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복음서 5독을 마치면서
말씀과 동행하는 삶
요즘 들어 이 체험 프로그램의 진수를 맛보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거의 하루 종일 4복음서를 읽고 느낌을 기록하고 정리하는 데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작하면서부터 성경을 읽는 일이 큰 부담으로 남아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소식 끊고 4복음서 새로 읽기라는 전혀 새로운 시도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사복음서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나를 인도하셨는가에 대해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모습이고 이런 식으로 사복음서의 말씀을 정리하게 되리라는 것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집중한다는 애초의 의도가 결국 사복음서 집중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결국 말씀과 동행하는 삶이라는 것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니까요.
하지만 이 말씀과 동행한다는 것이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는 아직도 확실하게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집중한다는 것도 사실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루 종일 수시로 기도하면서 주님과의 대화를 통하여 하나님께 집중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을 생각하면서 어려운 사람들을 돕거나 몸으로 봉사하는 것도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세미나 프로그램을 통해서도 집중할 수 있습니다. 7시간성경일독이라는 세미나를 통하여 성경 전체의 핵심내용을 읽어나가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이것도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식으로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든 그 중심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기도는 영적 호흡이요 말씀은 영적 양식이라고들 말합니다. 저는 여기에 덧붙여서 예배는 마치 영적 심장과도 같고 성도 간의 교제는 우리 몸 전체에 퍼져 있는 영적 혈관과도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더 세부적으로 들어간다면 영적 호흡인 기도도 영적 심장인 예배도 그 속을 흐르는 것은 말씀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영적 소화기관인 성경 프로그램도 영적 혈관인 성도의 교제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성도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 속을 흐르는 것은 말씀입니다. 말씀이 심장을 통해서 온몸의 혈관으로 흘러들어가지 못하면 살아있는 영적 생명체로 볼 수는 없습니다. 말씀이 아니라 자기 생각, 경험, 전통, 관습들이 흘러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말씀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온갖 인본주의가 그 사람을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이 위장을 통해서 공급되지 않고 말씀이 호흡기관을 통해서 숨을 쉬지 않는다고 해도 역시 살아있는 영적 생명체로 볼 수는 없습니다. 말씀이 아니라 욕심, 물질, 명예, 성공, 번영, 지배가 숨을 쉬고 위장으로 흘러들어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말씀이 아니라 온통 세속적인 쾌락이나 세속적인 행복을 따라가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어떤 사역을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핵심으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말씀 하나만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다른 것은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신앙생활의 다른 요소들은 이 살아있는 말씀이 효과적으로 구석구석까지 흘러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도구요 수단이요 과정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말씀이 살아있는 채로 우리의 영적인 몸속을 흐를 수 있도록 만드느냐에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조건 말씀을 많이만 취한다고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말씀을 많이 먹기는 먹는데 그것이 소화가 되지 않은 채 걸려있는 것이 오늘 신앙인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말씀을 많이 먹어도 그것이 소화불량이나 호흡장애나 혈액순환장애나 부동맥 등으로 제각각 어딘가에 걸려 있다면 차라리 말씀을 조금만 먹는 편이 훨씬 유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과 동행한다고 할 때 우리 자신의 상태를 잘 분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항상 말씀을 암송하고 언제나 성경 내용만을 많이 생각하면서 생활한다고 해도 그 말씀이 나의 전체 삶을 지배하고 있는지, 다른 말로 하면 말씀이 내용이 내 삶에 적용되고 있는지와는 별개의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강력한 은사사역자가 있다고 합시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은사가 강한 분들 가운데에서 이 말씀의 적용이 잘 안 되는 분들이 간혹 계십니다. 분명히 병 고침이라든가 예언이라든가 하는 성령님의 역사는 일어나는데, 그리고 항상 성경말씀을 적용하기는 하는데, 실제 생활을 보면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거나 권위적이거나 주님의 제자가 아니라 자기의 제자 혹은 성도를 만들어버린다거나 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과 동행하는 삶이 아닙니다. 복음전파를 위해 주신 성령님의 은사를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정말 헌신적으로 돌보는 사역자가 있다고 하십시다. 이 사역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 즉 가난하고 병들고 억압받은 사람들을 위해 오신 주님의 목적에 가장 부합되는 귀한 사역입니다. 하지만 이 역시 말씀과 동행하지 못하면 홍보에 열을 올리게 되거나 사역이 명예의 수단이 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활동을 지나치게 알리려 하거나 혹은 자기의 혹은 자기 명예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소위 말해서 구제를 위하여 나팔을 부는 우를 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말씀 사역에서도 얼마든지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깊이 있게 연구하는 분들이나 성경세미나에 열심히 참여하는 분들, 혹은 매일 새벽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따라 하루를 살아가는 분들에게도 이런 위험성은 언제나 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지금 그런 귀한 사역들을 부정하거나 비판하거나 낮추려는 의도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귀한 사역을 감당하고 있더라도 말씀 곧 주님과의 인격적인 교제가 없이는 얼마든지, 언제라도 바리새인의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매일같이 말씀을 묵상하는 삶을 산다고 할 때 우선 이런 삶은 너무나도 귀한 삶이 될 것입니다. 