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복음서 반복읽기

사복음서 3독후기 : 세상 속에 갇혀서

김완섭 목사 2017. 11. 2. 11:26

사복음서 3독을 마치면서

세상 속에 갇혀서

      

이제 세상 소식 끊은 지 11일이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하루 종일 다른 데 가지 않고 제 사무실에만 있었습니다.

점심 때 식당에 간 것과 오후에 파리약 사러 약국에 간 것 외에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인터넷도 안 보고 TV도 안 보니 일반적인 뉴스 한 줄 조차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치 세상 속에 만들어놓은 감옥에 갇혀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요즘은 감옥에서도 TV 등을 볼 수 있어 바깥소식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무 것도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않기 때문에 거의 고립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세상 소식 끊고 오직 하나님과 지내보겠다고 했지만 답답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차라리 기도원에 들어가면 힘이 덜 들 것 같습니다.

성경에 세례 요한이 옥에 갇혔습니다.

아마 바깥소식은 그의 제자들을 통해서 간혹 전해 듣는 것이 전부였던 듯합니다.

감옥에 갇혀있다 보니 요단강에서 사람들에 회개하라고 외치면서 세례를 베풀 때와는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토록 자신 있게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라고 외쳤던 요한이었지만

제자들을 통해 전해만 들은 세상 소식에 많이 답답했던 듯합니다.

그래서 지금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세상에 당신의 왕국을 세워야 하실 것 같은데

환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선포하고 가르치시는 일만 계속하시니까

갇혀있는 세례 요한으로서는 그의 확신이 다소 희미해졌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서 질문을 합니다.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11:2-3)

그러자 예수님께서 여기에 대해 대답해주십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11:5)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면 너무나도 분명하게 알 수 있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세상 속의 감옥에 갇혀서 영적 분별력이 떨어진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저의 경우는 어떨까요?

하루 종일 복음서를 읽으면서 받은 은혜를 간단하게 메모했다가 정리하고 경건서적이나 참고가 될 만한 자료들을 찾아서 읽어보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애를 쓰는 일이 하루 일과입니다.

나라의 속사정이며 경제의 내용 같은 것에는 짐짓 관심을 끄고 삽니다.

그러면 저절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내적인 기쁨과 평안이 저를 지배해야 하는데

사실은 몹시 답답하여 자꾸 세상에 관심이 가는 것은 저도 어찌할 수 없습니다.


물론 한시적으로 하나님께 집중하기 위해 스스로 만들어낸 프로그램이지만,

그리고 생업이 있다든가 사역을 하는 중에 이 프로그램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 프로그램에만 집중하다 보니까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원래 직장이나 생업이 있는 분들이 생활 속에서 하나님께 집중하는 훈련의 성격이었습니다.

제가 오히려 특수한 상황에서 이일을 하는 중이라서 더 힘들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속에서 산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께 집중하기가 쉽지 않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세상 소식을 끊고 하나님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여보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야 복잡다단한 세상살이 가운데에서 세상의 흐름에 흘러가지 않고 그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는 힘을 얻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오히려 세상 속의 감옥에 갇힌 듯한 느낌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생활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런 경험을 해보지 않고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또한 그런 경험이 없이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을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은 자신이 직접 체험해본 것 이상은 성장할 수는 없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또는 머리로 생각하기에는 내 신앙이 성장한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막상 신앙현실에 부딪치면 튼튼해보이던 믿음이 여지없이 깨져버리지 않겠습니까?


사실 세끊사새’(세상소식 끊고 사복음서 새로읽기) 프로그램 말고 정말 획기적인 방법이 있기는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행하셨던 것과 똑같은 방식대로 1년 정도 살아보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어느 외국인 청년이 예수님 시대와 동일한 복장을 하고

예수님처럼 한 달 동안인가 살았던 경험이 기사화되어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가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모든 언행을 따라서 해 보았다고 해서 정말 그 당시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만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도 그런 도전을 통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고

성경을 읽을 때 말씀 속에 들어간 것 같은 감동을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신앙의 모습을 무엇으로 표현하면 좋을까요?

마치 연극을 관람하는 관객들과 같은 입장에 서 있는 것이 오늘날의 기독교신앙이 아닌가 싶습니다.

무대 위에서는 여러 배우들이 연습한 대로 연기를 잘 하고 있습니다.

극본도 훌륭하고 무대 연출도 뛰어나고 연기지도도 섬세하여

모든 구성요소들이 하나도 어그러짐이 없이 완벽한 연극을 마무리하였습니다.

