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복음서 반복읽기

사복음서 7독 후기 : 고민과 갈등

김완섭 목사 2017. 11. 21. 11:11

사복음서 7독 후기 : 고민과 갈등

      

이제 7독까지 다 마쳤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이야기에 푹 빠져서 때로는 마치 제가 제자들 중 한 사람이 된 듯, 때로는 예수님이 지금 여기에 계신다면 뭐라고 하실까 등을 생각하면서 그 때 그 때 다양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기적의 현장에서 제자들과 함께 놀라거나 수많은 군중들에 둘러싸여 병 고치시는 현장에 서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생생한 모습을 가슴 두근거리며 지켜보는 듯한 느낌도 가졌습니다.


그런데 복음서를 거듭 읽어나가면서 가슴이 뻥 뚫어져 아무 것도 남지 않은 허전함을 느끼거나 아니면 사방이 꽉 막혀서 암담하기 그지없는 것 같은 그런 느낌들이 간간이 밀려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우리의 신앙을 원래대로 돌려놓고 싶은 목적이 있기는 했지만 예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 듯한 상황에서는 신앙을 회복한다는 말조차도 송구스럽기만 한 것이었습니다.


신앙을 어디까지 회복시킨다는 것인지,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 회복시킨다는 것인지, 그리고 그것을 감당한 말한 실력도 주체도 되기는 하는 것인지 등 오히려 더 깊은 사막 한가운데로 들어가 버린 것 같았습니다.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조차도 제대로 알고 있기나 한 것인지, 예수 믿는다고는 하지만 정말 예수님이 원하시는 길에 서 있는지, 이런 생각이 저를 더 혼란스럽게 하고 흔들리게 하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말씀을 저 자신과 비교해 볼 때 말씀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자기 발견에서 출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동안 나름대로 말씀에 충실하려고 애를 썼고 비교적 세상 욕심에서 떨어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을 용서하지도 못했고, 재물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지도 못했고, 정말 목숨까지 내놓을 정도로 충성하고 있지도 못했고, 불의를 향하여 생명의 위협까지 감수하지도 못했습니다. 꼭 그렇게 해야 예수를 잘 믿는 것은 아닐 수 있겠지만 믿음으로 동의하고 고백하는 수준을 넘어서 그 믿음이 세상 속에서 타인을 위한 행동으로 얼마나 드러내었는가에 대해 물어본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아낌없이 주신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얼마나 크게 받았는가를 생각할 때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때로 신앙생활이 이건 아닌데, 뭔가 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자주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겨우 이렇게 살라고 우리를 불러주신 것은 아닌데, 적어도 이것보다는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데 하는 생각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복음서를 반복해서 읽으니까 그러한 생각들이 더 분명해지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를 변화시키거나 바꾸기는커녕 저 자신도 주님 앞에 순결과 충성으로, 세상을 향하여 섬김과 희생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 저의 실제모습일진대 복음서를 읽으면서 오히려 저의 부족함과 연약함과 어리석음과 미련함과 기도부족과 믿음의 결여가 드러났기에 무슨 일을 시작한다는 것 자체가 두려움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연약함이 하나님의 일을 망치는 것은 아닌지 심히 염려되는 마음까지 생겼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죄악에 대해서 둔감하고 당장 겉으로 나타내 보이는 것에 욕심을 나타내며 나의 자존심이나 명예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민감한 것이 지금 나의 모습일진대, 과연 남은 여생을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애쓸 수 있을 것인지 자신감이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물론 그럴수록 내가 약하기 때문에 더욱 주님을 의지해야 하겠고 또 일을 하다가 보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취되는 일들도 있을 것입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만 더욱 깊게 느낄 뿐이었습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현재 우리 신앙인들의 삶이나 생각과 비교해 볼 때 방향이 전혀 다르다는 점에서 출발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구의 탓이랄 것도 없이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신학자, 목회자들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만,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삶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신앙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더 확실하게 확인한 것입니다. 물론 성경의 가르침이 세상적인 측면에서는 너무 비현실적이고 지나치게 이상적인 모델만 제시하는 듯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믿음이 약한 성도들에게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그냥 참고사항 정도가 되어버리는 경향을 피하기도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주님께서 제시하신 방향성을 깊이 인식하고 그것을 푯대삼아 자기를 낮추어가는 모습이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이 되어야 하는 것은 두 말 할 필요조차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 속에서 펼쳐지는 모습은 세상이 추구하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은 것을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지 않았습니까? 성경을 단순하고 순수하게 읽으면 읽을수록 이러한 괴리는 더욱 크게 느껴지는 것이 현실적으로 부딪히는 장벽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제가 목회하던 작은 교회의 모습만 보아도 성도들을 주님의 마음을 가진 작은 예수들로 키워나가고 싶었지만, 첫째는 담임목사인 저의 역량의 부족이었고, 현실적으로는 세상이 너무나도 급격하게 변화하여 성도들이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기에 너무 많은 장애요소들이 있어서이기도 했고, 그러다 보니까 말씀을 받아들이는 기본자세부터 바로잡아나가기가 몹시도 힘이 들어서 생각한 만큼 성도들의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했습니다.


