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하나님과의 관계 2 : 힘을 다하여
우리는 지금 기독교신앙의 본질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살펴보고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이루어져 있으면 세상의 어떤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진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가 지속되고 있다면 종말에 대한 어떤 미혹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바리새인들에게는 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실종되어 있었다. 그들의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이 사라지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을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었다. 종교에 빠져서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확신했었다.하나님의 마음을 잃어버린 채 아무리 완벽하게 종교생활을 해도 그것은 겉껍데기일 뿐이고 그렇게 무엇을 지키고 받음으로써 신앙생활이 이루어진다면 천국문도 열리지 않는다. 만약에 지키고 얻는 것이 기독교라면 다른 종교와 무엇이 다른가? 아니, 세상 속에서 펼쳐지는 인간사들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스도 예수님과의 관계가 핵심이다. 관계가 결핍되면 죽을 힘을 다해 열심히 노력하고 엄청난 것을 이루어내어도 모래성과 같을 뿐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한다고 아무리 외쳐도 그것은 자기의 욕심일 뿐이다. 주께서 주시는 비전이라고 포장하지만 자기 야망일 뿐이다. 물론 무조건 비판해서는 안 된다. 성공적인 목회, 놀라운 사역을 이룬 분들 중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충만한 사람이 왜 없겠는가? 사람은 겉모습을 가지고 다른 사람과 사역을 판단할 수 없다. 물론 분명하게 드러나는 경우도 많이 있을 것이다. 다만 하나님과의 관계는 당사자가 아니면 절대로 알 수가 없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하나님과의 세 가지 관계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로막는 첫 번째 현상은 교회예전에 묻히는 신앙생활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예배와 기도와 찬양과 말씀 등 교회 안의 신앙행위만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안타깝게도 신앙적 행위를 강조하다 보니까 교회생활만 잘 하면 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세상의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현상을 외면하고 오로지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몰두한다. 그러다 보니까 신앙생활을 통하여 행하는 예배와 기도와 헌금 등에만 열심을 다한다.
특히 말씀에 집중하기 때문에 말씀 속에 들어 있는 진리를 깨닫는 일에 큰 기쁨을 느낀다. 물론 기독교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말씀에 집중해야 한다. 모든 근거가 말씀이고 가치 기준이 말씀이기 때문에 말씀으로 모든 것을 분별해야 한다. 하지만 말씀을 아는 일에만 몰두하다 보면 관념적인 신앙, 추상적인 신앙에 빠지기 쉽다. 관념적인 신앙이란 자기가 아는 말씀, 듣는 말씀이 곧 자기 신앙수준이라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의 하나님과의 관계는 세상에서 행해야 하는 일들을 헌금 한 가지로 해결하려고 할 수도 있다. 성경에서 자기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했을 때 그것은 실생활에서 몸으로 부딪쳐야 하는 일인데 그것을 헌금으로 대체하려는 모습이다. 헌금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지만, 헌금으로 삶을 대신하고 복을 받으려는 모습이 된다면 하나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물질생활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헌금을 열심히 힘에 지나도록 함으로써 선교와 구제와 봉사를 대체하는 것이 교회 안에서 일반화되어 있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생활인 줄 알게 된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맞지만, 그것은 반쪽짜리 관계밖에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말씀이나 헌금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지속하기 어렵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로막는 두 번째 현상은 하나님과 친밀함을 위해서 신비 속으로 들어가려는 자세이다. 그래서 기도를 많이 하고 영적인 현상과 성령의 능력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이럴 경우에 표적 중심의 신앙생활이 되고 더 큰 증거를 찾아 헤매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을 지속함으로써만이 하나님과 가장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물론 기독교 신앙에 신비함이 없다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은사적인 모습이 없어져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것을 전부라고 생각하면 결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영적 신비현상은 정말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예언하고 방언통변하고 환상을 보고 질병을 단번에 고치는 일들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현상 자체도 얼마든지 자기 마음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고, 그리고 그러한 현상을 주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정확하게 분별해내는 일도 쉽지 않다. 영적 신비현상은 하나님의 마음을 세상에서의 삶에 투영하라고 주시는 것이다. 아무리 신묘막측한 능력을 행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에 목숨을 걸 수는 없다. 삶에 하나님의 마음이 투영되지 않으면 그냥 이상한 현상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은사가 부족한 사람들을 얕보거나 그 은사를 사용하여 누군가를 지배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알지 못하는 기독교 무당밖에 더 되겠는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로막을 수도 있는 세 번째 현상은 하나님의 마음을 이 세상에서의 행위로만 담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행하는 신앙생활보다 사회 속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한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서 사회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한다. 적극적인 사회참여를 주장하며 그것만이 진정한 이웃사랑이라고 확신한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을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생각하고 정치적인 수단을 동원하거나 실정법을 위반해서라도 하나님의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온 힘을 쏟는다. 그리고 교회 안에 안주하는 사람들에게 비겁한 사람들이라고 비판한다.
