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편에 서기

관계 5 : 예수님과의 관계

김완섭 목사 2017. 11. 7. 12:03

5) 예수님과의 관계

 

오늘날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의 문제가 꽤나 심각하다. 그런데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문제는 예수님을 누구로 인식하느냐와 깊은 관계가 있다. 예수님의 성도의 목자이시고 포도나무이시고 신랑이시고 친구이시고 형제시라는 말씀 이전에 예수님을 누구로 바라보느냐의 문제가 더욱 핵심적인 문제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시각은 예수님의 신분이나 성경에 소개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들에 대한 태도를 결정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성도의 관계 이전에 예수님은 과연 누구신가에 대해서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신가?

기독교는 나사렛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종교이다. 그리고 죄 없이 동정녀 탄생으로 태어나셨고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돌아가셨으며 육체가 부활하여 하늘로 승천하셨고 언젠가 재림하신다는 것을 믿는 종교이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은 구세주로 믿고 회개하면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의 육체도 부활하는 것을 믿고 있다. 또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러한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신앙공동체가 교회이며 하나님은 이 교회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구원하시며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가신다. 이것이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이며, 비록 연약할지라도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통하여 일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우리가 예배드릴 때 고백하는 사도신경에 나오는 내용 그대로이며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이 신앙고백을 믿지 않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유무형으로 이 사실을 부인하는 신앙인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을 믿지 않거나 훼손하는 사람들이다. 꼭 예수의 육체적 부활이 사실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말한다. 사실이든 아니든 예수의 부활을 마음속에 깊이 인식하고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죽으심과 부활, 빈 무덤 등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마음속에서 일어난 사건이지 실제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성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의 현재성을 가지고 부활 신앙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나 십자가 희생이나 부활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고 신화에 불과하다면 거기에 어떻게 우리의 구원이 일어날 수 있겠으며 무슨 영적 생명력이 존재하겠는가? 만약에 인류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중보사역이 신화이거나 사상에 그친다면 예수님 이외에도 구원받을 수 있는 다른 종교를 인정하는 것이며 죄 사함이나 거듭남이나 부활신앙이나 하늘나라를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믿을 수조차 없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예수님의 보혈로 말미암아 맺어진 혈육의 관계인데 만약에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한다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도 사랑의 관계도 전부 허물어져버리는 것이다.

 

실제로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후대에 제자들이나 교회에서 첨가하거나 덧붙여 넣은 말씀을 분류하여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신성과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면 기독교는 단지 여러 종교 중의 하나로 자리 잡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 하나님과 자녀들과의 관계, 예수님과 신앙인의 관계는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일단의 사상이나 인식 차원으로 낮추거나 가두어둘 수 없다. 수많은 현대 자유주의적 신학에서 아무리 학문적으로 기독교 구원사상을 훼손한다고 해도 길지 않은 세월이지만 그 동안 예수님과 교통하며 인격적인 교제를 나눈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비록 복음서에 나오는 말씀 중에 제자들이 첨가한 말씀이 더 많은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바울의 신학이 형성된 이후에 복음서가 기록되었으므로 복음서가 바울의 영향을 받은 것이 사실일지라도, 그것이 구원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과 능력을 축소하거나 인격적으로 실제로 교제할 수 있는 예수님을 부인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이 신학의 체계를 일으키시고 조직신학이니 성경신학이니 역사신학이니 만드신 것은 아니다. 당연히 예수님의 제자들과 또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을 따라 신학을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3년여 동안 이스라엘 전역을 헤매었던 제자들로부터 신앙은 유전되는 것이다. 비록 많은 교리가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선포된 이후에 결정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기독교 진리가 훼손되거나 상실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비록 죄성을 가진 인간이 만들어낸 교리라고 하더라도 성령님이 그것을 통하여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물론 기독교(천주교 포함하여)는 인류사에서 수많은 실수와 오류를 저질렀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교회를 통하여 지금까지 복음의 진리를 면면히 흐르게 하셨다. 개신교도 종교개혁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채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교회의 그 어떤 교리나 전통을 아무리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치열한 논쟁과 목숨을 거는 싸움 속에서 최상의 것으로 만들어 내었다고 해도 그 교회와 교리에 하나님의 복음과 진리를 모두 담을 수는 없는 것이다. 교회는 완전할 수 없으며 부분적으로 많은 오류를 품은 곳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 진리를 담아야 하며 어떻게 하든지 교회 안에서 우리의 신앙을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을 세상 모든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나가기 위한 체제전복의 개혁가로 생각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야 한다. 그러나 그 목적은 천국의 모형을 제시함으로써 저 영원한 천국의 통로를 제공하는 것이지 이 땅에 이상적인 정치체제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에 이 땅이 최종 목적이라면 그 방법은 세상적인 방법을 사용해야 하지만 이 땅이 목적지가 아니라 저 천국이 목적이지기 때문에 우리의 방법은 세상적인 방법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기독교는 혁명을 통하여 세상을 정복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라 혁명가였다면 민중을 선동하고 로마의 고위층을 움직이려고 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런 정치적인 방식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생활방식으로 세상을 정복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가 영적인 생활방식이 아니라 투쟁적인 방식으로 많이 바뀐 것을 느낀다. 만약에 그것이 맞는 방식이라면 우리들과 예수님은 인격적인 아무런 관계도 맺을 수 없다.