물론 신앙을 지도하면서 여러 해가 흐르면 자연스럽게 교회생활에 적응하고 일꾼으로 변화되어가는 그런 모습들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모습만으로 작은 예수들이 되었다고 하기에는 신앙 본래의 모습과는 동떨어지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사실 교회에 정착하고 일꾼이 되어가는 그 자체가 귀한 것이고 또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런 신앙의 모습이 너무나도 현실적이며 세속적이며 기복적인 모습이기 때문에 거기에 심각한 고민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변에서 믿음이 좋고 신실한 성도들도 보면 결국 세상적인 것,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것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또 가족들에 관한 소망들, 개교회에 대한 비전들을 보아도 자기 희생이나 헌신, 나눔, 자기포기나 낮춤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모습들에 대해서는 늘 마음 아파해왔지만, 복음서를 말씀 그대로, 들리는 말씀 그대로 읽어나가려니까 더더욱 안타깝고 죄송한 마음이 너무나도 커져만 가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기독교 전체가 예수님의 진정한 말씀과는 상당히 큰 괴리감을 가지고 있고 말씀이 아니라 교리나 종교전통에 지나치게 몰입되어 있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된 것이었습니다. 신앙인이라고 하여 현실적인 문제나 기독교 전통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은 물론 아닙니다. 다만 다른 모든 것을 떠나서 예수님과,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말씀과 일치되는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를 현실 속에 구현하려는 그런 마음이 그리스도인의 본질적인 마음이 되어야 하겠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예수님의 말씀에 절대순종하며 어찌하든지 예수님을 닮아가는 일에 모든 초점을 맞추어야 할 목회자들의 현실적인 모습에서 넘어갈 수 없는 절벽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에게서 나타나는 이러한 불신앙의 현상은 성도들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들에게 더욱 널리 퍼져 있는 것이 또한 현실이라는 데에 더욱 큰 안타까움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이상적으로 목회를 잘 하는 목회자라도 성도가 신앙생활 때문에 망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며, 되도록 기도응답을 잘 받고 복을 많이 받기를 바라는 것이 모든 목회자의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어려움 앞에서 고난을 이겨내라고 가르치기보다는 고난을 피하라고 가르치거나 고난을 당하지 않도록 기도하고 인도하려는 유혹을 피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목회자들은 성도들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많은 희생과 헌신을 다합니다. 아무리 교회가 어려워도 교회를 접지 않으려는 것이 목회자의 마음이고, 끝까지 사명을 감당하려는 결단이 목회자들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로부터 아무리 상처를 크게 받아도 그것 때문에 목회를 그만두거나 성도를 미워하여 대적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목회자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구원한다는 일념으로 언제나 목회 현장에서 고군분투합니다. 참으로 목회자들의 일생을 건 결단은 높이 사지 않을 수 없으며, 어떤 고난에도 이겨내려는 그 모습은 칭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목회자들의 그러한 마음과는 별개로, 그러한 일평생의 노력이 정말 예수님이 원하시는 일인가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알고 있고 교제를 나누며 만나고 있는 대다수의 목회자들은 이런 열심과 인내로써 모든 어려움들을 극복하고 있는 분들입니다. 그런 점들은 존경을 받을 만하고 인정해드려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노력이 정말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적용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자신 있게 그렇다고 말하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느냐를 본다면 어떤 면에서는 하늘의 소망,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소망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나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이 땅에서의 성공이나 출세, 자기소망을 이루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의 성공과 번영과 치유와 복을 바라는 모습은 성도들에게서 쉽게 나타나는 현상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것 또한 사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성도들은 목회자들의 모습을 그대로 닮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제가 다른 목회자들보다 더 헌신적이거나 더 옳다거나 더 주님과 더 가깝다거나 하다는 이야기가 결코 아닙니다. 저의 목회 15년도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을 지녀왔던 것 또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물질을 뒤쫓거나 성공을 위해 애를 쓴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더 의지하지 못했고 저 자신을 더 복종시키지 못한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러면서도 늘 스스로 생각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현재 이것보다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내가 그 때 조금 더 기도하고 주님만을 바라보았다면 충분히 이겨낼 수 있었던 일인데, 그 때 내가 조금 더 성령님께 지혜를 구했었다면 성도들을 조금 더 진리의 길로 인도할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저의 목회여정에 대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늘 느끼면서 주님께 죄송스럽고 성도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지금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복음서 반복읽기를 진행하면서 제가 아주 깊이 느낀 것은 열정이나 희생이나 낮춤과 같은 성품적인 면들보다 제가 성경을 깊이 있게 알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더 깊이 있게 이해했더라면, 주님의 말씀의 뜻을 더 정확하게 알았었다면 제가 겪었던 어려움들 중 많은 부분을 겪지 않아도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까지 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단지 이번 성경반복읽기에서만 느낀 것은 아니지만, 반복읽기를 통해서 제가 더욱 정확하게 느낄 수 있었고 최근에 깨달은 사실을 더욱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비판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지만 작은 교회 목회자들은 현상유지와 눈앞에 닥친 어려움들을 극복하기에 바쁘고, 자리가 잡힌 큰 교회 목회자들은 현실교회들의 필요성에 부응하느라고 이런 점들을 고민한 겨를이 없어 보입니다. 일견 그렇게 보인다는 말입니다. 또 다른 한편 똑똑하고 실력 있는 목회자들은 또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느라고 여념이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되지 않았냐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거의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그렇게 열심히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면 그것으로 된 것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헌신하는 목회자들이 사실은 말씀의 핵심에서 벗어나 있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열심히는 하는데 주님과 별로 관계없이 일한다면 그러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충성된 목회자들이 최선을 다해 희생하며 헌신하고 있지만, 만약에 그런 충성이나 헌신이 바리새인화된 것이라면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만나면 참 훌륭한 목회자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인품도 훌륭하시고 겸손하시고 사랑도 많으시며 정말 충성하시는 그런 분들이 참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제가 안타깝게 느끼는 것들은 저의 편견이거나 무식해서이거나 또는 목회자로서의 열등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은 그래서 저는 목회자들에 대한 비판을 입에 올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것이 맞는 이야기라면 그러면 목회자들이 번영신학에 빠지고 성공목회에 몰입하고 은사만을 좇아가는 모습들을 나타내 보이는 것은 왜 그런 것일까요?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불의를 비판하지만 사실은 무의식적으로 자신도 대형교회 한 번 해보고 싶은 마음은 없는 것일까요? 세속적인 신앙을 비판하면서도 사실은 자기도 성공해보고 싶은 마음은 없는 것일까요? 병든 성도를 위하여 기도할 때 치유가 되지 않는다면 괜히 그런 은사를 가진 기도원 사역자들에게 기가 죽거나 무조건적으로 비판하고 있지는 않는 것일까요?