물론 타당성이 있는 훌륭한 태도이고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실천하려는 자세는 높이 사야 한다. 하지만 정말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꼭 그런 방법이어야만 할까? 그런 행동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이웃사랑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라는 말이다. 그리스도인이 실천적인 모습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데에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땅의 하나님의 나라는 저 하늘의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모델이고 과정이어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도대체 사람의 힘으로 이 땅에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있기는 한 것일까?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하나님과의 참다운 동행이란 현실에서 몸으로 부딪침으로써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말씀묵상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영적인 은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는 일도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 육신의 그릇에, 심령의 그릇에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마음이 넘치게 될 때에 비로소 그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으로 흘러들어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이해하고 나서 세상에서 신앙인의 삶을 살 때 하나님과의 마음의 교제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럴 때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이루어지고 비로소 신앙인의 온전한 모습으로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말씀과 헌금 등 교회 안에서의 활동만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다 이해할 수 없다. 거기에 실천적인 행동이 뒤따라온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진정한 마음을 깨달을 수 있다. 세상에서의 실천적인 신앙행위가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 영적인 이해가 결여된다면 그것만 가지고는 하나님의 마음 한 쪽밖에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교회 안의 신앙행위와 사회 속에서는 신앙행위만으로는 또한 하나님의 마음을 전부 알 수는 없다. 신비한 능력, 신비체험이 함께 올 때 비로소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영이시기 때문이다. 영을 영으로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영원히 알 수 없게 된다.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는 세 가지 현상을 짚어보았지만 이것은 거꾸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세 가지 요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한 가지나 두 가지만으로는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어느 한 가지만 주장하고 확신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잘 아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어느 한 쪽만을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세 가지 조건이 모두 갖추어졌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을 온전히 알고 있는 것도 아니다. 거기에다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는 모습이 자연스러울 때 우리는 하나님과 진정한 사랑의 관계에 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나님은 우리 죄인을 위하여 하나님의 목숨까지 버리셨다. 마치 그래야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것이어야 한다. 물론 억지로 감당해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러 때에라도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람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목숨을 함께하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불타는 사랑으로, 목숨을 거는 맹렬한 사랑으로 맺어진 혈육의 관계이다.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아 8:6)
관계는 의지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떤 식으로 사랑할 것인가에 대한 뜻을 세웠다면 우리는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가? 죽을 힘을 다해 견디고 참고 인내하고 완전히 지쳐 쓰러질 때까지 애쓰는 것이 힘을 다하는 것일까? 물론 갖은 노력을 다하는 것도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어떤 어려운 환경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대적자들에게 무릎 꿇지 않고 싸워서 이겨내야 한다. 우리 신앙의 열매는 전부 그렇게 이루어낸 작품들이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힘을 다하여 해야 하는 일은 따로 있다. 환경을 이기려고 힘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기 위해 힘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승리라는 열매를 거둘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번 자세하게 깊이 생각해보라. 우리가 과연 우리 힘으로 이길 수 있는 것이 있기나 한가? 우리의 싸움은 육의 싸움이 아니다. 전부 영적인 싸움, 배후에 숨어있는 사탄의 무리들과의 싸움이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우리의 능력만으로는 아무리 힘을 써도 악의 영들을 이길 수가 없다. 힘을 다해서 싸워서 이길 수가 있다면 우리의 투쟁과 노력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힘을 다해 싸워도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감당할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남겠는가? 우리가 힘쓰고 애써야 할 것은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힘이다. 이것이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이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를 생각해보자. 서로 사랑하는 사이의 가장 큰 특징은 상대방을 행복하게 해 주려는 마음일 것이다. 상대가 행복해지는 것이 자기가 행복하게 되는 길이다. 그래서 상대를 위해 희생하고 섬기고 양보하고 배려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런 현상을 자세히 생각해보면 여기에는 서로를 의지하는 마음이 깊이 숨어 있을 것이다. 물론 능력이나 경험이나 육신을 의지하기도 하겠지만 그 전에 서로에게 기대는 마음이 기본이 될 것이다. 이 상대에게 의지하는 마음이란 서로가 서로에게 100% 의지하는 마음을 뜻한다. 만약에 한 남자가 두 여자에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파고 들어올 수 없는, 완전히 서로를 의지하는 마음, 이것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일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이런 사랑의 관계이다. 흔히들 사람 쪽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면 어느 한 쪽만 다른 쪽을 의지하는 사이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의지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것도 온 힘을 다하고 목숨까지 다해서 사랑하실 정도로 사람을 의지하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하여 보낼 만한 사람을 찾고 계셨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사 6:8)
