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복음서 반복읽기

사복음서 일곱 번째 읽기

김완섭 목사 2017. 11. 21. 11:09

사복음서 반복읽기 

4주 동안 세상소식 끊고 사복음서만 8회 반복읽기했습니다.

7독과 8독 반복읽기를 함께 올립니다.


마태복음 일곱 번째 읽기

 

퀴 즈

예수님의 할아버지는 누구일까요?

(1: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완전하게 하심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율법이나 선지자는 불완전한 모습이었다. 예수님이 이것들을 완성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것을 심판하러 다시 오실 것이다.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율법의 수준

그 율법을 완전하게 하시기 위하여 살인죄와 미움의 죄를 동일선상에 올려놓으셨다. 율법의 근본정신, 곧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의도를 가르쳐주시는 것이다. 율법은 인간의 불완전성으로 말미암아 최소한의 조건을 제시하신 것이다.

(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아버지의 마음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들도 당연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 모든 사람들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원수에게까지 마음을 열고 사랑하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우리 하늘 아버지의 마음이다.

(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있어야 할 것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이미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구하는 동기와 목적과 그것을 대하는 마음까지도 다 아신다. 자기 유익이나 자기 의를 드러내는 것을 구하면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응답에서 제외하신다. 기도하는 제목들을 스스로 솔직하게 분별해보자.

(6: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나의 보물

각자의 보물이 과연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물질, 명예, 가족, 성공, 인기와 같은 것들을 보물로 생각하는 사람은 그것들에 우선순위를 둘 수밖에 없다. 삶에서 소중한 것들에 대해 과연 그것들보다 예수님을 소중하게 여기는지를 솔직하게 분별해보자.

(6:21)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비판의 조건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헤롯에게까지 비판을 멈추지 않으셨다. 그래서 그들로부터 끊임없는 공격을 받으셨다. 하지만 그 비판은 하나님의 권위로서 그들의 속에 품고 있는 죄들까지 다 아시고 비판하시면서 거듭 회개를 촉구하신 것이다. 혹 예수님께서 불의를 비판하셨으므로 나도 똑같이 불의한 사람들을 비판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의 속을 다 알 수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런 비판을 가하려고 할 때에는 냉정하게 자신을 먼저 돌아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안에서 되로 주고 말로 받는 수가 있다.

(7: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완성된 율법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하게 하려고 오셨는데(5:17) 그 완전해진 율법과 선지자는 바로 자기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다른 사람을 대접하라는 것이었다. 무엇이든지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자신이라면 어떤 대접을 받고 싶은 마음일까를 먼저 생각하고 받고 싶은 대로 상대방에게 하라는 것이다. 곧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이것이 완전해진 율법이요 선지자이다.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참 지혜

주의 말씀을 받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만이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 순수하고 진정성 있는 마음으로 말씀을 지키고 따라서 행하려고 하는 것이 진짜 지혜이다. 핵심은 자기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이다.

(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내가 원하노니

예수님은 성도들의 요청에 따라 반응해 주신다. 나병환자가 주께서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니까 예수님도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셨다. 이 나병환자는 율법적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을 따라 창의적으로 요청한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자기 믿음 안에서 창의적으로 간구하면 하나님은 창의적으로 응답해주신다.

(8:2-3)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다만 말씀으로만

이 백부장의 믿음도 창의적인 믿음이며 기도였다. 자신의 질병도 아니고 하인의 질병을 고치기 위하여 자기가 가서 요청하면 들어주실 것이라는 믿음도 창의적인 것이었고, 주께서 명하시면 시간이나 공간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명령만 내려달라는 기도도 창의적인 기도였다. 이 백부장은 눅 7:5에 보면 유대인을 사랑하였고 회당까지 지어주었다고 한다.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경직되어서는 안 되고, 예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통하여 앞에 계신 분과 대화하듯이 기도해야 한다.