사복음서 8독까지 하면서 저 자신을 비롯하여 정말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헌신과 희생과 손해와 사랑으로, 이 세상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만을 위하여 목숨까지라도 아까워하지 않을 그런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더 강하게 느끼게 됩니다. 성도들이 실패하더라도 주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로 만들어나가기보다는 목회자 자신까지도 뭔가 성공하고 성취하고 결과를 만들어나가는 데 더 힘을 쏟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번에 성경을 반복해서 읽으면서 말씀에서 받는 은혜와 깨우침과 사랑받는 느낌, 생명의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그런 즐거움도 경험하고 있지만, 반면에 그보다 더 깊고 분명한 아픔과 괴로움을 느끼게 되는 것의 저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읽어나가는 과정에서 주님과 동행하거나 직접 만나고 있거나 하는 느낌은 분명히 크고 깊었지만, 뒤돌아섰을 때 뭔지 모를 공허감이나 암담함이 저를 엄습하게 된 것은 오히려 저에게는 아주 좋은 기회요 주님의 사랑을 더더욱 깊이 느끼게 되는 계기였음이 분명합니다.

회개란 깨달음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자기 죄에 대한 발견 없이 어떻게 회개가 일어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말씀 앞에 섰을 때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변화도 없고 성장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세상소식 끊고 사복음서 새로읽기는 참으로 귀한 은혜의 시간이요, 진행하기는 힘이 들었지만 가장 베스트의 순간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1cm라도 주님께 다가갈 수 있었던 이 시간들에 대해 참으로 하나님께 뜨거운 감사를 드리며 영광을 돌려드리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