 

예수님의 사상을 본받아서 그분의 삶의 방식을 따라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영적인 교제를 나누면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육체적인 동정녀 탄생과 부활을 받아들을 때에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과 보혈로 맺어진 관계 속에서 세상을 승리하면서 살 수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인격적인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베드로와 예수님


베드로는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제자였다. 베드로 자신도 제자들 중에서 예수님을 가장 뜨겁게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3일 후에 부활하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자기는 절대 버리지 않겠다고 큰 소리쳤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26:33)

그러나 예수님께서 모든 제자들이 자신을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26:34)

그러자 베드로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목숨을 버리더라도 주님을 버릴 수는 없다고 호언장담했다.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26:35)

요한복음에서도 이와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다.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13:37)

 

하지만 그렇게 굳건했던 예수님께 대한 사랑은 군병들 앞에서 눈 녹듯이 사라져버렸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심지어 자기를 저주하면서까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말았다.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26:74)

그리고 베드로는 닭이 세 번째로 울자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고 말았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26:75)

사실 베드로는 죽을 각오를 하고 공회 앞으로 뛰어 들어가서 대제사장들에게 소리쳤어야 했다.

그렇습니다! 내가 여기 이 예수님의 첫째 되는 제자입니다. 나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 주시오!”

하지만 베드로에게는 그럴 용기가 없었다. 예수님을 가장 사랑한다고 생각했었고 또 정말로 가장 뜨겁게 예수님을 사랑하는 베드로였지만 그는 목숨을 걸어야만 했던 그 사랑을 외면하고 철저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그런데 한 번 실패했던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셨던 첫 말씀은 사랑의 확인이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21:15)

왜 나를 부인하였느냐 같은 지적이 아니라, 네가 정말로 나를 그리스도로 믿느냐와 같은 확인이나 다짐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가슴속에 들어있는 예수님께 대한 사랑을 다시 끄집어 내셨다. 그리고 죄책감에, 부끄러움에, 절망감 속에 깊이 숨겨져 있던 그 사랑을 다시 확인하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베드로의 대답은 당연히 사랑이었고, 예수님도 자신의 사랑을 알고 계시는 사실을 믿고 있었다.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21:15)

이 고백이 예수님과 베드로의 관계를 아주 정확하게 나타내어 주는 구절이 되는 것이다.

 

베드로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활의 주님으로 믿든 하나님으로 믿든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나친 말이지만 만약에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었다고 해도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이해보다 더욱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비유가 적절하지 못하겠지만, 주인을 사랑하는 강아지의 모습에서 이 사랑의 원형을 발견할 수 있다. 강아지는 자기 주인이 부자이건 거지이건 구별하지 않는다. 주인이 부자라고 해서 더 행복하다거나 거지라고 해서 강아지가 죽고 싶은 것이 아니다. 강아지는 주인이 어떤 사람이건 간에 사랑을 받는 것으로 만족한다. 아니, 만족하는 정도가 아니라 사랑을 받기만 하면 모든 것이 완전해지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마치 이와 같아야 하는 것이다.

 

물론 베드로는 실패했다. 예수님을 부인했고 죄책감에 예수님을 피하기도 했고 다시 물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가기도 했다. 사랑한다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목숨을 버리더라도 예수님만은 절대 버리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하지만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수는 없다. 사랑한다고 해서 실수를 하지 않거나 도망하지 않거나 죄를 짓지 않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정말 진정으로 사랑하는가이다.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핵심은 하나님을,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가이다. 이것이 빠지면 예배를 아무리 철저하게 드려도, 교회를 아무리 크게 부흥시켜도 아무 소용이 없다. 신앙의 지표는 믿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있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신앙행위는 사랑에 근거해야 한다.

