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복음서 반복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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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다섯 번째 읽기
⚫ 증 언
예수님이 생명인 것은 사람들에게 빛이 되시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은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사람이다. 어둠에 빛이 비춰도 깨닫지 못하지만 세례 요한처럼 우리는 빛을 증언하며 빛을 반사해주는 존재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세상에서 빛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길인지 늘 고민해야 한다.
(요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 1: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 하나님의 음성
빈 들에서 세례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는데 본문은 그 때 임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이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라고 하시고 그 때 성령이 내려서 임하는 사람이 보이면 그 사람이 메시아인 줄 알라는 말씀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때가 되면 성취된다. 먼저 떠벌리고 홍보할 필요는 없다.
(요 1: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눅 3:2)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 궁금증
가나의 혼인잔치에 참여한 제자들은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나다나엘이었다.
(요 1:40-41)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요 1: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요 2:1-2)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 섬김의 자세
기독교인의 마음에는 허식이 없어야 한다. 포도주를 비유로 하면 먼저 좋은 것으로 내놓고 나중에는 더 좋은 것으로 내놓는 것이다. 점점 커지고 점점 좋아지게 하는 것이 기독교여야 한다. 끝까지 같은 마음으로 섬기는 것이 중요하다.
(요 2: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 참 빛
참 빛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자기 행위가 어둠의 행위이므로 어둠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빛을 알고 그 빛 속에 거하게 된다. 행함이 있어야 참 믿음을 소유하고 누릴 수 있다.
(요 3: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 흥함과 쇠함
신랑의 친구는 신랑이 칭찬 받고 인기 있고 행복한 모습을 보면 진정 기쁨이 넘칠 것이다. 신랑은 경쟁자가 아니라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자기보다 더 흥하고 알려지게 되시는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이의 모습이 신랑의 친구의 모습이고 우리의 진정한 영성이어야 한다. 주를 위하여 나보다 잘 하는 사람이 더 잘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그렇게 되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이라면 신랑의 친구의 자격이 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신랑의 일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요 3:29-30)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 큰 믿음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잘못된 의식을 행하는 사람이라도 그리스도를 기다린다. 높은 사람이든 많이 가진 사람이든 무의식적으로는 그리스도를 원한다. 다만 원하는 것과 영접하는 것은 다르다. 잘못된 전통을 행하고 있었지만 이 사마리아 여인은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었다. 오히려 베드로보다 더 큰 믿음을 보였다.
(요 4:25)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 메시아의 증거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증명하는 증언들이 많다. 세례요한의 증언, 예수님이 행하신 일의 증언, 성경의 증언, 보혜사 성령님의 증언, 제자들의 증언들이 그것이다.
(요 5:33)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였느니라”
(요 5:36)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요 15:26-27)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을 이 땅에 내려 보내신 일이다. 그것이 이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일이다. 우리는 이것을 잘 알고 그것을 세상에 끊임없이 알려야 한다. 말, 행동, 일, 사업, 교회, 직장 등 모든 삶을 통하여 메시아 예수님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전문사역자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부일 뿐이고 사실상 대부분의 일은 성도들이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리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까.
(요 6: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 부활의 소망
예수님의 마지막 일은 이 땅에서 마지막 날에 성도들을 다시 살리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일이 많이 있어도 마지막 날에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지 않으시면 소용없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 승리는 부활하는 것이다. 우리는 부활의 소망으로 세상을 이겨야 한다.
(요 6:39-40)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 함께 뒹굴기
날마다 음식을 먹고 마시는 것처럼 예수님을 먹고 마셔야 한다. 성령 충만할 때 예수님과 항상 먹고 마시고 뒹구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요 6:55-56)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 영과 생명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실 때 주님 안에 거할 수 있다는 말씀은 영이여 생명의 말씀이다. 모든 것을 육적으로 해석하면 성경은 모순투성이지만 영으로 해석하면 전부 통하고 믿어진다. 우리는 영에 속한 사람으로서 영의 원리를 따라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들이다.
(요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 확신과 사실
예수님이 보시기에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바리새인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보기에는 그들 중에서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우리 자신에 대해 너무 확신하지 말자.
