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복음서 반복읽기

요한복음 여섯 번째 읽기

김완섭 목사 2017. 11. 7. 11:57

사복음서 반복읽기 

4주 동안 세상소식 끊고 사복음서만 8회 반복읽기했습니다.


요한복음 여섯 번째 읽기

 

와서 보라.

예수님이 안드레에게,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한 말은 와서 보라.”였다. 실제로 예수님을 만나서 알아보고 대화를 나누어보고 진리를 찾으라는 말이다. 우리의 삶의 현장도 비신자들에게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삶의 현장이 너무 어질러져 있어서 그렇게 못하고 있다. 대신 교회에 와서 보라는 말로 대체해왔지만 가치관이 확 달라진 젊은 사람들에게 교회가 보여줄 것이 별로 없다. 예수님의 삶의 원리를 따라가는 교회가 되도록 바꾸는 수밖에 없다.

(1:39)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1: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물을 채우라!

항아리를 물로 채우는 것은 하인들이 일이고 채워진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것은 예수님의 일이다. 물로 만들어진 포도주로 섬기는 것도 하인들의 일이다. 하인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그들이 포도주로 만들 수는 없다. 우리는 부지런히 물을 채워야 한다. 사랑으로, 수고로, 나눔으로, 희생으로 우리 삶의 현장을 채울 때에 주님께서 놀라운 기적을 베푸시고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게 만드신다.

(2:7-10)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믿음과 행위

요한복음에는 주로 믿음에 관한 말씀과 관계에 관한 말씀을 많이 주신다.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믿음에 관한 말씀이다. 믿기만 하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신다. 하지만 이 말씀을 보충하는 말씀이 21절에 나온다. 믿음의 행위는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이라고 하여 믿음이란 행위가 따라오게 되어 있음을 말씀하신다. 의무조항이 아니라 진실된 믿음을 가지면 행위가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말씀이다.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3:21)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믿음과 순종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요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진노라고 하신다. 곧 믿는 것이 순종이라는 말씀이다. 행동이 나타나지 않는 믿음은 실체가 없거나 죽은 믿음이다.

(3: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예수님 안에서

이제 사마리아 동네 사람들과 남편을 다섯이나 바꾼 죄 많은 이 여인이 서로 소통하게 되었다. 동네 사람의 눈을 피해서 뜨거운 한낮에 물을 길으러 왔던 여인이지만 이제는 동네 사람들과 함께 한다. 복음의 힘은 모든 사람을 통하게 하고 죄인 된 여자도 일원으로 받아들게 만든다.

(4:40-42)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생명의 부활

여기에서도 믿음의 결론으로 행함을 말씀하신다. 믿는 일과 선한 일을 행한 것을 동격으로 놓으셨다. 믿음이란 자연스럽게 행함이 따라오게 되어 있다. 하지만 그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는 우리가 알기 어렵고 주님만이 아신다. 그래서 구원은 주님과 일대 일의 관계에서 나오게 되어 있다. 아무튼 믿음은 따라가는 것이고 닮아가는 것이다.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진짜 이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는 표적을 보고 따라온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은 떡을 보고 따라온다. 오늘날로 하면 성공, 물질, 출세, 건강 등 세상에서 잘 되는 일을 위해 따라오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좀 그런 축복론에서 벗어나서 예수님을 따라가고 예수님 말씀대로 행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자. 초대교회가 예수님을 따라 말씀대로 행함으로써 세계를 정복한 것처럼.

(6:2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살과 피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표현은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날마다 먹고 마셔야 살 수 있듯이 날마다 예수님을 부둥켜안고 함께 생활해야 한다는 뜻이다. 단순히 성만찬 예식을 행함으로써 그 의미를 기념하라는 것이 아니다. 참다운 성만찬은 날마다 우리 삶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6:54-55)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증 언

기독교가 살아나면 기독교가 세상을 살기 좋고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오히려 제자들을 미워하고 주님을 미워하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세상을 악하다고 증언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도 세상을 악하다고 증언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러면 세상에서는 미움을 받겠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퍼져간다.

(7: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


공의로운 판단

외모, 곧 세상에서 보이는 모습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공의, 곧 성경에 근거해서 판단해야 한다. 하지만 목사라고 할지라도 성경이 아니라 세상에 서 있는 자기 입장에 서서 판단하기 일쑤다. 자기 입장이 없을 수 없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수용하기가 심히 어렵지만 그래도 주의 종이라는 목사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과정이 있더라도 결론은 공의로 판단하는 것이어야 한다.

(7:24)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


말씀을 지킴

예수님을 믿고 그 말씀을 지키면 영생을 주신다.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말씀대로 행동한다는 것이다. 이 땅에서 행동으로 보여드렸는데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영생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육신의 행함으로 나타나지만 육의 행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의 믿음이 증명되고 영생이 주어진다. 영이신 하나님을 섬기면 이 땅의 것을 더하시고 육으로 이웃을 섬기면 영의 복을 주신다. 이것이 팔복의 원리이다.

(8:51)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침을 뱉어

왜 꼭 침을 뱉어 진흙을 이기시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실까? 유대인의 규례에 의하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 중에 반죽하는 일이 들어 있는데 진흙을 이기는 것이 반죽하는 것이다. 또한 안식일에 침을 바르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데 침으로 진흙을 만드심으로써 이것을 어긴 것이다. 결국 예수님은 잘못된 안식일 규례를 의도적으로 어기신 후에 안식일에 대한 바른 개념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으면 바리새인들의 안식일 준수처럼 한낱 종교로 전락해 버리게 되는 것이다.

(9:6-7)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신성모독죄

신성모독이란 원래 없는 죄목이다. 왜냐하면 신성은 하나님께서 판단하시는 일이고 신성을 모독한 사람을 벌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성령모독죄는 말씀하셨지만 신성모독은 말씀하지 않으셨다. 종교가 되면 교권자들이 자기들 유리한 대로 마음대로 심판하게 된다.

(10:33)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진정한 찬양

예수님께서 오빠 나사로를 살리신 후에 마리아는 진심으로 예수님을 찬앙하였다. 하나님 되시는 예수님께 대해서는 그 어떤 것을 다 드려도 갚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느끼고 깨닫고 있었다. 깊은 감사와 함께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린 것이다.

(12: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따름과 섬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에서 자기에게 소중한 것(목숨, 인생 등)에 우선순위를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명을 미워한다는 것이 생명을 예수님보다 후순위에 둔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될 때에 주님 계신 곳에 나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주님을 마음으로 섬기는 것이 곧 영생의 지름길이다.

(12:25-26) 자기의 생명(영혼)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영혼)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행하신 일

자유주의자들은 역사적 예수 연구를 통하여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이다. 육의 눈으로는 부인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처럼 주께서 행하신 일들을 보면 주님을 믿을 수 있다. 믿게 되는 과정과 신앙생활 중에 경험한 일들, 놀라우신 성령님의 임재 등 나와 주변에 나타내어주신 일들을 보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예배 잘 드리고 사역을 열심히 해도 예수님과 관계없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할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는 것이다.

(14: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서로 사랑이란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을 생각하면서 서로 사랑해야 한다.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우리 교회, 우리 노회, 우리 교단에만 주시는 말씀이 아니다. 오히려 지역 속의 모든 교회와 성도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지역에 있는 교회, 목회자, 성도들이 서로 교통하며 사랑하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목적이다.

(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