(8:8)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100% 믿음

예수님의 겉옷가에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이 낫겠다는 이 여인의 믿음은 100% 믿음이다. 모든 기적은 순간적일지라도 100% 예수님의 능력을 믿을 수 있을 때에 이루어진다. 이런 믿음을 항상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9:20-21)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즐겨 받을진대

똑같은 것을 주셔도 그것을 받는 자에게만 믿어지게 되어 있다. 믿음은 어떤 결과로도 나타나지만 지식적으로도 자기 것이 되게 만들기도 한다. 그 지식이 삶의 현장에서 기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11:13-14)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소돔과 가버나움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권능을 소돔에 행하셨더라면 다 회개하고 돌이켜 지금까지 남아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소돔은 의인 열 사람이 없어서 멸망하였다. 그렇다면 지금 가버나움에도 의인 열 명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가버나움은 회당도 있는 믿음의 도시였지만 사실은 소돔보다 불신이 더 강한 도시라는 말씀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서울은 소돔보다 더 악한 것이 틀림없다.

(11:23-24)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멍에와 집

멍에와 짐은 십자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십자가는 쉽고 가볍다. 믿고 맡기는 사람에게는 십자가가 쉽고 가볍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한없이 무겁고 힘만 들 것이다.

(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악한 세대

계몽주의 시대 이후 무지몽매함이 깨끗하게 물러가고 인권과 같은 것이 세상에 들어왔으며, 그것을 따라 마귀가 함께 들어왔다. 사실은 마귀가 속임수로 세상을 밝게 만들고 인간의 이상향이라는 거짓으로 사람들에게 왕 노릇하고 있다. 마치 바벨탑처럼. 현대의 각종 신학이 마귀를 따라 들어와 이전보다 점점 더 영이 악화되는 길로 나아가고 있는 것과 똑같은 말씀이다.

(12:43-45)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11:4, 9)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조용하신 예수님

언뜻 생각하기에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비판하시며 다툼을 일으키신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셔서 다투거나 외치는 것 같은 행동을 하지 않으신다. 이로 볼 때 바리새인들을 비판하실 때에도 온유하고 높지 않은 목소리로 나무라셨을 것 같다. 본문에 의하면 심지어 예수님이 길을 지나가는 것조차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할 정도라고 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소문을 내자 말라고 명하신다.

(12:19)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비유의 조건

씨 뿌리는 비유는 농촌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이야기들인데, 예수님께서 밑도 끝도 없이 씨 뿌리는 이야기를 하신다. 누가 그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제자들에게는 알아듣게 설명을 잘 해 주신다.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은 말씀이 이해되고 은혜가 된다. 지금 말씀이 은혜가 안 되면 뭔가 막혀 있을 가능성이 크다.

(13:3-8)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두세 사람이란

두 사람이 합심하여 구하면 들어주신다. 그리고 두세 사람이 있는 곳에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하셨다. 두세 사람 중에 보이지 않게 동행하신다는 말씀이다. 하지만 이렇게 믿으면 안 될까? 그 두세 사람 중 한 사람이 예수님이라고. 우리와 함께 하는 사람 중 한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생각하고 주님의 일을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 같다.

(18:19-20)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천국의 주인공

우리의 상식과 하나님의 의도는 완전히 다를 때가 많다. 아이들이 와서 시끄럽게 하면 어른들에게 방해가 될 것 같지만 사실은 아이들이 천국의 주인공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뿐 아니라 그대로 실천하려고 노력함으로써 우리가 가진 상식이 예수님의 마음, 하나님의 뜻이 되도록 해야 한다. 실천하지 않으면 결코 예수님의 상식을 이해할 수 없다.

(19:13-14) “그 때에 사람들이 예수께서 안수하고 기도해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하시고


천국문

아홉 시간 일한 사람과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주는 것은 공평하지 못하다. 하지만 천국은 믿기만 하면 일찍 믿었든지 늦게 믿었든지 상관없이 똑같이 문을 열어준다. 그것이 천국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조금 더 열심히 일하고 오래 일하고 일을 조금 더 잘 했다고 해서 그것을 자랑하거나 권리를 주장하지 말라는 것이다. 비유 중에서 말하자면, 겨우 하루 일한 것이 얼마나 차이가 나겠는가?