 

가룟 유다가 은전 30냥에 예수님을 팔았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자살해버렸고, 베드로는 가장 위대한 사도가 되었다. 똑같이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와 베드로의 차이점은 과연 무엇인가? 회개와 후회의 차이라고 말하지만 근본적인 핵심은 예수님을 사랑하는가의 차이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회개를 할 수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후회로 그칠 뿐이다. 순교자들은 십자가를 그려놓고 뛰어넘기만 하면 다 살려준다고 했을 때에도, 예수는 하나님이냐고 묻고 고개만 가로저어도 살려준다고 했을 때에도 예수님을 배반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베드로는 너무나도 쉽게 예수님을 모른다고 잡아뗀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사도 바울의 말대로 자기 온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그리스도인은 어디에서 어떤 일을 어떻게 행할지라도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그 동기가 되어야 한다. 돈을 벌어도 봉사를 해도 기도를 해도 예배를 드려도 그 시작은 예수님 사랑이다. 실수를 해도 실패를 해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사람들이 볼 때에 주를 위해 아무리 큰일을 해도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빠져 있다면 전부 헛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사소한 일을 하고 누구의 눈에 띄지 않아도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면 그는 전부를 가진 것이다. 베드로와 예수님의 짧은 대화 속에서 우리는 신앙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다. 본질, 핵심, 생명, 전부 같은 말인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다.

 

목자, 포도나무, 가족, 친구


예수님은 예수님과 성도 사이의 관계를 여러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해 주셨다. 목자와 양, 포도나무와 가지, 신랑과 신부, 가족, 친구 등으로 말씀해주셨는데, 다 같은 말씀이 다른 표현들이다. 예수님과 우리는 목숨으로 하나 되어 있어 떨어지려 해도 떨어질 수 없는 사랑의 관계라는 것이다. 예수님과 성도 사이에는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사랑을 총동원해도 모자랄 만큼의 사랑으로 굳게 하나 되는 관계라는 것이다. 사람이 경험할 수 있고 느껴볼 수 있는 모든 사랑으로 사랑해야 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인 것이다. 복음서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이 사랑을 빼놓고 다른 어떤 단어를 다 채워 넣어도 결코 충분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관계의 핵심 속에는 하나같이 사랑이 진하게 흐르고 있다. 목자와 양의 관계도 사랑이 전제된 관계이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10:14-15)

아프리카 탄자니아에 갔을 때 눈에 띄는 것 중의 하나는 거지와 같은 양의 모습이다. 마치 떠돌이 개처럼 돌아다니고 있는 더러운 양이 가끔 눈에 띄었다. 주인이 없었고 혼자서 이리저리 다니면서 풀을 뜯어먹는데 사림들이 사는 도시 지역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목자 없는 양의 실제 모습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을 보실 때 목자 없는 양처럼 여기셨다고 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6:34)

목자는 양을 사랑하고 자기 양을 구별하며 그 양을 위하여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따라오며 다른 목자를 따르지 않는다. 이것이 목자와 양의 사랑의 관계이다. 사랑이 빠지면 그것은 목자와 양이 아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도 이 사랑의 흐름이 멈추면 즉시 죽음으로 이어진다. (정말 그렇다. 포도나무의 비유야 말로 삶이냐 죽음이냐를 갈라놓을 정도로 아주 깊은 사랑의 관계가 아니던가?)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15:1-2)

나무에서 꺾이거나 떨어져나간 가지는 이미 죽은 목숨이다. 아니면 주인이 가지를 꺾어 버려도 마찬가지 결과가 나온다. 식물이지만 이것이야말로 생명을 주고받는 사랑의 관계가 아닌가? 떨어져 나가버리면 사랑이고 뭐고 다 필요 없어진다. 그러므로 죽자 살자 매달려서 열매를 맺도록 힘써야 하는 것이다.

