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편에 서기

관계 4 : 목숨을 다하여

김완섭 목사 2017. 11. 4. 18:12

4) 하나님과의 관계 3 : 목숨을 다하여

 

구약에서 하나님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6:5)

이 말씀은 구약에 여러 번 나오지만 모두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라고 하신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 예수님은 여기에 목숨을 다하라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12:30)

그냥 덧붙이신 것이 아니라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라고 하기 전에 목숨을 다하라고 하신 것이다. 순서상으로 보면 마음, , 힘 다음에 목숨이 와야 하는데, 왜 예수님은 먼저 목숨을 다하라고 하신 것일까?

 

기독교인이 목숨을 다하라는 말씀을 들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순교일 것이다. 우리가 지켜내야 할 복음의 가치는 목숨과도 바꾸지 않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 속의 인물들, 기독교 역사 속의 선배들이 복음을 배반하기보다 순교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그래서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을 때 우리의 머릿속에는 순교가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마음을 다한 다음에 왜 목숨을 다하라고 말씀하셨을까? 순교란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지켜야 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희생시킬 정도로 사랑해야 할 최우선의 존재라는 뜻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목숨을 바치기 위해서이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20:28)

인간은 하나님께서 자기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사랑해야 할 대상이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목숨을 다하여 사람을 사랑하신 것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다해 사랑하시므로 우리도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마음을 다하고다음에 목숨을 다하라고 하신 이유가 바로 이 대전제를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목숨을 거는 사랑이 아니면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이 말이 너무 과격하게 들릴 수 있고 치우친 주장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사람 사이는 목숨 걸고 사랑하는 사이라야 한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간과하고 번영과 성공을 위하여 신앙생활을 하라고 하면 그것이 복음인가? 위로받고 치유받기 위해서 교회를 찾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목숨은커녕 작은 상처 하나 안 받고 자기에게 불리하면 피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이 기독교 신앙인인가? 목숨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설교하지 않는다면 그 속에 진리가 남아 있겠는가? 그래서 사도 요한은 강하게 설파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자기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목숨에 관해 여러 가지 말씀을 주셨다. 목숨은 가장 중요한 것이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16:26)

이 말씀은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는 사람은 주를 위하여 목숨을 잃을 각오를 해야 한다는 말씀 뒤에 나온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16:25)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구원받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 목숨을 잃어버릴 생각을 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기독교신앙은 역설의 신앙이다. 세상논리와 완전히 거꾸로이다. 세상에서는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생존경쟁의 터널을 지나가야 한다. 예수님은 목숨을 얻으려면 그 목숨을 잃어버려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세상에서는 성공하려면 노력하고 애를 써야 하지만 신앙 안에서는 성공하기를 포기해야 비로소 성공할 수 있다. 세상에서는 돈을 벌려면 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과 실력이 있어야 하고 운이 따라야 하지만 신앙 안에서는 돈을 버려야 돈보다 훨씬 큰 것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높아지고 싶으면 자기를 낮추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23:12)

 

물론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세상에서도 그런 명언은 많이 있다.

얻으려면 버려라.”

바둑 명언인데, 일찌기 조치훈은 나는 목숨을 걸고 바둑을 둔다.”고 말했다.

군대를 죽음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데까지 이르러서야 비로소 살아남는 방법이 생긴다.”

손자병법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아예 목숨을 버리라고 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16:25)

세를 얻기 위해서나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목숨자체를 잃어버리라고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믿고 이렇게 강하게 말씀하셨을까? 전쟁이나 시합에서 이기기 위해서나 얻고자 하는 것을 받기 위해서 버리라는 말씀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믿을 수 있는 분이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 잃어버려도 하나님만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구원받은 존재들이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이 없다면 그 인생은 한 줌 먼지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을 아는 사람이 구원 받은 백성이고 살아 있는 믿음을 소유한 제사장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없다면 무엇 하러 목숨을 잃어버리겠는가? 우리가 우리 목숨조차도 기꺼이 드릴 수 있는 것은 그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인생에게 가장 고귀한 행위가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자기 목숨을 버림으로써 가장 고귀하게 되신 분이 계신다. 십자가에 못 박혀 목숨을 버리셨지만 하나님께서 살리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2:7-11)

우리가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근거가 바로 이것이다.