(20:13-14)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종교적 위선

종교적 위선을 본인이 알아차리기 힘들다. 교회에 대한 의무는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철저하게 지키면서 일상의 삶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도외시한 채 불법과 탐욕의 행동을 서슴지 않는 것은 종교적 위선의 극치이다. 교회에 대한 의무를 철저히 한다면 삶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긍휼을 베풀고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그들은 교회에 대한 의무만 다하면 천국은 따 놓은 당상이라고 착각한다. 예수님께서 외식하는 바리새인을 책망하시는 것도 전부 이 종교적 위선이다. 나에게도 분명히 종교적 위선이 많이 있을 텐데, 그것을 발견할 수 있도록 간구하는 삶이 되려고 애써야 하겠다.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외식과 불법

만약에 바리새인들이 이런 종교적 위선이 빠지지 않았다면, 곧 종교적으로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이런 외식의 죄를 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대개 종교적 위선에 빠져 있다고 생각하면 틀림이 없을 것 같고, 그 위선에 해당되는 벌은 최고수준이 될 것이다.

(23:27-28)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영생에 들어가려면

이 세 가지 비유는 모두 마지막 날 구원받을 사람에 관한 말씀인데 공통적으로 믿음이 아니라 행한 일에 근거를 두고 있다. 기름그릇에 기름을 담아 와야 하고, 장사하여 이익을 남겨야 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직접 돌보는 것이다. 행위의 결과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행한 그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믿기만 하고 행하지 않으면 그것이 곧 종교적 위선이다. 그러므로 내가 믿은 만큼 말씀대로 행하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도록 애써야 한다.

(25:11-13)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25:28-30)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25:45-46)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영원한 불

지옥은 악을 행한 사람들이 아니라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영원한 불이다. 이웃들에게 행하지 못한 작고 사소한 일들 때문에 마귀의 부하들이 가는 곳에 들어가겠는가? 나를 필요로 하는 이웃들에게는 최선은 다해서 힘껏 베풀어야 한다.

(25: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침 묵

빌라도의 질문에 아무 대꾸도 변호도 하지 않으시는 예수님.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억울할 때가 있으나 억지로 변명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현명하다. 자기를 내세우거나 변호하려 하면 할수록 시끄러워지고 오히려 다른 것까지 합해져서 진흙탕처럼 될 수도 있다. 진흙탕은 내 편과 네 편 할 것 없이 다 뒤집어쓰게 만든다.

(27:12-14)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 



마가복음 일곱 번째 읽기

 

복음의 시작

보통은 당연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넘어가지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분명한 신앙고백으로 시작하는 것은 굉장한 일이다. 아무나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리스도시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병든 자

예수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는데, 교회에서는 의인 된 일꾼을 너무나도 기다리고 그런 사람이 오면 너무나도 좋아하고 환영한다. 교회의 형편이나 여건상 그런 마음이 들 수밖에 없지만, 목회의 본질, 신앙의 본질을 생각하고 어찌하든지 비신자 또는 교회를 떠난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2: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가족끼리

신앙의 본질을 이해하면 율법이나 규례의 정신을 알게 되고 사람들이 보기에 자유로운 행위를 할 수 있게 된다. 신앙은 물론 도를 닦는 것이나 무술을 연마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우선 신앙을 이해해야 한다. 신앙은 가족과 같은 관계를 맺는 것이다. 타인에게는 잘못이나 실수나 조건, 실력과 같은 것으로 따지지만 가족에게는 그런 조건들이 다 사라진다. 물론 할 일을 열심히 해야 하지만 그 일은 곧 자기 일이기 때문에 더욱 열심히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주님과의 관계를 가족 안에서의 관계로 이해하면 자유로우면서도 더욱 열심을 낼 수 있는 것이다.

(2:25-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성도의 구성

교회 안에는 길가 밭의 심령으로 그냥 가끔 다녀가는 성도들, 돌짝밭의 심령으로 환경에 의해 신앙생활이 왔다갔다 하는 성도들, 예배에도 잘 참석하고 봉사도 열심히 하는데 자기 욕심, 이기심에 의해 행동이 결정되는 성도들, 기쁨으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전도의 열매, 인격의 열매를 맺는 성도들이 고루 들어있다. 문제는 자기 심령밭이 변하지 않으면서 자기 수준으로 교회를 판단하는 성도들이다. 성도 자신들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한다.

(4:15-20) “말씀이 길 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적은 믿음

제자들은 적어도 갈릴리 바다와 배타는 것과 고기 잡는 것에 대해서는 가장 전문가들이다. 반면에 예수님은 목수 출신이지 바다의 전문가는 절대 아니시다.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니까 그렇겠지만 전문가들인 어부들이 예수님을 의지하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주님께 맡길 것과 안 맡길 것을 구별해서는 안 된다. 모든 문제, 곧 일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크고 작은 모든 문제에 대해 주님과 동행해야 한다. 주님과 동행해도 문제가 일어나지만 그 문제는 걱정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는 일상일 뿐이다.