(요 7:19)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 안식일 논란
율법이 서로 충돌하고 있다. 인간의 논리, 신학, 교리는 스스로 충돌하는 일이 많은데 각각 이것을 따라 하려고 하니 점점 복잡해진다. 하나님의 마음, 예수님의 정신을 똑바로 알면 충돌할 일이 줄어들 것이다.
(요 7:23)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
⚫ 말씀이 거할 곳
신앙은 말씀이 내 속에 있을 곳을 만드는 것이다. 말씀이 내 속에 있을 자리가 없으면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알고 좋은 설교를 많이 들어도 소용이 없다. 내 생각, 습관, 편견, 욕심, 이기심, 자기중심적 사고방식들을 버릴 때 말씀이 내 속에 거할 자리가 있는 것이고 계속 거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요 8:37)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 안식일 분쟁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을 보고 그것을 메시아가 아니라는 증거로 삼았다. 성경을 너무 좁고 자기 보고 싶은 부분만 보니까 자기 해석 외에는 전부 이단으로 몰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교리 속에 계시는 분이 아니시다. 다만 교리를 통하여 잘못된 부분을 걸러내고자 할 뿐이다.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계획을 폭넓게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요 9:16)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
⚫ 귀신들림
계속해서 예수님이 귀신 들렸다고 공격한다. 자신들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보고 귀신들렸다고 하고 예수님을 부정하기 위하여 귀신들렸다고 하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은 보통 사람들이 하는 일과는 전혀 다른 일을 하셨다. 사실 예수님은 조용하신 분이지만, 그러나 끊임없이 도전하시고 개혁하시고 선포하시고 논쟁하실 뿐만 아니라 정말 신이 할 수 있는 일들만 찾아서 하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요 7:20)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요 8:48)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요 8:52) “유대인들이 이르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요 10:20)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그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 거하심
성령은 사람들이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존재 자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을 알 수 있는데 왜냐하면 자녀들 속에 오셔서 그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요 14: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 주 안에
주님은 하나님 안에 계시고 우리는 주님 안에 있고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줄을 성도는 알 수 있다. 모르는 사람은 어떻게 해도 알 수 없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해할 수가 없다.
(요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 예수님의 친구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알고 있다. 세부적으로 어떤 일을 어떻게 하시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일의 존재, 성격, 방향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지시만 받는 것이 아니라 일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종이 아니라 친구들이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 주님께서 친구로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주님의 다른 친구들을 사랑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고 상대를 도우려고 할 때 서로사랑이 이루어진다.
(요 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 책망에 대하여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성도를 도우시는 일이지만 동시에 죄와 의에 대해 책망하시고 심판에 대해 가르쳐주신다. 주님의 제자들은 성령님의 책망을 잘 알아듣고 잘 받아들여야 한다.
(요 16:8-11)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 담대함의 근거
환난을 당해도 담대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미 이기셨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예수님과 그 말씀에 대한 완전신뢰이다. 평안이라는 것은 완전히 믿고 의지할 수 있을 때 생기는 것이다. 어려운 일을 만나야 자기가 얼마나 하나님을 신뢰하는지 알 수 있다. 여기에서 환난이란 믿음으로 인하여 받는 고난이다.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 장례절차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믿었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후에야 나타나 그 예를 다하고 있다. 다른 제자들이 다 도망갔는데 이들이 그 예를 다한 것은 격려할 만한 행동이지만 이미 돌아가신 후에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래도 이들로 인하여 육신 예수님께 대한 모든 예법을 다하기는 했다. 그러나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는 이런 신앙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손해 안 보고 예수 믿으려고 하면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요 19:38-39)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 그리하면 잡으리라
예수님은 어차피 제자들이 다시 예수님의 일을 해야 하는데 왜 고기가 가득 잡히게 하셨을까?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잡혔다면 다시 어부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을까? 하지만 먼저는 베드로와 제자들이 밤새 그물질을 했는데 한 마리도 못 잡았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 같다. 이제 제자들끼리는 어떤 일을 하더라도 아무 결과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제자들은 이제 끝까지 오직 주님만을 의지해야 할 것이다.
(요 21:6)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 이 사람은 어떻게?
베드로는 왜 갑자기 요한의 앞날이 궁금해졌을까? 아마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청탁했던 말이 생각나서 그러지 않았을까? 그러나 아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났으니 그런 것은 아무 상관도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세상에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들이 참 많을 것이다.
(요 21: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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