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복음서 8독 총정리 : 성경을 성경으로 읽으려면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우리에게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 정상적인 것일까요? 즐거워지고, 감사가 저절로 나오며 은혜가 더욱 넘치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말씀을 읽을 때 슬퍼지고 자기모습을 발견하고 괴로워지며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져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말씀을 대할 때 다른 사람의 죄가 생각나고 고쳐져야 할 교회의 모습이 보이며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에 대해 비판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야 하는 것일까요? 물론 이런 모습들은 모두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나타날 수 있는 현상들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은혜롭기만 하며 세상에 대해 비판적인 현상만 나타난다면 그 사람은 어쩌면 성경을 잘못 읽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부족함이 떠오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혈의 공로로 자신을 구원하신 그 은혜에 대한 감격이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또 성경을 읽으면서 세상에 대한 분별력이 생겨서 죄악과 거짓의 세상을 대하는 바른 태도를 배워야 하는 것도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거기에서 그친다면 어쩌면 말씀 속에 갇힌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깨어짐이 없이는 변화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깨뜨려지는 책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자아가 깨져야 합니다. 고집이 사라져야 합니다. 자기 지식이 쓸모없음을 느껴야 합니다. 경험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부서져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말씀의 본질이요 핵심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 내가 사도 바울이 되거나 내가 모세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설혹 내가 모세나 바울이 되더라도 모세나 바울이 실패했을 때, 무너졌을 때의 모습이 내 모습이 되어야지, 모세나 바울이 하나님의 엄청난 일을 감당했던 놀라운 모습의 나의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결국 하나님 앞에서 보잘 것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내가 쫓겨난 사울 왕이 되고 내가 간음했다가 책망 받은 다윗이 되고 내가 아간이 되고 내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되어야 성경을 제대로 읽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내가 부인을 누이동생이라고 속였지만 하나님께서 편이 되어주셔서 보호해 주셨을 때의 아브라함이 되거나(창 12:10-20), 구스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고 비난하는 누이동생을 하나님께서 나병에 걸리게 하셨을 때의 모세가 된다면(민 12:1-16) 그 사람은 아주 아주 성경을 잘못 읽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 우리들 주변에서도 심심치 않게 발견되고 있습니다.
복음서를 읽으면서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시고 물위를 걸으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고 죽은 사람을 살리신 것만 보이고, 다른 사람을 일체 비판하지 말고 모든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생명까지도 아까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섬겨야 하며 이웃을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에 걸림이 되거나 고민하거나 괴로워하지 못한다면 그것도 말씀을 피상적으로 읽은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말씀을 읽되 말씀 속에 잠겨서 말씀을 깨닫는 것 자체가 신앙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그것은 관념적인 신앙, 피상적인 신앙, 상상 속의 신앙으로 멈추어버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를 착각하게 만드는 신앙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감각으로 느끼는 신앙에 그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음식을 보기만 하거나 냄새만 맡을 뿐 실제로 먹지 못한다면 육신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보기에도 먹음직스럽고 냄새로 침샘을 자극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것도 음식의 맛을 결정하는 실질적인 요소가 되니까요. 하지만 아무리 맛있는 것을 느끼고 냄새가 좋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먹지 않으면 육체에 유익을 주지 못할 뿐 아니라 음식을 먹고 싶은 욕구로 인하여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주어 오히려 마음까지 병든 모습을 보일 수도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배고픔을 느끼다 못해 나중에는 그것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쇠약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음식은 못 먹으면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지만, 말씀에서 얻을 수 있는 영적인 현상에 대한 가르침 곧 말씀의 모양이나 말씀의 향기에 오래 노출되면 실제로는 먹지 못하는데 풍성하고 배부르게 먹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는 데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말씀을 많이 아는 사람들은 자기 영성이 그런 수준에 와있다고 착각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좋은 설교자의 신선하고 풍성한 설교를 들으면서 신앙생활을 하면 그 풍성한 말씀의 수준이 곧 자기 영성의 수준이라고 착각하기 쉬운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어떻게 읽어야 하는 것일까요? 