 

더불어 예수님의 희생은 마귀의 종노릇하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2:14-15)

목숨을 버리사 마귀를 멸하시고 마귀의 종노릇에서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이시다.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바로 이런 죽음으로 우리를 건지신 관계인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생명으로, 피로 맺어져 죽음으로 사랑하는 관계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들이다. 예수님께서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 근거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런 관계를 생각하지 못하면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시는 말씀이 부담이 될 뿐이다. 흘려듣거나 건너뛰어 버리거나 잊어버리거나 피하는 말씀이 될 뿐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시고 마귀의 궤계에서 건지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이라면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부담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힘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목숨까지 버리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이 말씀을 따르려 하지 않는다. 자기 신앙을 너무 세상에 합리화시키고 하나님의 복음을 외면한다. 자기 희생, 헌신을 피하려고 하거나 쉬운 헌신, 편안한 헌신을 택하려고 한다. 하나님을 위하여 손해보고 세상에서 양보하려고 하지 않는다. 생각이 달라도 비난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아닌데 자기생각과 다르면 무조건 비난부터 해댄다. 여기에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다. 힘들어도, 손해를 보아도, 망할 것 같아도, 억울해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것 때문에 다 당할 수 있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


하지만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생활에서 펼쳐지는 상황 속에서도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자기 목숨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 하냐”(6:25)

먹을 것, 입을 것, 살 집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이미 다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6:31-32)

이방인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이지 모르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 부지하기 위하여 입을 것, 먹을 것에 대해 염려한다는 말씀이다.

 

그러면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구하라는 것이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

그것이 바로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무엇일까? 그것은 먼저라는 단어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일을 최우선적으로 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삶에서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라는 것이다. 무엇을 결정할 때 가장 먼저, 가장 비중 있게 고려해야 할 사항이 그 나라와 그 의인 것이다.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일에 걸림돌이 되거나 장애가 되거나 늦추어지게 만드는 것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중요하고 시급하고 망할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고려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가 되고 세상에서 손해 보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외면 받는 것이 두려워진다면 그것은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물론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도 때로 염려가 되고 때로 두려울 때도 있다. 그럴 때 고민이 왜 생기지 않고 갈등에 빠지지 않겠는가?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구별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비록 염려가 되고 두려움이 생길 때도 있지만 결국에는 승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 염려와 두려움으로 인하여 무너져 버리게 된다. 이것이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염려와 두려움을 물리치고 목숨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증거가 바로 담대함이다. 그러면 담대함은 어디에 그 뿌리를 두어야 생길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이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16:33)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귀를 이기신 것을 믿는 사람에게 이런 담대함이 오는 것이다.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를 아는 사람은 담대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담대함을 가져올 수 있게 하는 근거는 많다. 우리의 소망이 우리로 하여금 담대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

우리가 이 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고후 3:12)

우리에게 하나님만을 믿는 믿음이 있으므로 담대할 수 있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3:12)

우리의 기도를 항상 들어주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담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4)

그리고 우리에게 주시는 사명을 이루게 해 주실 것이기 때문에 담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23:11)

 

