로 아는 것이 정상이다. 이 때 아이에게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까?

너는 네 엄마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서 사랑해야 하는 거야.”

이렇게 설명한다고 아이가 그 뜻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아이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엄마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은 그런 것이다. 어떤 의무감이나 책임감 같은 것으로 서로 짐을 지우는 관계가 아니다. 그런 설명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못해도 마음으로 몸으로 생각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이와 같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그냥 사랑하는 것이다. 나에게 영적 생명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나에게 하나님이 영적 아버지라면 나는 그냥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서 사랑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성경에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것은 우리들에게 그 의미를 가르치시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무엇을 주고받거나 무엇을 바치고 베풀거나 시키는 대로 행해야 하는 관계가 아니다.

 

물론 그런 일들이 많이 있다. 드리는 것도 있고 의무적으로 행해야 하는 일도 있다. 그리고 무엇을 깨닫거나 받은 은혜를 따라 행했을 때 보상도 주어진다. 저 하늘에서뿐 아니라 이 땅에서의 삶에서도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무엇을 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부모와 아이의 사랑처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사랑의 행위인 것이다. 겉으로 보면 행함에 따른 보상처럼 단순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보상체계가아니라 사랑의 시스템인 것이다. 그런 시스템 안에서는 행하는 모든 것이 사랑의 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런 체계 안에 들어가면 의식하지 않더라도 마음과 뜻과 힘과 목숨을 다해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관계는 마음으로부터 출발한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하인의 중풍을 믿음으로 고친 백부장을 칭찬하셨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8:10)

귀신들린 딸을 위해서 개 취급 받는 일도 마다 않은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15:28)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여인에 관해서 예수님께서 칭찬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26:13)

하나같이 어떤 일을 행한 다음, 어떤 말을 한 다음에 주시는 칭찬이었다.

 

야고보 사도는 이와 똑같은 말씀을 주셨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마친 후에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2:21)

여리고성 점령 때 라합도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2:25)

그러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구원이 없는 믿음일 수 있다고 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2:14)

한국교회의 부패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믿음과 행함에 관한 논쟁들이 자주 오르내리고 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는데, 믿음을 가졌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행함을 강조하여 행함이 따르는 믿음을 보여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믿음과 행함은 하나이다. 믿음 따로 행함 따로 있을 수가 없다. 비록 어떤 행함 뒤에 칭찬이 있었고 의롭다 함의 선포가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믿음과 행함을 따로 떼어놓는다면 그 두 가지 모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는 여기에 마음을 다하고라는, 일종의 전제조건이 들어가는 것이다. 믿음의 통로가 마음이며, 마음으로 흘러들어가서 행함이라는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행함의 결과로서의 외적인 열매가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행함 자체가 믿음의 열매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어지게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마음이라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아브라함도 라합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백부장도 수로보니게 여인도 향유를 부은 여인도 행함으로 칭찬을 받았다. 이것만 보면 어떤 행위의 결과로 칭찬받은 것 같지만 예수님이 보시는 것은 그 안에 들어있는 마음이라는 것을 알아야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16:15)

사람은 사람의 마음을 다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신다. 인간관계에서도 마음이 가장 중요한 요소이지만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이 마음이 가장 중심이 된다.

 

이러한 이야기는 동일한 행함에 대해서도 주님의 판단은 전혀 달라지는 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주님은 믿는 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16:17)

그런데 주님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한 사람들을 책망하신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7:22-23)

주의 이름으로 귀신까지 쫓아낼 정도면 믿음이 아주 좋은 사람인데 왜 책망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 예수님은 그 이유를 불법을 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불법을 행한다는 것은 무슨 말씀일까?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동일한 책망을 내리신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23:27-28)

예수님은 이 불법에 대해서 더 정확하게 말씀해 주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23:23)

한 마디로 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외면하고 이 땅에서 행하는 모든 위선적인 행위가 불법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마음, 주님의 마음을 모르면 일평생 신앙생활을 하고도 지옥으로 떨어질 수 있다.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혼인잔치 비유가 나온다. 초청받은 사람들이 아무도 오지 않자 임금은 종들을 시켜서 길거리에 있는 사람들까지 다 불렀다. 많은 사람들이 왔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은 예복을 입지 않고 덜렁덜렁 따라왔다. 그러자 임금은 이 사람을 향하여 심하게 나무란다.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22:12-14)

 

이 사람은 임금의 잔치에 초청받을 만한 자격이 되지 않지만 길거리에 있다가 임금의 종에게 청함을 받았다 얼마나 황송한 일인가? 그렇다면 그는 궁궐의 예식에 맞을만한 예복을 빌리거나 기워서라도 입고 가야만 했다. 그런데 그는 아무 생각 없이 궁궐에 들어갔다. 이 사람의 잘못은 무엇인가? 겉으로는 예복을 입지 않은 것에 대한 책망이었지만 책망의 내용은 그 사람의 마음이 합당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주님은 행함이 없다고 책망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기 때문에 책망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서 찾으시는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구약으로 돌아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 40년 동안 이끄신 것은 결국 무엇 때문이었을까?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8:2)