아무나 쉽게 몇 년 이상 꾸준하게 이런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자체로서도 대단한 일이고 모든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장려할 만한 일입니다. 그거면 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거기에 한 가지만 덧붙인다면 그 말씀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대하고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말씀을 많이 읽어도 전부 자기 입장에서만 읽는다면 성경을 많이 안다고 할 수는 있어도 말씀과 동행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하나님이 되시기 위해서는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야 할 것입니다. 그 말씀을 내 환경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환경을 말씀에 적용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내가 중심이 아니라 말씀이 중심이 될 수 있도록 읽어야 할 것입니다. 내 편으로 주님을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편으로 올라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말씀과 동행하는 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이런 내용들은 웬만하면 지식적으로는 다 알고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다만 자신이 하고 있는 방식에 빠져있으면 다른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겠지요. 깊이 빠져있으면 있을수록 더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상태를 파악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대개 내 눈의 들보는 치우지 못할 뿐 아니라 있는 것조차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눈에 박힌 티만 보이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여기에서 무엇이 중요하며 또 어떻게 보완할 것인가 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일 것입니다. 결국 말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해답일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말씀 속에 들어가되 제3자의 입장에서 말씀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그 현장에 들어가서 내가 범죄한 인간이요 내가 실수한 제자이며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안겨주는 주인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말씀 속에 들어가는 진짜 의미이며 유일한 목적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말씀을 배울 뿐이지 말씀과 동행하는 것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그 동안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복음서만 다섯 번째 반복해서 읽으면서 그 의미를 다시 새겨보게 된 것입니다. 저는 원래 설교자이기 때문에 말씀을 보더라도 설교를 준비하기 위하여, 가르치기 위하여 성경을 보는 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당연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성경을 보면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은혜는 받는데, 주로 내가 받을 은혜보다 성도들이 받을 은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말씀을 보아서는 내게 유익이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내가 가르치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착각하기를 나 자신이 그런 수준 이상의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깨닫고 가르치고 설교하는 것 이상으로 생활 속에서 그 말씀이 펼쳐져야 정말 말씀과 동행하는 것인데, 미처 그럴 시간도 없이 계속 설교하고 가르치고 하는 일이 반복되다 보니까 오히려 관념적인 신앙, 추상적인 신앙에 머물기 쉽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목회자로서의 역할이기는 하지만 정작 말씀대로 행하지 않고 가르치기만 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말씀입니다.
이번에 복음서를 반복해서 읽으면서 많은 부분에서 도전이 되었습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성경을 읽거나 어떤 목적을 위해 성경을 읽어야 할 때도 분명히 많이 있지만, 그런 것을 떠나서 그냥 말씀을 있는 그대로 읽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을 그냥 읽을 때에는 내가 불편하거나 내 필요성과 별로 부합되지 않을 때에는 그냥 넘어가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을 제대로 읽는 방법이 아닙니다. 그렇게라도 읽기만 한다면 그것도 대단한 일입니다만, 기왕에 성경을 읽을 바에야 더 제대로 읽을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섯 번을 반복해서 읽어나가면서 구석구석 숨어있는 보석과도 같은 말씀들을 찾아낼 때마다 작은 탄성을 지르곤 했습니다. 똑같은 구절이라도 한 번 읽을 때와 두 번, 세 번 읽을 때 느끼는 강도가 전혀 달라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내용들을 새삼 깨달으면서, 말씀을 말씀 그대로 순수하게 읽어나간다는 것이 쉽지는 않다는 것도 함께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 반복읽기가 쉬운 것 같지만 쉽지 않고, 그리고 평범한 것 같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성경읽기 방법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것으로 말씀을 전부 내 것으로 만든 것은 절대 아닙니다. 다만 성경을 자신의 상태나 목적을 뛰어넘어 있는 그대로 읽되 모든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에게만 정확하게 들려주시는 것 같은 마음이 되어야 그 말씀은 비로소 자기 것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느낄 수 있을 때 그것이 말씀과 동행하는 삶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과 동행한다는 것은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말씀을 입에 달고 산다거나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 반복읽기가 말씀과 동행하며 말씀대로 실천하며 말씀을 따라가야 하는 신앙인들에게, 그리고 주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을 품고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려는 모든 신앙인들에게 작은 도전이 될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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