(4:38-39)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거라사 귀신들

귀신들도 자기들이 살기 좋아하는 곳이 있다. 그래서 여태까지 살던 동네에서 쫓아내지 않기를 간구하였다. 지역을 점령하고 있는 귀신들은 분명히 있다. 아마 본문의 귀신들은 거라사 지방이 자기들 살기에 가장 좋은 곳이었던 듯하다. 이유는 분명하게 알 수는 없지만 큰 돼지 떼를 기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미치지 않았던 곳이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유대인들에게 돼지는 부정한 짐승이었으니까.

(5:9-10)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구제역

요즘도 구제역 때문에 닭이나 돼지를 수백, 수천 마리씩 살처분하는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는데, 여기 돼지 떼가 2천여 마리나 바다에 빠져죽게 한 것을 보면 혹시 구제역도 마귀의 짓이 아닐까?

(5:13)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더럽게 하는 것

마음에서 나오는 이런 죄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 현재는 나오지 않아도 조건이 만들어지면 언제라도 튀어나오게 되어 있는 죄들이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 마음이 주의 말씀과 성령으로 채워진 상태가 지속될 수 있도록 말씀 속에 항상 붙어 있어야 하겠다.

(7:20-23)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행한 대로

인간은 자기가 행한 대로 보응을 받게 되어 있다.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해야 하고, 주님과 그 말씀을 떳떳하고 자랑스럽고 영광스럽게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로부터 대접을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는다. 하나님 앞에서든지 사람 앞에서든지 내가 한 대로 당하고 그보다 더 당한다. 비판이든 헤아림이든, 또는 대접이든 섬김이든.

(8: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섬김의 종

섬기는 일이나 종이 되는 일을 큰 자가 되기 위해서나 으뜸이 되기 위해서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자기 유익을 위하여 섬기거나 종이 되는 일이란 애초부터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진짜 섬김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섬기고 종이 되어야 하는 일이고 그렇게 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 이 말씀을 듣는 제자들은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지만 예수님을 따라가다가 들은 귀한 원리를 실행했던 것이다.

(10:43-44)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나귀 새끼

나귀 새끼는 생전 처음으로 사람을 태웠는데, 어리둥절한 채로 끌고 가는 대로 끌려갔더니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겉옷을 길에 펴고 나뭇가지를 흔들며 환호성을 지르고 크게 환영하는 것이었다. 사실은 나귀를 환영한 것이 아니라 자기 등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환영한 것이었다. 지도자들이나 성도들이나 전부 나귀새끼 의식이 있어야 한다. 나귀가 아무리 잘 생기거나 색깔이 좋거나 털에 윤기가 흐르거나 힘이 강하더라도 나귀는 나귀이다. 나귀는 예수님을 태우고 목적지에 내려드리면 사명을 완수하는 것이다. 나귀는 예수님을 태우고 가면 된다. 아무리 훌륭한 사역자라도 기껏 나귀새끼에 불과하다는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잊으면 그때부터 자기교만에 빠져서 자기가 영광을 받기 시작한다. 내가 하는 모든 일에서 주님만이 드러나시도록 우리를 낮추고 비워드려야 한다.

(11:7-10)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예수의 제자

예수님은 수많은 군중들의 지지를 받고 계셨다. 이 지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 곧 성도들이었다. 이 성도들로 인하여 예수님은 사역을 때가 차기까지 마음껏 펼치실 수 있었다. 오늘날에는 예수님께서 오셔도 이런 지지를 받기 힘들 것 같다.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담임목사의 말을 더 들을 것 같다. 그러므로 교회의 제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을 많이 만들어주어야 한다.