하나님의 일을 맡아서 할 사람을 찾으신다는 것은 하나님도 사람을 의지하신다는 뜻이다. 천사를 보내실 수도 있고 여호와의 영을 보내실 수도 있었는데 굳이 사람 중에서 찾으신다.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지하실 수 있도록 만든다는 뜻이다. 그것은 능력이나 물질이나 경험이나 조건에서 우리를 의지하시게 한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신뢰하고 하나님의 일을 맡기실 수 있도록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이다.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려는 마음을 믿으시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모든 일을 이룰 수 있다고 믿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믿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인내할 수 있다는 믿음을 드리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하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야 하지만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일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틀림없이 실패할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이다.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의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 하나님의 긍휼하심,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변치 않으며 영원하시다. 만약에 하나님의 성품이 포악하거나 냉혹하거나 공격적이라면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 우리가 하나님만을 힘을 다해 의지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은 사랑과 긍휼과 인자하심과 오래 참으심과 용서와 자비하심을 믿는 믿음이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시 52:8)
“우리가 주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공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니이다”(단 9:18下)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시 13:5)
그런데 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이런 성품은 영원토록 변치 않으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삼상 15:29)
하나님은 거짓이 없으시고 약속을 취소하실 수가 없으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며 목숨을 버릴지라도 의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되면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지하신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성품을 의지하는 사람을 믿으시고 하나님의 일을 맡기시는 것이다.
그리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주의 명령을 지키고 도를 행하는 것이다.
“너희가 만일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명령을 잘 지켜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모든 도를 행하여 그에게 의지하면 여호와께서 그 모든 나라 백성을 너희 앞에서 다 쫓아내실 것이라”(신 11:22-23)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도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말씀을 잘 안다고 하면서 말씀대로 행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죽은 사랑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입으로만 사랑한다면 누가 믿고 함께 사랑할 수 있겠는가? 말씀을 행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히스기야 왕은 유다 여러 왕 중에서도 하나님을 가장 크게 의지했는데, 그것은 여호와께 연합하고 여호와를 떠나지 않을 뿐 아니라 모든 계명을 지켰다고 했다. 그것은 단순히 계명을 철저하게 지킨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여호와를 사랑하며 연합하여 동행한 것이다. 이것이 힘을 다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습인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도를 따르면서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의지한 결과 히스기야는 모든 일에 형통하게 된 것이었다.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곧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매 그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왕하 18:5-7上)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는 것이다. 이름이란 존재 자체이며 성품이며 능력이며 신분이며 과거의 역사이며 미래의 실현이다. 이름은 곧 그분을 가리킨다. 여호와의 이름이 있는 곳에 여호와께서 존재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엘리야는 여호와의 이름에 의지하여, 곧 그 자리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여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 앞에서 담대하게 대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제단을 쌓고 제단을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둘 만한 도랑을 만들고”(왕상 18:32)
우리는 언제든지 어느 때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만민이 각각 자기의 신의 이름을 의지하여 행하되 오직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영원히 행하리로다”(미 4:5)
그래서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것이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행 3:6-8)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할 때에는 예수님이 그 자리에 현존하시는 것이다.
