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복음서 2독을 마치면서
더 중요한 일과 덜 중요한 일
세상소식을 끊고 예수님께만 집중하려고 결단한 후에 하루하루를 은혜 안에서 보내고 있습니다. 사복음서를 정독하면서 순간순간 느끼거나 주의가 가는 부분을 정리하고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나름대로 정해놓은 책도 읽고 목표로 한 글쓰기도 계속 하려고 했는데, 마음먹은 대로 잘 안 되고 오히려 3시간씩 성경을 읽는 일이 주요 일과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다 보니 마음먹은 책읽기와 글쓰기가 진척되지 않음으로 인해 작은 담담함이나 조금함이 느껴질 때가 있었습니다.
사실 사복음서를 읽으면서 느껴지는 부분은 수시로 메모해놓지만 메모해 놓은 내용을 문서로 정리해야 그것이 제게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하루나 이틀 치를 정리하게 되는데 정리하면서 계획된 책읽기나 글쓰기가 잘 안 되고 있는 것에 대해 마치 손해 보는 것 같은 느낌일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실은 책읽기나 글쓰기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말씀에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목표를 정해 놓았다는 것 때문에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하면서 손해 보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이 바로 이런 함정에 빠지기 쉽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제게 가장 중요한 일이 과연 무엇인가, 왜 이런 기획을 하였고 어떤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있나 등과 같은 것들을 생각해볼 때 목적은 책읽기나 글쓰기가 아니라 하나님께 집중하기였습니다. 기도원에 들어가서 세상 소식 끊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일상적인 삶 가운데에서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여 세상에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 마음이 조급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아니라 저의 자기중심적인 생각일 뿐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제가 목회하는 동안에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고 확인하여 계획을 세우고 추진해 나가지만 대개의 경우 하나님보다 한 발 앞서가는 저를 발견하기 일쑤였습니다. 물론 순간순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고 진행해 나가지만 그 속에는 저의 욕심이 앞서 있었던 것을 고백합니다. 먼저 앞장서 가다가 사역이 잘 안 풀리는 것 같을 때에는 조급해지고 답답해지고, 그러다가 지쳐서 포기하고 싶을 때가 되고 그러면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저 자신을 심히 원망하고 자책하곤 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따라 완벽하게 보조를 맞추어가면서 일이 잘 풀리든 안 풀리든 기쁨과 평안을 유지하는 사역자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식으로 사역을 잘 하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언제나 그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역자이든 평신도이든 하나님의 일을 해나가면서 이런저런 경험을 쌓고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구축하면서 하나님을 더욱 믿고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모든 매스컴을 끊어보니까 뭔가 가슴을 꽉 막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처음에는 남는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까 고민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하루 전체 시간을 쉼이 없이 하나님께만 집중한다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사실도 발견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사람은 하루 종일 하나님께만 집중할 수 없게 만들어졌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특수한 상황에서는 그것이 어느 정도 가능하겠지만 사람들 속에 섞여 있으면서 세상 소식을 완전히 끊고 하나님만 바라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인 것 같았습니다.
처음에는 이 이야기를 들은 분들이 아예 사람도 안 만나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일 때문에든지 그냥 교제를 위해서든지 만나야 하는 사람은 만났고 함께 식사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되도록 여행이나 장거리 이동 같은 것은 피하려고 했지만 둘째 사위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에는 김천까지 내려갔다 오기도 했습니다. 취미도 되도록 자제했습니다. 전에는 일을 하다가 간혹 지칠 때면 다운받아 놓은 영화를 보기도 했지만 이번에는 영화는 한 번도 본 일이 없습니다.
세상소식 끊기의 가장 핵심적인 대상인 매스컴에 관해서는, 간혹 식당 같은 곳에서 켜져 있는 TV나 집으로 갔을 때 잠깐 켜있는 TV가 눈에 들어올 때도 있었습니다만, 되도록 쳐다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스마트폰은 와이파이 끊고 데이터 끊어버리니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습니다. 일반 전화나 문자 메시지만 볼 수 있었습니다. 인터넷은 선을 분리해버렸지만 중요한 메일이나 은행거래를 위해 일시적으로 연결하여 사용하곤 했습니다. 이 정도면 세상 속에서 소식을 끊어버린 것 맞죠?
그리고 성경을 읽은 나머지 시간에는 미리 정해둔 책 몇 권을 읽어 내려갑니다. 얼마 전부터 집에서 틈틈이 읽어나가고 이는 책들이 있는데 주로 ‘역사적 예수’라는 연구에 동의하는 분들의 책들입니다. 이분들은 성경에서 나오는 천지창조나 기적들을 대체로 믿지 않으며,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나 육체적 부활도 믿지 않는 분들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지상에서 소외받는 사람들은 주로 일부 악한 사람 때문이 아니라 잘못된 체제, 즉 가진 자들 중심의 체제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그 체제를 변혁시켜야 한다는 주장하는 분들의 책들입니다.