(12:12) “그들이 예수의 이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두고 가니라


벗은 몸으로

벗은 몸으로 도망친 이 청년은 이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라고들 한다. 옷차림으로 보아서는 적어도 열두 제자는 아닌 것 같다. 부끄러운 과거의 고백임과 동시에 모든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 같다. 신앙의 과정 중에 누구나 몇 번쯤은 부끄러운 신앙의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과 자신 앞에서 솔직하게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자세는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14:51-52)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로마와 예수님

로마 황제 앞도 아니고 본토의 정규군도 아니고 그렇다고 식민지의 총독도 아니고 겨우 변방의 병졸들과 예수님을 비교하면, 그 병졸 한 사람의 권위와도 대적할 수 없을 정도로 예수님은 초라한 모습을 보이신다. 로마 권력에 대항하는 예수님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비참하다. 하지만 예수님께는 그 로마의 황제라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고 헛된 그림자에 불과한 존재로 보였을 것이다. 때로 세상 권력이나 부 앞에 섰을 때 심히 초라하고 무기력해 보일 때가 있을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요 그리스도의 군대임을 명심하고 당당하고 떳떳해야 하겠다.

(15:16-20) “군인들이 예수를 끌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경례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희롱을 다 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믿지 못함

부활하신 예수님은 왜 일곱 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가장 자신을 먼저 나타내셨을까? 마리아의 믿음을 보고 먼저 나타내신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제자들의 믿음은 부족해보였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믿지 못했고,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의 말도 믿지 못했다. 결국 예수님의 꾸지람까지 들었다.

(16:9-13)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그 후에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믿음과 구원

아무리 행함을 중요해도 믿음이 있어야 가능해진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는다. 믿음이 우선이다. 믿음 속에 모든 것이 들어있다. 믿음의 크기, 믿음의 순도, 믿음의 생사는 모두 믿음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을 세상과 하나님님 앞에 증명하자.

(16:15-16)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누가복음 일곱 번째 읽기

 

믿지 아니함

사가랴는 단 한 번 의심의 말을 했을 뿐인데 말을 못하게 되었다. 의심의 말, 불신의 말, 부정의 말 등 하나님의 일에 훼방이 되는 말을 하지 못하도록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방해는 그런 부정적인 말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불평이나 원망이나 불신의 말을 하면 그 사람에게 한동안 말을 못하게 하셨으면 좋겠다.

(1:20) “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영원한 왕

예수님께서 다윗의 왕위를 받으시고 야곱의 집을 영원히 왕으로 다스릴 것이라는 말씀은 얼핏 이스라엘 나라를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늘날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 하나님의 영적 백성을 가리킬 것이다. 믿음으로, 영으로 하나님의 백성된 사람은 야곱의 집에 속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고 예언된 것이다. 우리는 마귀에 속한 나라인 세상의 통치가 아니라 진정한 왕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

(1:32-33)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회개의 열매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세례 요한이 한 말은 신앙적, 종교적인 행위가 아니었다. 생활 속에서 이웃을 돕고 정직하게 살고 거짓으로 강탈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물론 오늘날의 교회 체제와 동일한 시대가 아니기는 하지만 회개의 결과가 삶에서 나타나기 전까지는 진짜 회개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3:11-14) “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퀴 즈

예수님의 할아버지 이름은? 헬리이다. 마태복음과는 다르다.

(3:23)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


주님의 명령

모든 질병은 예수님께서 한번 명령하시면 낫게 되어 있다. 백부장의 믿음은 예수님이 어디에서이든 명령 한 마디면 그 명령대로 이루어진다는 믿음이다. 예수님이 직접 명령하시는 것과 오늘날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어떻게 하면 백부장의 믿음을 소유할 수 있을까?

(7:7-8)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이만한 믿음

믿음이란 병을 고치거나 어떤 이적을 일으키는 수단이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실체에 대한 거대한 신뢰이다. 물론 예수님은 모든 질병을 고치실 뿐 아니라 자연까지도 명하여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어떤 한 가지에 대해 내 믿음으로 고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대한 인격적인 의뢰를 통하여 그분이 하시도록 기대하는 것이다. 흔히 내 믿음이 적어서, 나는 그런 믿음이 없어서라는 식으로 말하곤 하는데, 믿음이란 어린 아이들이 자기 아버지가 고장 난 장난감을 고쳐 줄 줄 알고 장난감을 내미는 것이다.

(7:9)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진정한 마음

예수님 발밑에 엎드려 하염없는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리고 예수님의 발에 입 맞추고 발에 향유를 부어드린 이 죄 많은 여인(창녀)이야말로 자기의 진정한 마음을 보여드린 것이다. 그 진정성은 다른 사람의 눈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는 것에서 증명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찬양하거나 주의 이름으로 섬길 때에는 오로지 주님과 자기 자신만을 의식해야 진정한 찬양과 섬김이 되는 것이다. 항상 이런 진정성을 보여드리고 싶다.