그것은 이스라엘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였다. 백성들을 시험하시는 목적은 백성들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였다. 아니,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을 간절하게 찾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고난도 주시고 역경도 주시고 보상도 하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이다.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17:3)

결국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가장 우선되어야 할 전제조건은 바로 마음인 것이다. 이것을 모르고 신앙생활을 하면 그것은 생명 없는 겉껍데기이며 종교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무엇이 아쉬우셨을까? 무엇 때문에 그토록 이스라엘의 마음을 얻으려고 하셨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낳으셨기 때문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2:7)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빠가 되시기 때문이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4:6)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을 얻으려고 애를 쓰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아니시라면 우리의 마음을 그렇게 돌리시려고 애를 태우실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면 아무리 성경을 기가 막히게 해석하고 성경 전체를 외우고 신학적인 논리가 완벽하다고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마음을 감찰하시느니라”(21:2)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온 힘을 다하여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면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아시고 우리의 마음을 따라 역사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마음을 우리에게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시는 것이다.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24:7)

 

그리고 온 마음으로 주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온갖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다.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위로 하늘과 아래로 땅에 주와 같은 신이 없나이다 주께서는 온 마음으로 주의 앞에서 행하는 종들에게 언약을 지키시고 은혜를 베푸시나이다”(왕상 8:23)

그리고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게 되어 있다.

솔로몬이 마음을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진노하시니라”(왕상 11:9)

하나님은 순전히 우리의 마음을 따라 일하신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마음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아무리 큰 일을 해도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과 관계없는 사람일 뿐이다.

 

호세아 선지자의 말씀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힘써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6:3)

여호와를 알아야 하는데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도록 애를 써야 한다. 무엇을 하라거나 하지 말라고 하셨다면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 우리를 향하신 마음은 무엇일까를 알기 위해 애를 써야 한다.

 

말씀묵상은 왜 하는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이다. 예배는 왜 드리는가? 하나님의 마음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이다. 찬양은 어떻게 하는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찬양할 수 있어야 한다.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하자.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하나님을 느낄 수 있도록 하자. 그렇게 하면 외적인 열매도 나타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크게 기뻐하시는 신앙인이 될 것이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자.

 

관계는 신뢰이다.


성도가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면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뜻을 세우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으면 그 다음 단계는 하나님을 사랑할 계획을 세우는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음을 다하고다음에 뜻을 다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6:5)

과연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뜻이라는 말은 자기 의지(意志)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뜻을 다한다는 것은 뜻을 세우고 그 뜻을 끝까지 감당하기로 마음먹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서울역에서 45일 동안 노숙해본 적이 있다. 노숙체험을 해본 것인데, 왜 하필 노숙체험을 하기로 뜻을 정한 것일까? 우리에게는 노숙자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고, 그래서 노숙을 해본다는 것은 어떤 특정한 목적이 있을 때 행해질 수 있는 것이다. 인터넷을 찾아보니까 신문이나 방송에서 취재를 위해 노숙한 사람들이 이야기가 있었다. 아니면 교회 청년회에서 신앙적 경험을 위해 노숙한 기사도 나온 것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여러 명이 단체로 와서 단순히 노숙을 경험한 것이었다. 그런 일도 귀한 경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나는 교통비 외에는 일체의 돈이나 카드 등을 가지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만 의지하면서 5일 동안 지내보고자 한 것이었다.

 

왜 하필 노숙체험을?”

별난 사람일세. 꼭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특이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치부해 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나로서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더 가까이 이해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더 잘 알기 위해서 노숙을 택한 것이었다. 물론 하나님의 마음을 부분적으로는 이해하고 있었고 누구보다 하나님을 마음으로 섬기기를 원하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현대사회의 특성상 하나님과 더 가까이 할 수 있는 환경이 삶에서 거의 사라졌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신앙이 교회 안의 전통적인 종교생활 가운데 갇혀버린 듯한 것도 사실이다. 그리하여 자신이 중심이 되고 하나님은 언저리에서 도와주는 분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깰만한 어떤 도구, 과정이 필요했던 것이다.

 

어떻게 하면 관념적인 신앙, 추상적인 신앙에서 벗어나서 생명력 있는 신앙을 살 수 있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따라가는 일에 헌신할 수 있게 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 중심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세상 속에서 살아가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사람들에게 영적 감화력을 끼치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수 있게 할 것인가?