어떤 식으로 읽어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시는 그 말씀을 있는 그대로 깨달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성경을 어떻게 묵상해야 정말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성경을 공부하되 어떻게 해야 자신의 신앙이 살아있는 신앙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그런 방법이 있기나 한 것일까요? 저는 이번 ‘세상소식 끊고 사복음서 새로읽기’를 통해서 성경 제대로 읽기의 일단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닐 수 있어도 정말 성경을 성경으로 읽을 수 있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학도 중요하고 연구도 중요하지만 우선은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수 있는 관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그토록 중요할까요? 우리는 자신에게 소용이 되는 말씀, 관심이 큰 말씀에 집중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주변에서 지인들에게 자주 하나님의 말씀을 SNS로 전달해주는 분들이 계십니다. 아주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삼아 그 말씀을 붙잡고 승리하게 만들고 싶은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런 말씀이 그 사람의 일상의 삶 가운데에서 힘이 되는 경우도 있고, 은혜가 넘치게 만들기도 합니다. 말씀을 붙잡고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말씀을 전달해주시는 분도 그런 큰 기대를 가지고 노력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날마다 전해주는 그 말씀은 주로 어떤 말씀이 되겠습니까? 위로하고 격려하고 내 편이 되어 주시고 힘을 주시고 깨닫게 하시고 승리하게 해 주는 말씀들일 것입니다. 이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이런 말씀들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일, 곧 말씀을 날마다 마음에 품고 살아가려고 애쓰는 이 일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생각해볼 때 만약에 날마다 이런 말씀들만 품고 세상을 살아가려고 한다면 어떤 현상이 나타날 수 있을까요? 아마 자기변화나 성장이 많이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왜냐하면 이런 말씀들은 대개 성도 자신이 중심이 되는 말씀들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깊이 들어가 볼 때 진정으로 세상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승리하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일이 이 땅에서 이루어기를 바라며 많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 일을 통하여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기를 진정으로 원해서 그렇게 하는 경우도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경우에는 자기중심적인 신앙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근래에 들어서 교회 안에서 치유라는 말이 주요 테마가 된 것 같습니다. 치유란 원래 육체적으로 병든 사람을 고치는 것을 뜻하지만, 요즘은 마음의 상처나 영적인 아픔을 회복시키는 것을 전부 치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치유가 잘못되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육체의 질병뿐 아니라 모든 연약한 것들을 전부 고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마 9:35)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이런 권능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마 10:1)
그러므로 치유하는 것은 굉장히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조금 깊이 생각해보면 치유라는 말도 결국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예수님께서 이런 약함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의 고통 가운데 생명을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우리의 죄악과 고통과 아픔과 병든 것과 약한 것은 주님께 전부 맡겨드렸습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죄와 연약함은 이미 주님께서 전부 감당하셨습니다. 이미 사함 받은 죄를 또다시 반복해서 회개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이미 맡아주신 아픔과 고통과 약함을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끄집어내서 또다시 고쳐달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행처럼 교회 안에서 번지는 치유사역은 어떤 면에서 자기중심적인 신앙만 키워내는 결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 믿을 때 회개와 치유가 이루어졌다고 해서 그것으로 완성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신앙이란 깊이 깨달아갈수록 오히려 자신의 부족함과 죄성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일수록 작은 죄에도 민감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니까요. 그러므로 끊임없이 아픔이 일어나고 죄성이 드러나는 것이 신앙인이고 그렇다면 끊임없이 회개가 일어나고 치유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 또한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상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유라는 것이 오히려 비성경적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이 치유라는 것도 지극히 자기중심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치유라는 것은 신앙인이 예수님 편에 철저히 서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고통을 당할 때 예수님 편에 서면 저절로 아픔은 물러갑니다. 