(7:37-38)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등 불

등불을 등경 위에 두는 이유는 등불을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등불의 역할은 빛을 비추이는 것이다. 등불로 인하여 비쳐지는 빛으로 사방을 분별하고 더 명확하게 보게 하기 위하여 등불을 키는 것이다. 이것을 오해하여 자기가 등불인 것을 내세우며 얼마나 밝은가를 자랑한다면 착각도 이만저만 착각이 아니다. 물론 등불은 꼭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그 등불보다 수십만, 수백만 배 빛나는 태양이 비칠 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누구든지 자기 본분만 지킨다면 세상은 참 아름다워질 것이다.

(8:16)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후에 비로소 예수님은 고난당하다가 죽으시고 사흘 만에 살아나신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은 목숨을 내놓아야 할 상황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치신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자이시지만 그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잃으려고 해야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

(9:2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9:22-24)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평안할지어다

평안의 말이나 축복의 말은 절대 손해나지 않는 장사이다. 왜냐하면 상대방이 내 축복을 받아들이면 그대로 이루어져서 좋고 만약에 받아들이지 않으면 나에게 그대로 돌아와서 좋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축복의 말, 평안의 말, 격려의 말, 칭찬의 말을 많이 해야 한다. 하지만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성의 없이 건성으로 해서는 안 된다. 제자들은 지금 돈도 배낭도 가지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중이어서 그만큼 진정성과 절박함이 있는 상태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10:5-6)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좋은 편이란

예수님을 대접하려고 분주한 마르다. 마르다가 아니면 누가 예수님을 이만큼 대접할까? 여기를 읽을 때마다 마르다에게 안쓰러움이 느껴진다. 하지만 예수님은 마리아가 말씀을 듣는 일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다. 이런 사실을 생각하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바빠야 하는 시간은 말씀을 대하는 시간이다. 그것이 도도하게 흘러가는 세상을 거슬러 승리하는 비결이다.

(10:41-42)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몸의 등불

성도는 예수님의 시각을 가지고 예수님이 바라보시는 곳을 예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예수님이 계신 곳에 함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 눈은 성하고 온몸이 밝아질 뿐 아니라 세상을 밝힐 수 있게 된다.

(11:34)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권세 있는 그분

눈에 보이는 권력자들을 두려워하게 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잠시 잊어버리고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이 인간의 일차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큰 경외심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대해 큰 두려움을 가지고 있을수록 세상의 두려움은 작아보이게 되기 때문이다. 권력자들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려면 그보다 영원한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을 더욱 크게 두려워해야 한다.

(12:4-5)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우선순위

초청받은 사람들이 잔치에 가지 않은 것은 그들이 다른 우선순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잔치보다 사업, 일거리, 가정사가 더 급하고 중요하다고 느끼게 되면 잔치에 갈 이유가 없어진다. 그리스도인에게 최고의 우선순위는 예수님의 초청이다. 전 시간을 다 드려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잔치를 중심으로 삶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14:17-20)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둘째 아들

남과 남 사이라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이야기이다. 큰 배신을 한 사람을 검증하는 과정도 없이 다시 그 일을 맡길 수는 없다. 하지만 아들이라면 전혀 달라진다. 아무리 큰 잘못을 해도 다시 회복해 준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니까 마음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아버지가 어떤 의미인지를 잘 깨닫고 철저하게 신뢰하고 의지하고 충성해야 한다는 뜻이다.

(15:21-22)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불의의 재물

이 청지기는 주인을 배신하며 재정적으로 큰 손해를 입혔다. 하지만 그는 자기 살 길을 잘 찾을 만큼 지혜로웠다. 세상의 사람들도 자기 살 길을 찾는 데에 그렇게 지혜로운데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늘의 복을 찾는 데 지혜롭지 못해서는 안 된다. 세상에서는 자기 재물을 지키는 것이 지혜라면 성도들은 세상에서 이 재물을 잘 사용하는 것이 지혜이다.