사랑의 능력


염려와 두려움이 가득하고 담대함이 없는 것을 보통 믿음이 적다, 믿음이 부족하다, 믿음이 어리다고 한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그만큼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들을 수 있는 말 중에 여자는 약하다. 그러나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이 있다. 여자는 약한데 어떻게 어머니는 강할 수 있을까? 무엇이 약한 여자를 강한 어머니로 만들어주는 것인가? 그 힘의 원천은 자식을 향한 사랑이다. 자식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채워진 엄마는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고 어떤 장애도 염려하지 않는다. 약한 여자가 강하게 되는 그 힘은 자식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아무리 힘든 일, 그 어떤 고통도 당연히 감내하고 이겨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생명의 위기를 느끼거나 목숨을 바치는 일에 대한 두려움은 물론 엄청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위기와 고통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은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 그것이 사랑의 위대한 능력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목숨을 다하는 위험을 기꺼이 감당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평소에 사랑한다고 강조한다고 해도 위험이나 고통을 감당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에게는 사랑이 없는 것이다. 사랑이 없는 사람에게 아무리 사랑의 행위를 요구해도 결코 행할 수 없다. 한두 번 흉내는 낼 수 있을지 몰라도 삶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일반적인 진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이와 동일한 말씀을 주셨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15:13)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는 힘은 바로 사랑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사랑으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므로 예수님과 우리는 친구라는 것이다. 사람 사이에도 사랑이 크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는데 예수님은 그 사랑보다 더 큰 사랑으로 목숨을 버리셨으니 예수님이 우리의 친구가 되셨다는 것이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15:14)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것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사랑해야 하며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말씀대로 행하며 그런 사람은 예수님의 친구라는 것이다.

 

사람이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면 그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지만 사실상 현실 세계에서 다른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는 경우가 많지는 않다. 하지만 똑같은 현실 세계에서라도 그런 사랑을 늘 품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조금 전에 언급한 것처럼 자식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는 어머니들이다. 아이의 엄마가 되면 정말 하기 싫었던 일도 서슴없이 하게 된다. 아이의 엄마가 되면 아이를 위해서라면 불 속에라도 들어가려고 하게 된다. 아이의 엄마가 되면 아무리 힘든 일도 끝까지 다 할 수 있게 된다. 아이의 엄마가 되면 불 난 집에 자기 아이가 갇혔다면 불에 타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용감하게 들어가게 되고, 추운 겨울에 자기는 얼어 죽으면서도 아이를 품에 안아 살리게 되고, 아이를 덮치는 자동차를 가로막아 멈추게 하는 괴력을 발휘하게 되고, 혹시 늙어서 자기를 갖다 버리는 자식의 이름조차 말하지 않게 된다.

 

우리는 아이를 사랑하는 엄마가 행한 많은 기록들을 찾을 수 있다. 그런 위력을 발휘하게 만드는 힘이 무엇인가? 말할 것도 없이 아이를 향한 사랑의 힘이다. 만약에 이 사랑이 빠져 있다면 그 사람은 아이의 엄마가 아니다. 사랑이란 이와 같은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도 이런 사랑이 존재한다. 아니 사랑이 생명이며 핵심이다.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


그러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이런 받는 사랑만이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다. 주는 사랑, 드리는 사랑이 신앙의 핵심이다. 보통 신앙생활을 하면서 믿음에 대해서 많은 강조를 한다. 기독교 신앙인은 큰 믿음,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병을 고치는 것도 귀신을 쫓아내는 일도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교회를 부흥시키거나 기도의 큰 응답을 받거나 하는 모든 일들을 믿음으로 하려고 한다. 하지만 만약에 그런 큰 일들을 하는데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빠진다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심지어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이 되기까지 한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7:22-23)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이것이 무슨 뜻일까? 세상 법을 어겼거나 비도덕적인 행위로 손가락질을 받은 것일까? 자기 이익을 위하여 은사를 이용했거나 자기 명예를 위해 사역을 했던 것일까?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씀은 불법이 아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라는 말씀이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예수님은 이 거짓 선지자들을 전혀 알지도 못하셨는데, 이 말은 서로 간에 사랑이 전혀 없었다는 말이다. 주님께서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들을 모를 수 있겠는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불법을 행할 수 있겠는가? 결국 포인트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신앙인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관계이고, 그 관계의 본질은 사랑이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는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더 사랑할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무엇을 얻거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기도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묵상하고 설교해야 한다. 믿음은 중요한 것이고 믿음이 없으면 기독교 신앙 자체가 성립될 수 없지만 믿음과 함께 사랑이라는 레일이 깔리지 않으면 신앙이라는 기차는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의 초점이 바뀌어야 한다. 기독교인이 세상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느냐가 아니라 기독교인이 세상 속에서 살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로 신앙의 푯대가 옮겨져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어떻게 적극적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세상과 어떤 식으로 부딪쳐야 하는지, 하나님을 정말 사랑한다면 과연 어떤 가치관으로 세상에 영향을 주어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그 하나님의 마음의 통로가 되려고 애쓰고 힘써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를 통하여 세상을 향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전달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가 되는 것이다. 이런 본질을 깨달을 때 우리는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 사랑의 방향


