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복음서 6독을 마치면서
말씀대로 살려면
지난 3주 동안 복음서를 매일 3시간씩 읽고 중간 중간 느낌들을 기록하고 정리하면서 비로소 성경을 읽는 일이 조금은 자연스럽게 되었습니다. 부담스럽거나 집중이 잘 안 되거나 읽기 싫은 느낌 등은 거의 들지 않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세상 소식에 대해서도 처음 시작할 때와 비교하면 거의 무덤덤해지고 별 관심도 생기지 않게 되었습니다. 성경 읽기 말고 다른 일을 거의 하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성경을 이렇게 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았습니다.
물론 성경을 읽는 이유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생각하고 그 은혜를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어떤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지침을 얻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아니면 정말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 옳은 일인가를 확인하고 싶을 때도 성경을 읽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말씀 속에 계신 주님과 만나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매일같이 성경을 읽으면 잘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새삼스럽게 발견하고 놀라워하기도 하고 죄와 유혹이 올 때 그것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기도 합니다. 또한 세상에서 살다가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믿음으로 인한 핍박이 올 때 말씀을 통하여 힘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읽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목적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변화’입니다. 설교자가 성경말씀을 중심으로 성도들에게 도전이 될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하여 준비하고 설교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것 역시 ‘성도의 변화’입니다. 설교자에게는 오랫동안 바른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았다는 성도가 거의 변화되지 못한 모습을 드러낼 때 가장 힘이 빠집니다. 아무튼 말씀을 날마다 혹은 때때로 읽을 때 우리의 목적은 변화입니다. 물론 심령이 먼저 변해야 행동과 삶도 변화되는 것이겠죠.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장 크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 역시 변화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음을 외치시는 목적은요? 그것도 백성들의 변화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바른 길을 제시하시는 목적은요? 역시 바리새인들의 변화입니다. 물론 바리새인들은 전혀 변화되지 못했고, 백성들도 변화되지 못했고, 제자들도 변화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수난 당하시기 직전까지 자리다툼을 했었으니까요. 물론 바리새인들은 변화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했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영적 깊이에까지 도달하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들이 제자들보다 더 나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성령세례를 받고 자주 혹은 때때로 성령님의 인도를 받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삶으로 나타나는 변화는 우리는 제자들의 발뒤꿈치도 못 따라갈 것입니다. 제자들은 변화되지는 못했을지 몰라도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갔으니까요. 예수님의 뒤를 따라갔다는 그것이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때에는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변화란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요? 우선은 생각이 바뀌는 것입니다. 나를 지배하던 사고체계가 다른 사고체계와 부딪칠 때 생각끼리의 충격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부딪친 그 생각이 내 생각보다 클 때 우리의 생각은 바뀌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생각이 바뀐다, 혹은 깨닫는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변화되기 위해서는 깨닫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을 지속적으로 읽는 주된 목적은 깨닫는 것입니다. 이 깨닫는 것이 바로 은혜를 받았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깨닫는 것만으로는 변화의 단계까지 가기에는 너무 힘이 미약합니다. 제가 복음서를 6독까지 하면서 은혜를 받았다는 말은 반복해서 읽으면서 그동안 제가 지나쳤던 수많은 보석들을 발견하고 깨달았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반복읽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이번에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잘 아는 분에게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성경학자들께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말씀이 글자로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자신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려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메모했다가 정리한 내용들은 학설이 어떻든지 간에 주석이나 관련 서적들을 참고하면 다 나옵니다. 아마 적어도 80% 이상은 주석에 다 나올 것입니다. 하지만 주석에서 읽은 것과 스스로 말씀을 읽다가 깨닫는 것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주석에서 읽은 것은 글로써 읽은 것이지만 스스로 발견한 것은 말씀을 직접 들은 것과 같은 차이일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20% 남짓한 깨달음은 주석에도 책에도 나오지 않는 내용들입니다. 오로지 저 자신에게만 주시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성경의 1차적인 목적은 말씀을 읽거나 듣고 깨닫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말씀을 깨달은 것으로 다 되었습니까? 보통 이런 지적인 깨달음을 얻으면 기쁨을 안고 뭔가 한 단계 성장한 것 같은 마음을 가지고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깨닫고 은혜를 받는 데에서 그치면 사실은 별다른 진전을 맛볼 수는 없습니다. 신앙인이 관념적, 추상적인 신앙인에 그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이 지적인 깨달음에 있다고 한다면 이 깨달음이야말로 가장 복된 것이고, 많이 깨달은 사람이 신앙 수준이 높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너도나도 말씀을 잘 깨닫기 위하여 애를 쓰게 되고 말씀프로그램들이 최상의 영성프로그램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기독교 신앙은 말씀을 깨달은 것만으로는 좋은 방향으로 성장할 수 없고, 좋은 열매를 맺힐 수가 없습니다. 