관객들도 연극의 흐름을 따라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면서 많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배우들의 인사가 끝나고 연출자를 비롯하여 모든 스텝들이 나와서 함께 인시를 할 때 관객들이 감동에 겨워

다함께 기립하여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와 환호성을 질러서 한참 동안 극장을 떠나갈 듯이 울려 퍼졌습니다.


관객들은 무대에서의 감동을 잊지 못한 채 극장 밖으로 쏟아져 나와 각자 갈 곳을 향해 흩어집니다.

사람들마다 감동의 크기나 색깔이 다 다르지만 저마다 감동을 안고 집을 향합니다.

그리고 그뿐입니다.

며칠 후 혹은 몇 년 후에라도 감동 받은 그 연극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그 때 받았던 감격을 회상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뿐입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무대에 직접 올라가서 무대장치고 살펴보고 주인공이 졌던 십자가도 한 번 져보기라도 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이 마치 이런 양상은 아닌지 심각하게 되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관객으로서의 신앙은 관념적 신앙입니다.

내가 날마다 성경을 읽고, 매일같이 일정한 시간 동안 정기적인 기도를 하며,

예배에도 되도록 빠지지 않고 참여하고 있음으로 인하여 자신이 그 말씀처럼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설교나 집회나 성경 프로그램에서 많이 깨달은 것이 곧 자신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보기에, 특히 세상 사람이 보기에는 전혀 아닌데도

교회 속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 자기를 아주 믿음 좋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그런 과정이나 프로그램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좋은 프로그램들을 찾아다니면서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제 말은 그런 프로그램에서 얻은 은혜, 깨달음, 도전들을 실제로 소화할 수 있는 보다 진전된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관객으로서 연극을 평가하고 분석하고 내용 중에서 감동을 받고 벅참 가슴을 안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무대에서 연기하는 배우가 되어야 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꾸민 이야기들을 연기하는 그런 연극 자체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삶이 무대에서 펼쳐지는 연극 속의 한 배우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이라는 무대 위에서 우리는 어떤 신앙의 모습을 펼쳐 보일 수 있느냐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연출자가 되시고 미래에 우리 앞에 가져오실 진짜 무대, 곧 저 영원한 우주의 무대에서 영생할 때까지

이 땅에서 하늘나라를 연기해야 하는 그런 배우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무대는 바로 교회이고 우리의 삶의 현장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무대에 때로는 배우로, 때로는 스텝으로 들어가서 연기를 펼칠 생각은 하지 못하고

그 연극을 보기만 하면서 거기서 얻어지는 감동들이 곧 자기 신앙의 수준인 것처럼 생각하게 되는 것이 관객신앙일 것입니다.

그것이 관념적 신앙입니다.

마치 바리새인들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말씀을 많이 알고 있고 정해진 규칙을 정확하게 지키고 있으니까 자기들의 신앙수준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관념적 신앙이 살아있는 무대에서 펼쳐지는 예수님의 드라마를 수용하지 못하고 무대를 부숴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많은 이유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논할 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다시 관객들을 무대 위로 끌어올리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원인을 분석하고 목표와 방향을 제시하는 것만으로는 역부족입니다.

그런 것은 대부분 다 분석되어 있고 이미 알려져 있습니다.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 개혁은 헛될 뿐입니다.

래서 현재의 여건상 무대의 배우로까지 만들지는 못하더라도, 물론 그것이 더 큰 목표입니다만,

적어도 무대에 올라와볼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만들어 보겠다는 것이 예수체험 프로그램인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을 때 자신이 겪었던 내용과 일치되는 구절을 만나면

그 말씀은 마치 주님께서 자신에게 직접 이야기하신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실 때에는 성경을 읽어도 글을 읽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사건의 현장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읽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성경을 읽더라도 자신에게 필요하거나 불편하지 않은 범위 안에서만 읽는 것을 지양할 수 있습니다.

반복읽기가 바로 그런 효과를 볼 수 있는 성경읽기방식이 될 것입니다.

이것만 가지고 무대 위의 배우로 만들기는 힘들겠지만 적어도 무대 위에 올라와 볼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드림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도전과 은혜로써 때가 되면 무대의 배우로 올라설 날이 올 수 있을 것입니다.


한시적이지만 세상 속에서 세상을 끊고 하나님과의 교제에만 집중해보는 경험이

신실한 신앙인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필요할 것 같습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되어 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체험한 신앙인은

그 어떤 세상의 물결 속에서도 꿋꿋하게 승리하는 신앙인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주로 행해지던 신앙의 무대를 우리의 삶 속으로 옮겨와서 그 삶의 현장을 무대로 만들고

그 위에서 배우로서 우리 인생을 연기하는 살아있는 믿음의 주인공들로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성경반복읽기를 행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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