 

그리하여 나는 오랫동안 거기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어떤 강한 체험을 통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살아계신 하나님을 다시 느낄 수 있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신앙생활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하면 자기중심적인 신앙에서 하나님중심의 신앙으로 개혁할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하고 또 생각한 결과가 노숙체험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물론 노숙체험이 전부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다만 여러 과정이나 프로그램 중에서 탁월한 선택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가정 먼저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수 있도록 효과적으로 행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일 것이다. 자신이 최선을 다해 행할 수 있도록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궁리하고 생각하고 고민하다가 다른 사람이나 책을 통하여 정보를 얻기도 하고 그것이 인간적인 수단이 되지는 않을까, 하나님께서 과연 역사해 주실까 연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많이 드리게 될 것이다. 그 일에 대해 중요성을 인식할수록 기도는 더 많이 나올 것이다. 가장 최우선적으로 그 일을 생각하게 되면 그것은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노숙체험을 결행하게 된 것도 이런 과정을 거쳤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

 

그런데 이런 과정을 거쳐 뜻을 다하여 최우선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을 하고자 한다면 하나님을 향한 절대 신뢰라는 전제가 반드시 필요하다. 말하자면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밑바탕에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않으시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굳건한 신뢰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혹시 하나님께서 나를 잊어버리시거나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다면 그는 절대로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그분을 향한 절대적인 신뢰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이 믿음은 여러 가지 형태나 단계로 나타날 수 있다. 믿음이란 예수께서 우리의 구원자 되심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동정녀 탄생으로 죄 없이 이 땅에 오신 것과 십자가에 못 박혀 물과 피를 다 쏟으심으로써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주신 것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리고 우리 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에 대하여 승리하였다는 사실을 굳게 믿는 것이 믿음이다.

 

하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에 그친다면 그것은 온전한 믿음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온전한 믿음이란 성화된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믿을 뿐 아니라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인식하게 된 것을 말한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하심이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이다.

 

그런데 이것을 마음으로 단지 인정하는 것으로는 충분한 구원이 일어났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이 일어나야 한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그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 외에는 결코 돌아보거나 찾지 않는다는 전제조건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이가 부모를 선택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인정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기만의 방식을 찾아서 뜻을 세운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다는 말을 많이 듣지만 사실은 하나님도 우리를 신뢰하실 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고 보여드릴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것에 대해 분별할 수 있어야 하겠다. 만약에 40일 금식기도를 하기로 했다고 하자. 정말로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40일 금식기도를 작정한다면 그것은 최상의 모습이다. 하지만 사업을 위해서, 교회부흥을 위해서, 교회당 건축을 위해서 40일 금식기도를 작정한다면 그것은 어쩌면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것이 아니라 뜻을 다하여 자기 목표를 달성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 물론 거룩한 사명을 위해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라고 스스로 믿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과의 교통이나 하나님의 마음과 관계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40일 금식기도를 살펴보면 그 의미가 더 정확해진다. 예수님의 금식기도는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는 기도였다. 예수님의 40일 금식기도도 사명을 위한 기도인 것도 맞고 거룩한 목적을 위한 기도인 것도 맞지만, 예수님의 40일 금식기도는 채찍질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위한 금식기도였다. 예수님의 40일 금식기도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데에다가 목숨까지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기도였다. 40일 금식기도를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꼭 그렇게 해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도 물론 아니다. 다만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 가운데에서 온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자는 것이다.

 

내가 노숙체험을 택한 것도 지금 현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상의 표현이 무엇인가를 오랫동안 궁리하다가 얻어낸 한 가지 방법이었다. 일시적이지만 정말 나의 모든 조건을 다 버리고, 내려놓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과정 중에서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보실 것이며 어떤 말씀, 깨달음을 주실지 기대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과정을 다 보낸 후에 하나님은 나에게 너무나도 큰 은혜를 쏟아부어주셨다. 성경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는데, 말씀이 살아서 내 앞에 벌떡 일어서는 것 같았다. 예수님의 말씀이 정확하게 이해되고 느껴지는 부분들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느끼게도 해 주셨다. 한 번의 노숙체험은 5, 10년 이상의 신앙생활에서도 결코 얻을 수 없는 은혜를 깨닫게 해주셨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할 수 있어야 한다. 일평생 매일같이 그렇게 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우리가 어느 순간 선택해야 할 때에 어김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힘들고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겠지만 그러면서도 아주 자연스러운 결단이 되어야 할 것이다. 무엇을 바라거나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식이 된다는 것이다.

 

뜻을 다한다는 말에서 다한다는 말을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뜻을 최우선순위에 두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가치기준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고려해야 할 무수한 조건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을 가장 먼저 적용해야 할 기준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손해가 아니라 참된 복이 되고 하나님과는 더욱 친밀한 관계를 가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인생을 가장 행복한 존재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