의지해야 할 것과 의지하지 말아야 할 것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말씀만을 의지하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면 상대방의 말을 귀담아 듣고 그 말을 따라 행해 주려고 할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말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작은 음성에도 반응할 것이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상대의 말을 무시하거나 말을 자르거나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의 말에 대한 마음가짐이나 태도가 바로 그 사람의 사랑의 정도를 나타내는 척도가 될 것이다. 이런 간단하지만 알기 쉬운 원리를 성도들이 망각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그 말씀을 따라 행하려고 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의지하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신 30:20)
보통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에서 가르치거나 경험하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 일예로 베드로와 동료 어부들의 경험과 예수님의 말씀은 많이 달랐다. 어부들은 어릴 때부터 부모를 따라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아왔기 때문에 고기가 많이 잡히는 시간과 장소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물고기가 다니는 길목과 시간을 물속에 들어가서 보는 것처럼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그렇게 잘 알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고리를 많이 잡을 수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날도 어부들은 밤이 새도록 그물을 내렸는데 아무것도 잡지 못하고 말았다. 그래서 예수님이 배 위에 올라가서 말씀을 가르치신 다음에 제안을 하셨다.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 5:4)
사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갈릴리 어부들이 생각하기에는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아침 시간에 물고기가 깊은 데에 몰려 있을 턱이 없었다. 그들은 전문가들이었을 뿐 아니라 갈릴리 바다 속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목수 출신인 예수님이 아무 것도 모르고 한 말을 무시하기 쉬웠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 시간인가? 바로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다 듣고 난 후였다.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의지하고 싶은 믿음이 생겼다.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눅 5:5)
그래서 상식이나 경험과는 완전히 다르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그물을 깊은 데로 가서 내렸던 것이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고기가 너무 많이 잡혀 그물이 찢어지려고 할 정도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나오는 말씀을 믿고 의지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상식적으로 손해 보고 실패할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라가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아주 친밀한 관계로 변할 것이다. 결국 그 사람의 믿음의 크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만큼 믿고 의지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우리가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오로지 말씀만을 믿고 의지해아 하는 것이다. 말씀을 믿지 못하고 말씀을 의지하지 못하면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자기 지혜를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지혜와 명철은 시간과 공간에 한정되기 때문이다. 바울은 세상 지혜를 초등학문이라고 하였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 2:8)
박사학위가 열 개 있어도 하나님의 지혜와 비교하면 초보수준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혜자 솔로몬은 잠언에서 자기 명철보다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라고 하였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잠 3:5)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다른 힘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시 20:7)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시 146:3)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하려니와 의인은 푸른 잎사귀 같아서 번성하리라”(잠 11:28)
사람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으로 만물을 판단하려고 하기 쉽다. 사람이 볼 수 있는 거리고 한정적이며 들을 수 있는 범위도 지극히 제한적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눈으로 분별할 수 있는 범위를 정해 주셨고, 지구가 자전하는 소리도 사람이 듣지 못하도록 귀를 설계해주셨다. 그래서 인간은 담장 너머조차도 볼 수 없고 조금만 떨어져있어도 소리를 분별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기가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수단에 의지하려고 한다. 믿음이란 바로 이런 인간의 속성을 깨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의무와 책임의 관계가 아니라 사랑의 관계이다. 다만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의무와 책임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의무와 책임은 분명히 있다. 정말로 사랑하는 사이라면 상대방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고 배려하고 사랑의 고백을 하게 될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런 모습이 서로에게서 발견되지 않는다면 그것을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정말로 사랑하는 사이라면 사랑하는 사람 이외에는 절대로 의지하지 않을 것이다. 앞서 말했지만 의지라는 것은 육신적, 물질적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의지를 뜻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도 똑같은 이치가 적용된다. 하나님은 타락했던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구원하시기 위해 목숨까지 버리셨다. 인간은 그 은혜를 깨달아서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는 것이다. 비록 힘들 때도 있고 의무감에서 행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겠지만 의무감이나 책임감 때문에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냥 의무감 때문에 하는 것이라면 하나님과 서로 의지하는 관계가 아닐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사랑을 원하시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사람에게 가장 완전한 길이며 그 길만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행복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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