물론 말씀을 깨닫는 일의 중요성을 낮게 본다거나 우선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깨닫지 못하고서는 아무 것도 앞으로 더 나아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깨닫는 것은 복음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이 깨달음의 문을 열지 않고는 바른 신앙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깨닫는 것만 가지고도 행동과 삶의 변화를 어느 정도 가져오는 것은 사실입니다. 문을 열고 그 안의 풍경을 눈으로 볼 수는 있으니까요. 다만 그 풍경 안으로, 곧 실체 안으로는 더 이상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설교를 잘 한다는 것은 이 깨달음의 문을 자주 열어준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설교는 듣는 이들로 하여금 말씀 속에 감추어져 있는 보석들을 자주 들춰내어 주는 설교입니다. 이런 설교를 잘 하는 설교자들을 쫓아서 성도들이 모여들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설교 한 가지만을 찾아서 모이는 것은 아닙니다만, 설교가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만은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사실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성도로 하여금 잘 깨닫게 만드는 것이 좋은 설교이기 때문에 설교자가 설교에 힘을 쏟아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측면, 곧 설교를 듣고 있는 성도들에게 일어나기 쉬운 또 하나의 현상은 자주 말씀을 깨닫게 되는 성도는 자신이 듣고 있는 수준, 그 깨닫는 수준을 자신의 신앙수준으로 알게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잘 못 깨닫거나 지적 수준이 약한 성도는 신앙이 약한 성도처럼 보일 수가 있고, 지적으로 성경을 많이 알고 있는 성도의 신앙수준이 높은 것으로 생각하게 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천국을 무엇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아주 좋은 주택이 하나 있다고 하십시다. 별장이라 해도 좋고 저택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이 저택 안에는 그림 같은 정원과 아름다운 산책길, 새들이 우짖는 동산과 몇 마리 양이 뛰노는 언덕이 있습니다. 더 좋은 것은 저택 건물 자체입니다. 외양도 아주 근사할 뿐만 아니라 1층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벽에는 아름다운 미술품들이 걸려있고 근사한 조각 작품들이 기둥 옆에 자라잡고 있습니다. 장식장과 소파는 아름다움의 극치를 달리는 것들로 배치되어 있고, 거실과 침실, 주방, 욕실 등이 그야말로 조금도 어색함이 없이 최고급 수준으로 갖추어져 있습니다. 저택으로서 인간이 꿈꿀 만한 그런 집이라고 하십시다.
그런데 이 집이 그런 최고의 저택이라는 사실을 그 안에 들어가보지도 못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도 다 알려져 있습니다. 들어갔다가 나온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소문이 난 까닭입니다. 그러니까 그 저택이 얼마나 아름다운가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예 문 안에 발도 들여놓아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오직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열쇠가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그 열쇠가 있어야 아름다운 정원과 산책길, 동산, 언덕뿐 아니라 그 집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집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들어가서 차도 마시고 식사도 하고 잠도 잘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집으로 들어가도록 초청받은 사람들입니다. 초청 받았을 뿐 아니라 비밀열쇠까지 받아놓았습니다. 이 열쇠가 있어야 그 집 문을 열고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열쇠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물론 말씀입니다. 말씀이란 신앙의 보고를 여는 열쇠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의 열쇠로 문에 들어서는 것은 말씀을 깨닫는 것입니다. 깨달은 사람은 그 집 안으로 발을 들여놓은 사람입니다. 그는 문을 열고 안으로 첫걸음을 떼어 들어가서는 그 놀라운 광경에 할 말을 잃어버립니다. 큰 기쁨과 자부심을 느낍니다.
하지만 깨닫는 것, 곧 이 열쇠로 그 집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직접 정원을 다니면서 꽃을 만져보기도 하고 산책하면서 새들의 노래소리도 들어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집에 들어가서 모든 아름다운 것을 눈으로 보고 즐기며 최고의 음식을 먹어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깃털처럼 부드럽고 가벼운 이불을 덮고 꿈같은 잠을 자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직은 그 문을 열고 들어선 것뿐입니다.
말씀을 깨달았다는 것은 이제 겨우 문 앞에 서 있을 뿐인 것입니다. 그것 가지고 집을 알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남들은 문 앞에조차 들어가지 못한 그 집을 나는 들어가서 문 앞에서 펼쳐지는 그 아름다운 광경을 보았지만 그것으로는 직접 그 집을 아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깨닫는다는 것은 그것입니다. 말씀을 읽거나 듣고 깨닫는 것은 큰 은혜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거기에서 머문다면 아직 말씀을 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제가 반복해서 읽으면서 아무리 깊은 것을 느끼고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놀라워한다고 해도 아직은 그냥 말씀을 깨달은 것입니다. 아직은 제가 변화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열쇠를 열고 문 안으로 들어간 것뿐입니다. 이제 비록 작은 변화일지라도 시작 단계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심령의 변화가 찾아와야 합니다. 말씀을 깨닫고 은혜를 받은 다음에는 심령이 변해야 합니다. 심령이 변화된다는 말은 하나님과 만난다는 말입니다. 인격적으로 만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깨닫지 않고는 주님과 만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깨닫는 수준으로는 주님을 만난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 단계인 심령의 변화가 있어야 행동의 변화가 오고 삶의 변화가 오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복음서를 6독하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하지만 이제 시작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주신 은혜와는 또 다른 새로운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심령 자체가 더욱 주님과 가까워져 또 한 단계 성장한 믿음을 가질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살 수 있는 거기까지 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날마다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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