어려움 당할 때 예수님 편에 서면 그 문제는 당연히 물러갈 것입니다. 마음속에 원한이나 상처가 있을 때에도 예수님 편에 서면 자연스럽게 상처들은 치유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치유는 그렇게 일어나는 것이며 그렇게 일어나야 합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치유가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신과적인 치유, 심리적인 치유가 필요할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이 말의 초점은 치유가 자기중심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치유적인 말씀,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말씀, 용기를 주고 담대함을 주는 말씀이 분명히 필요할 때가 있고 또 성경이 존재하는 이유 중의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말씀들에만 치중하다 보면 자칫 자기중심적이거나 자기 합리화에 머물기 쉽다는 말입니다. 그런 말씀에만 집중하고 그런 말씀들만 날마다 마음에 품게 되면 신앙의 성장이나 영성의 향상은 이루어지기 힘들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게 되면 자기변화나 신앙의 개혁이나 세상에 대한 영향력은 다 사라지게 되기 쉽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을 대할 때 그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는 것이 중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자기중심적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말씀 중심으로 읽어야 합니다. 곧 성경은 예수님 중심으로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신앙이 아직 자라지 못했을 때에는 자기중심적으로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천재라도 어린아이일 때에는 그냥 어린아이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어른이 되어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 덩치는 어른인데 마음은 어린아이인 어른 아이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애석하게도 신앙인들이 말씀을 대할 때 이런 자세로 대하는 경우가 많고, 그렇기 때문에 수십 년 신앙생활을 했으면서도 여전히 영적인 어린아이로 남게 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더 큰 문제는 자기만 어린아이 상태로 남아 있으면 다행인데 그 어린 신앙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교회에 걸림돌이 되어 버린다는 데 있습니다. 비뚤어지거나 변형된 형태의 신앙이 더 이상 자랄 기회를 얻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성경으로 읽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제가 그런 것을 지적하지 않아도 성경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음으로써 신앙이 잘 자라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기능을 잘 감당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 쓰임 받고 있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가 오늘날까지 구원의 방주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오늘날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이러한 것들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성경으로 읽기 위해서는 말씀을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중심적으로 자신에게 필요하다고 느끼는 말씀만 읽게 되는 현상을 사라지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읽게 만들어주는 좋은 수단이 바로 성경반복읽기라는 것을 이번에 깊이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읽고 싶어도 자기에게 소용된다고 느끼는 말씀에만 치중하기 쉬운 것이 우리들의 실제 모습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통독이나 말씀묵상이나 성경공부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기 쉽습니다. 그런 현상을 최소한으로 줄어들게 만드는 방법이 바로 반복읽기라는 말입니다.
성경반복읽기가 홍수에도 마실 물이 없게 되는 것과 같은 말씀의 부재현상을 해결할 수 있는 아주 탁월한 대안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제자훈련과 성경공부와 좋은 설교가 넘쳐나는 오늘날에 오히려 기독교 진리는 쇠퇴하고 있는 현실의 측면에서 볼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말씀반복읽기를 통해서 자기가 듣고 싶은 말씀만이 아니라 구석구석에 숨어있는 영의 양식을 섭취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신앙의 쇠퇴는 말씀의 쇠퇴에서 비롯됩니다. 말씀의 양이 적어서라거나 좋은 말씀을 취할 수 있는 기회가 적어서가 아니라 말씀을 말씀 그대로 순수하게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말씀이 쇠퇴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반복읽기만으로 모든 것이 되살아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거기에는 또 다른 대안이 필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성경반복읽기로부터 새로운 말씀운동이 시작될 수 있음을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성경반복읽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하게 소망합니다.
'사복음서 반복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복음서 7독 후기 : 고민과 갈등 (0) | 2017.11.21 |
---|---|
사복음서 일곱 번째 읽기 (0) | 2017.11.21 |
사복음서 6독후기 : 말씀대로 살려면 (0) | 2017.11.07 |
요한복음 여섯 번째 읽기 (0) | 2017.11.07 |
누가복음 여섯 번째 읽기 (0) | 2017.1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