이제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떤 식으로 전개되어야 하는 지를 생각해 보자. 사도 바울은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너무나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미 언급했지만 소위 사랑장이라는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1-3)

 

참으로 위대한 말씀이다. 이 말씀은 사랑에 관한 아름다운 말씀이 아니라 피를 토하는 절규이자 고함소리이다. 차분한 마음으로 조용히 심금을 울리는 그런 시적인 말씀이 아니다. 나는 20대 초반에, 아직 예수님을 모를 때에 노트에 이 말씀을 정성껏 기록했었다. 이런 사랑 속으로 들어가서 이런 사랑을 펼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일말의 소망이 있기는 했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이 편지를 쓰지 않을 수 없었던 배경을 알았더라면 이 말씀이 더 이상 아름다운 말씀으로 머물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의 격랑에 찬 사역의 여정에서 몸부림치며 온몸으로 체험했던 절규이다. 채찍을 맞으면서, 옥에 갇히면서, 매를 맞으면서,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작은 배 위에서 생명의 위협과 두려움과 찢어지는 마음의 혼란 가운데에서 직접 몸으로 얻어낸 진리이다. 진리는 그렇게 다가오지 않으면 진정으로 자기 것이 되기 힘들다.

 

우리는 그런 말씀을 읽고 듣고 느끼고 깨닫고 우리 몸속에 유전자처럼 새겨 넣어야 한다. A, B, O, AB형이 아니라 J(예수형) 혈액이 우리 핏줄을 흐르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가문은 하나님 사랑의 찬란한 전통이 빛나는 가문인 것이다. 그것이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참 모습이다. 초신자이든 중직자이든 사역자이든 이것은 다 똑같다. 이것은 예배할 때이든 찬양할 때이든 기도할 때이든 말씀을 대할 때이든 다 똑같다. 이것은 전도할 때이든 먹고 살기 위해 물건을 팔 때이든 다 똑같은 것이다. 이것은 병들었을 때이든 운동 경기할 때이든 노동할 때이든 동일한 것이다. 심지어 사람을 살릴 때나 순교 당할 때에도 동일한 것이다. 사도 바울의 이 절규는 목숨이 붙어 있는 인간의 모든 삶에 전부 똑같이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에서 사랑이 빠지면 그것은 곧바로 죽은 종교가 되는 것이요 타종교나 이단이나 사이비나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종교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목숨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진짜로 목숨을 걸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절대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그 무서운 로마의 채찍을 수십 대 맞고 온몸이 피로 절은 것과 같은 상태로 가시로 잔인하게 만들어진 면류관을 덮어쓰셔서 온 얼굴이 피로 흥건하게 고여 흘러내리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손목과 발목에 대못질을 당하시고 아버지!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하시고 숨이 끊어지신 그 예수님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지나친 말이 결코 아니다.

 

목숨을 걸고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목숨을 아예 사탄의 손아귀에 던져버리시고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는 바로 그런 관계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목숨이라는 말씀을 자주 하신 것이었다. 우리가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우선 자기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8:35)

그리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면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게 되는 것이며, 동시에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을 차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10:17)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에는 방향이 없다. 우리가 숨 쉬고 움직이는 모든 순간에 우리는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비록 하나뿐인 목숨을 사용할 수 있는 기회는 한 번 밖에 없겠지만 매 순간이 목숨을 다할 수 있는 기회임을 느끼고 말하고 행하는 것이 바로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엄마가 아이를 위해 죽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지만 모든 엄마들이 그런 사랑으로 자기 아이를 사랑하듯이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며 그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어 진정으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 속에 자신을 위치시킴으로써 다가오는 모든 세상에서 하나님과 언제나 동행하는 성도들이 전부 다 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진정한 사랑이 넘치는 그런 곳이라는 말을 듣는 것이 더욱 큰 소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