 

가족으로 말씀하신 부분도 마찬가지이다.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12:49-50)

여기에서도 가족이란 예수님의 보혈을 나누어 가진 사랑의 공동체라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이 사라져버린 가족을 가족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호적상 만으로서의 가족이라고 할 때 이 말이 얼마나 슬픈 말인가? 예수님과 우리도 단지 호적상의 관계, 곧 명목상의 관계에 그친다면 구원의 관계가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세상에서는 호적상의 가족도 상속받지만 피보다 진한 예수님의 보혈로 맺어져야 할 예수님의 가족은 죽음보다 진한 사랑으로 맺어지지 않고 있다면 아무런 관계도 아닐 수 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7:23)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겠다고 하셨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15:13-15)

예수님께서 우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친구라고 부르겠다고 말씀하실 때에는 그냥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친구는 친구인데 너무나도 사랑하여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을 사랑으로 완전하게 맺어진 관계라는 것이다. 친구와 친구 사이의 관계 중에서도 친구를 위하여 목숨이라도 버릴 수 있을 정도의 관계라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심오한 종류의 모든 사랑을 총동원해서 설명할 때 비로소 예수님과 성도 사이의 사랑의 관계를 그나마 잘 표현할 수 있다. 진정한 사랑은 우리를 위하여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사랑을 주로 이야기하며 그 사랑에 감사하며 찬양하는 것을 주로 말하지만 우리가 드려야 하는 부분, 섬겨야 하는 부분들이 전부 사랑의 표현이어야 하는 것은 잘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고 섬기는 부분은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우리 속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식어지거나 흐려지지 않도록 주의하자. 어떤 일을 하든지 예수님을 사랑하는 동기에서 하고 있는지 분별하자. 혹시 자기를 사랑하거나 목적을 사랑하거나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크지는 않은지 다시 한 번 더 살펴보자.

 

예수님을 사라.


세상에서 보물을 사랑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자기가 사랑하는 보물이 있다면 사람의 마음은 항상 그리로 갈 수밖에 없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6:21)

보물은 물건일 수도 있고 가치일 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고 목표일 수도 있다. 그런데 사람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보물이 있다면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서 그 보물을 얻으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팔아서 살 만한 보물을 발견하기도 쉽지 않고 발견한다고 하더라도 정말로 실행하기도 쉽지 않다.

 

그런데 예수님은 정말로 모든 것을 다 팔아서 살 만한 보물이 무엇인지를 말씀해주신다.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영원히 사모하는 천국이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13:44)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13:45-46)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천국을 사기 위해서는 이 땅의 것은 조금이라도 아까워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천국은 이 세상의 모든 돈을 다 모아도 결코 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천국을 살 수 있는 보물이 바로 예수님이시므로 사람은 이 땅에서 사랑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팔아서라도 예수님을 사야 한다. 예수님을 산다는 말이 어폐가 있지만, 예수님은 보혈을 사탄에게 지불하시고 우리를 사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 보물을 소유하기 위하여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지불하고 사야 하는 것이다.

 

계시록에 보면 예수님, 곧 어린 양을 향한 찬송이 나온다.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5:9)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피로 값을 치르시고 소유하신 존재들이다. 목숨보다, 생명보다 더 귀중한 보물이 어디에 있겠는가? 사도 바울도 성도란 예수께서 피 값을 주시고 사신 존재들이라는 것을 말씀한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우리를 위해 피값을 치르신 예수님이 가장 큰 보물인데 또 어떤 보물을 구하려고 하는가? 명예, 성공, , 사랑, 건강이 우리의 보물이 될 수 없다. 그런 것을 구하게 되면 우리는 사람의 종이 되고 마는 것이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전 7:23)

 

그래서 다른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라도 참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18:22)

그리스도를 깨닫는 것이 가장 큰 보물인 것이다.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2:2-3)

같은 말씀이지만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다른 것을 다 팔아서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사야 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19:21)

 

그렇게 자기가 가진 귀중한 것을 다 팔아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면 그 자체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거니와 그 결과로 또한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6:21)

모든 것을 다 팔아서 예수님을 사는 과정자체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지만, 그렇게 예수님이라는 보물을 사게 되면 당연히 그 보물을 더욱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들이 신앙 생활하는 모든 것이 예수님을 사는 것이다. 시간을 내어 봉사하고 어려운 이웃들에게 물질을 나누는 모든 것이 예수님을 사는 것이다. 다만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아무리 예수님을 사려고 모든 것을 투자해도 사랑이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니고 그렇게 해서는 절대로 예수님을 살 수 없다.

 

당신의 보물은 무엇인가? 정말 지금 당신이 추구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을 사랑해서 시작하는 일인가?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추진하는 일인가? 그것이 정말로 예수님을 사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정말로 모든 것을 다 팔아서라도 사야만 하는 보물이 예수님인가?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평생을 다 팔아서라도 반드시 사야 하는 보물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보물을 사는 일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한다. 그것이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진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