(16:8-9)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빛의 아들의 지혜

불의한 청지기 이야기와 그 후에 주시는 말씀 사이에는 뭔가 연결이 잘 안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이 불의한 청지기가 세상에서 자기가 살아갈 길을 여는 데 참으로 지혜롭게 대처한 것을 말씀하시면서, 빛의 아들들도 세상의 지혜로운 아들들처럼 영적으로 지혜로워야 한다는 말씀이다. 빛의 아들들의 지혜는 재물을 나누는 것,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 세상에서 남의 일에도 충성하는 것, 하나님만 섬기고 재물을 나누는 것, 이런 일들이 빛의 아들들의 지혜라는 것이다.

(16:8-10)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의롭다 하심

그렇다고 바리새인이 토색하고 불의한 일을 벌이고 간음을 해도 된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금식하지 않아도 되고 십일조를 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뜻도 아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서 자기에 대한 인식을 바로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은 작은 죄에도 예민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바리새인은 종교적인 행위로써 자기의식을 키웠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소중하게 보시는 분이시다. 일단 자신의 의롭고 자랑할 것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의롭지 못한 사람이다. 마음과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의로움이다.

(18:11-14)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장사하라

귀인은 종들에게 한 므나씩 주면서 분명히 장사하라고 지시하였다(19:13). 하지만 이 사람은 귀인이 왕이 되어 돌아와서 찾았을 때 장사하라고 하신 것인지 몰랐다고 대답하는 꼴이다. 모든 일에는 이유와 목적이 있다. 신앙생활에서도 그 이유와 목적과 방향이 다 있다. 그것을 모른 채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일평생 헌신하고도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할 수 있다. 우리는 영적으로 장사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고자 애를 쓰는 사람들이다.

(19:20) “또 한 사람이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19:13) “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사라진 예수님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보게 된 순간 예수님은 사라지고 제자들은 가던 길을 돌이켜 기다리라던 곳으로 향하게 된다. 예수님을 만날 때에는 예수님께서 만나 주셔야 하지만 그 후에는 예수님 없이 가야 한다. 신앙인은 한 번 받은 사명을 자기 마음이나 환경에 따라 쉽게 거두면 안 된다. 한 번 받은 사명은 끝까지 감당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고 일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24: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요한복음 일곱 번째 읽기

 

퀴즈 : 두 개의 베다니

여기 베다니는 요단강 건너 베다니로 나사로를 살리신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가 아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갈릴 바다 근처에서 사역을 시작하셨다. 거기에서 제자들을 부르신 것이다.

(1:28) “이 일은 요한이 세례 베풀던 곳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니라


부르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는 원래 세례 요한의 제자였다. 이들은 그냥 무식한 어부들이 아니라 선지자로부터 가르침을 받으면서 메시아를 대망했던 사람들이었다. 세례 요한과 직접 대면할 정도로 안드레는 가까운 제자였다. 예수님께서 터무니없이 아무나 부르신 것은 아니었다.

(1: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천국수용인원?

여기에서는 구원도 경쟁으로 나타난다. 내가 먼저 내려가면 다른 사람은 못 내려가고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면 내가 못 내려간다. 내가 성공하면 누군가는 내가 성공한 것만큼 손해 보도록 되어 있는 것이 세상이다. 하지만 구원은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르다. 천국 커트라인이나 천국수용인원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같은 동네에서 한 교회가 사람들을 많이 전도하면 다른 교회는 전도가 위축되어 부흥이 늦춰진다. 그래서 지역 안에서 성도가 교회를 옮기면 목사들 사이에 감정이 심하게 상한다. 이런 것을 지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다른 교회 입장도 서로서로 챙겨주어야 한다.

(5: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관 계

요한복음은 관계에 대한 복음서이다. 예수님과 하나님, 예수님과 성도들의 관계에 대해서 자주 설명하시고 그 관계 속으로 들어올 것을 말씀하신다. 목자와 양의 비유,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 친구 이야기 등이 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제자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등에 관한 교훈은 거의 없다. 하지만 관계를 잘 알고 철저한 신뢰 속에서 관계를 이루어나간다면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5:26-27)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살과 피

예수님은 참된 양식이요 참된 음료이다. 그러면 예수님의 살과 피는 무엇일까? 요한복음 1:1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고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그 말씀 안에 생명이 있다고 하셨다. 그러면 말씀이 예수님이고 생명이면 예수님의 살과 피는 말씀을 가리키는 것이다. 성찬식은 기념하고 은혜를 받으라는 것이고, 삶 가운데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를 살리신다. 항상 예수님의 살과 피인 말씀을 붙잡고 말씀 속에서 살아야 한다.