보수기독교인들은 거의 읽지 않는 이런 책들을 선택한 이유는 우선은 왜 저런 주장들을 하는지 그 이유나 목적을 구체적으로 알고 싶었기 때문이며, 다음으로는 저들의 주장에 대해 나는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는가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저는 진보적인 단체에서 여는 제자훈련도 받아보았고, 포럼에도 가 보았던 것입니다. 왜 하필 사복음서 8회 읽기를 시도하면서 그런 방향의 책을 읽어야 하느냐고 질문을 한다면 저는 더 확신을 얻고 방향성을 확인하고 싶어서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제 입장은 신학은 보수적인 신앙,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고 천지창조와 재림 예수님을 믿으며, 종교다원주의를 반대하고 체제전복적인 입장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보수 기독교가 오직 믿음이라는 구호에서 벗어나 이 세상에서 할 일을 더욱 많이 찾아서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일에 헌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신학은 보수요 행동은 사회참여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믿음은 교회 안에서는 참으로 유용하지만 비신자들은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우리들의 행동으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애를 쓰지만, 그리고 저도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저들의 말처럼 목적이 아니라 복음을 더 널리 확장하고 사람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반적인 보수 신앙인들과는 달리 저는 교회가 세상을 위해 할 일을 찾아 주도적으로 실천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산상수훈은 바로 그런 공동체의 실현을 위한 행동지침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무튼 요즘 이런 책들을 조금씩 읽으면서 저들의 주장을 적어도 이성적으로는 이해하려고 애를 쓰면서, 그리고 그런 결론에 도달하게 된 과정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그러나 그리스도 신앙으로는 왜 그런 일들을 할 수 없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현재 위기에 닥쳐있는 교회를 어떻게 하면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을까에 대해서 오래 동안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교회가 세상에서 할 일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면서, 그렇다면 이제는 기독교인들이 실천적인 영성을 가지기 위해 가르치고 훈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실천 프로그램 중의 하나인 세상소식 끊고 사복음서 새로읽기 프로그램을 만든 것입니다.
물론 이것 한 가지만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 프로그램에서 경건서적을 읽거나 글쓰기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것이 사복음서 새로읽기라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이 시도가 실천적인 영성으로 이끄는 출발점이 되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제가 사복음서를 두 번 읽으면서 참 은혜를 받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사복음서만 반복해서 읽으니까 예수님의 실제적인 의도가 어느 정도 느껴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설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묵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하게 겉으로 드러나는 전체적인 목적을 어느 정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말씀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매주 단편적인 설교를 듣거나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더 가까이하는 분들은 묵상 혹은 큐티로 한 부분의 말씀을 뿌리까지 깊이 쪼개기도 합니다. 굉장히 중요한 일들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깊이 있게 성경을 살피다가 보니까 전체적인 모양에 대해서는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게 됩니다. 말하자면 산의 전체적인 모습을 모르면서 지금 우리가 산의 어느 부분을 가고 있는지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길을 잃기 쉽겠죠. 그렇다고 성경을 창세기부터 혹은 마태복음부터 통독하면 어떻겠느냐고 하지만 통독으로는 산의 모습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들 것입니다. 아주 거대한 산을 한눈으로 죽 훑어보는 것만으로는 실체를 알기 힘들 것입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제가 성경을 어느 한 부분, 지금은 사복음서만을 반복해서 읽다가 보니까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효과를 알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읽기는 산의 전체적인 모습을 구체적으로 알게 될 뿐만 아니라 여태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부분들까지 구체적으로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복해서 읽다 보니까 구석구석 흩어져 있는 내용들을 빠짐없이 읽을 수 있게 되고 이런 말씀도 있었나 하고 놀랄 때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복음서를 8회 반복해서 읽고 나면 교회의 전통이나 신학에 가려져 있는 본질적인 진리에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을 분별하는 능력만 있어도 우리는 훨씬 더 예수님과 가까운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우선순위를 잘 파악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훨씬 실수가 줄어들고 시행착오가 거의 사라지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렇게 수십 년 신앙생활을 하고 목회를 했으면서도 또다시 새롭게 발견하고 깨닫게 되는 저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인도하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아직 답답함과 조급함이 많이 남아 있지만 성경읽기가 거듭되면서 이것도 많이 줄어들고 나중에는 성경을 읽으면서 행복을 맛보게 되지 않을까 상상해봅니다. 무엇이든지 끝까지 해야 그 의미를 밝히 알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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