(6:56-57)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1:1-4)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은밀한 예수님

다른 이유도 있지만 예수님은 소문 없이 일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숱한 질병을 고치시고서도 알리지 말라고 거듭 당부하신다. 예수님은 조용하게 일을 진행하시고 온유한 음성으로 가르치신다. 투쟁하고 싸우고 문제를 일으키시는 것이 아니다. 다만 메시아로서 하시는 말씀에 대해 바리새인 등 교권자들이 들고 일어나 문제를 확대시키는 것이다.

(7:10)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에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은밀히 가시니라

(12:19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예수님의 교훈

기독교의 가르침은 말씀대로 행하려고 하면 전통적인 신앙상식과 어긋나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 말씀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사실 내적으로는 그 말씀이 참인지 거짓인지 잘 알고 있다. 고집이나 자존심이나 명예욕구 때문에 회피하는 것일 뿐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언제나 벌거벗을 수 있는 신앙인들이면 참 좋겠다.

(7: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거짓의 아비

욕심, 살인(미움), 거짓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일차적으로 자신이 마귀의 수하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이 마귀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마귀의 속임수 안에 있다. 무엇을 얻으면 참 행복을 얻을 것 같은 거짓으로 사람들을 속인다. 일을 하는 방식에도 거짓이나 속임수가 들어있다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이 아니다. 진리는 결과보다 과정이 핵심이다. 아무리 의도가 좋고 목적이 선하다고 해도 과정에 거짓이 들어가면 단지 마귀의 쓰임을 받고 있을 뿐인 것이다.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말씀을 지키면

말씀을 지키면 그 말씀 곧 예수님이 속에 거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니고 또 육신이 죽어도 주님과 함께 영원토록 영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말씀을 참 진리로 믿는 사람만이 말씀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다. 신앙고백을 아무리 철저하게 해도 그 고백을 지키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그 고백은 가짜가 되는 것이다. 특별한 사람들만이 말씀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으로는 많이 부족하다. 과정이야 있겠지만 그 과정을 이겨내는 것이 신앙이 아닌가?

(8:51)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목자의 음성

이 비유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처럼 이스라엘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난 일을 밑도끝도 없이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비유는 제자들에게는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이 된다. 예수님과 성도의 관계에 대해서 가장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시는 것이다. 이 비유를 생각하며 점점 더 예수님을 신뢰하게 될 것이다.

(10:1-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신성모독

예수님께서 행하신 선한 일을 보면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의심 없이 믿을 수 있는데,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신성모독이라고 몰아간다. 인간이란 참으로 자기 코앞에 있는 것밖에는 못 보는 것 같다. 당장 손해 보는 것, 당장 자존심 상하는 것만으로 세상을 판단하는 것이 인간이다. 하긴 요즘은 자칭 하나님 어머니도 나타났고 또 그걸 믿는 사람들도 많은 세상이기는 하다.

(10:33)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사람의 영광과 하나님의 영광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출교 당할까봐 두려워하는 바리새인들 역시 바리새인이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 역시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아예 그런 특성이 일반화되어 이 땅에서의 이기적, 자기중심적 신앙이 판을 치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참 안타깝다.

(12:42-43) “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서로사랑

포도나무 비유를 이야기할 때 우리의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께 붙어있어야만 한다는 말은 많이 한다. 여기에서 붙어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것은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고,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고, 계명은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다는 것은 우리끼리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15:9-10)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보전하시기를

예수님의 기도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문제를 만나거나 어려움을 당할 때 그것을 피하거나 숨는 것이 아니라 싸워 이기거나 견뎌내는 것이며, 그 이겨내는 과정에서 시험당하거나 넘어지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다. 신앙은 피하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것이다. 그 위기를 피해버리면 영원히 성장하지 못한다.

(17:15)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두려움

재물이 많아서 그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는 말씀을 듣지 못하고 근심하면 돌아간 청년이나 유대인들이 두려워 자기의 사회적 지위를 버리지 못한 아리다매 요셉이나 동일한 사람인 것 같다. 물론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 사후에 무덤을 드리기는 했지만, 사건이 지나간 후에는 예수님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 아닐까?

(19:38)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