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월급 나눌 이웃을 동네에서 찾아보다.
이제 두 분에게 50만원 씩 작은 도움을 드렸습니다.
저는 단순히 돈만 전달하는 것보다는 직접 이웃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공감하면서 진행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두 분을 도와드렸을 때 뭔가 만족스럽지 못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차라리 담당직원이 동행하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직원도 첫 번째 분에게 찾아갈 때에는 혼자 가도 되겠느냐고 전화가 왔었거든요.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는 대화하고 소통하는 일을 훼방한 셈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혼자 찾아갔다고 해서 더 좋은 결과를 보이지 못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혼자 갔더라면 미련이라도 남지 않을 텐데, 지금은 뭔가 불편하고 뒤끝이 깨끗하지 않았습니다.
정길녀 씨 집을 나와서 직원과 헤어지고 나서 기도해야 할 필요를 강하게 느꼈습니다.
과연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을 알기 위한 적절한 방법이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무실로 돌아오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는 예수님 말씀의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경험해 보고 싶어서 시도했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시작하고 보니까 정말 가난한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물론 그냥 자선단체나 기관에게 의뢰해서 후원금을 보내는 방법이 가장 보편화된 방법입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어려운 이웃들을 많이 도와야 하는 것도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님 시대와 지금 시대에 큰 격차가 있지만 예수님의 말씀의 핵심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후원금을 꾸준히 보내는 일이 귀한 일이고
또 그런 분들이 많아야 자선단체에서도 마음껏 지구상의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연히 형편 되는 대로 그렇게 해아 합니다.
하지만 한 달 월급 가난한 이들과 나누기는 그런 활동들과는 별개로
주님과 나 사이의 관계 속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 의미를 직접 경험해보자는 취지입니다.
그러므로 직접적으로 이웃들의 형편을 알아보고 지나온 이야기들을 들어보고 싶은 것입니다.
일상적인 방식은 아니고 또 어쩌다가도 이런 식으로 행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직원의 말대로 저처럼 나누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일반적인 상식과는 좀 동떨어진 모습이기에 약간의 저항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제가 그렇게 느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저에게 뭔가 노림수가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이웃에게 다가가고 싶은 의도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다가 보니까
이런 마음의 불편함과 갈등, 고민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무실에 돌아와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50만 원짜리 봉투를 두 개 더 만들기로 했습니다.
사실 저에게는 나눌 만한 300만 원이 없습니다.
제가 거의 제 개인적으로 운영하는 단체의 기금이 조금 있습니다.
거의 95% 이상의 재정이 저의 집에서 나오는 단체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단체입니다.
여기에서 빌려서 우선적으로 행하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앞으로 10개월 동안 매월 30만 원씩 자동 이체해 놓을 것입니다.
은행의 단기대출이 되면 그것으로 하려고 했는데, 지금은 그것이 불가능하여 이렇게라도 하려고 한 것입니다.
300만 원을 모아서 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은행에 가서 100만 원을 더 찾았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동네 공원으로 향했습니다. 마을 어르신들이 많이 모이시는 곳이거든요.
작은 공원으로 들어갔는데 어르신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분들은 대개 저를 얼굴이라도 아는 분들이었습니다.
몇 년 전에 교회에서 수요일마다 저녁을 대접한 적이 있었는데,
이분들에게 한끼 잡수시라고 해도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저녁대접은 2년 반 정도 진행이 되었었는데,
제가 거의 1년 반 동안 매주 수요일만 되면 요구르트 등을 사다가 한 분 한 분 드리면서 초청하였었습니다.
그런데도 단 한 사람도 와보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그 때 얼굴을 익힌 분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 모이는 분들은 형편이 그렇게 나뿐 분은 별로 없었습니다.
공원으로 걸어 들어갔더니 마침 가장 연장자 되시는 어르신 한 분이 벤치에 앉아계셨습니다.
깊은 이야기는 못했었지만 마주칠 때마다 깍듯이 인사를 드리는 분이었습니다.
“안녕하세요? 댁이 이 근처시죠?”
인사를 드리는데 술 냄새가 풍겼습니다.
공원에 모이는 분들은 기회만 되면 모여서 술을 마시는 분들이었습니다.
몇 가지 이야기를 하다가 질문을 드렸습니다.
“여기 모이는 분들 중에 형편이 어려운 분들이 계실까요? 약간 도움을 드리려고 하는데요.”
그랬더니 이 어르신이 당장 몇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저 뒤에 박스 줍은 사람이 한 사람 있고,
요기 앞쪽으로 가면 지하에 사는 할머니가 있는데 거기도 어려워요.”
“그래요? 그런데 박스를 줍는다고 다 어려운 분들은 아니고요,
박스 줍는 사람들 중에도 집도 두 채가 있는 사람도 있던데요.”
“하긴 요즘은 나라에서 다 대주니까. 쌀도 주고 전기세, 수도세 다 내주고...
나 같은 사람은 혜택을 못보고 세금만 내잖아?
사실 문제가 되기는 해. 요즘은 어렵다고 해도 다 생활을 할 수 있으니까...”
“그래도 한 사람 추천한다면 누가 있을까요?”‘
“도와야지, 암. 지고 갈 것도 아니고. 좋은 일이야.”
그러면서 이 어르신은 주변을 죽 훑으시는 것 같았다.
“저 집은 어렵기는 한데 자식들 다 있고, 저 집은 상가도 가지고 있고, 박스 줍는 집도 자식들 다 있는데 뭐.
그리고 어려워도 다 먹고 사니까, 나라에서 다 대주니까.”
결국 그 어르신으로부터는 어려운 사람을 추천받지 못했습니다.
진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근처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어르신, 그럼 한 번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찾아봐 주세요.”
그렇게 부탁을 드리고 헤어져 나왔습니다.
나오면서 세상이 많이 변했다는 사실을 느꼈습니다.
절대적 빈곤이 거의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틈새에서 나라의 도움도 못 받고 있는 사람을 찾아야 됩니다.
얼마 전 송파 세 모녀 사건 등을 통해서 들었듯이 복지의 사각지대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보니까 주민 센터 등의 기관들을 통하여 어려운 이들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정말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경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깊은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습니다.
사무실로 오다가, 지금은 예배드리러 잘 나오지 못하시지만
전에 제가 섬기던 교회에 꾸준히 출석하시던 연세 많으신 장 집사님을 찾아가보기로 했습니다.
아들 되는 민 집사님은 얼마 동안 예배에 꾸준히 나왔지만 얼마 전부터 소식이 끊기면서 전화도 받지 않고 있습니다.
이분은 아들과 딸이 모두 있지만 아들 되는 민 집사님은 육체가 쇠약하여 일을 잘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 뇌출혈로 쓰러졌는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바로 구급차가 와서 바로 삼성의료원으로 갈 수 있었고
또 바로 수술을 받을 수 있어서 거의 기적적으로 회복하는 중이었습니다.
뇌가 부어서 두개골을 잘라냈다가 가라앉았을 때 다시 덮고 봉합수술을 받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교회에 다시 열심히 나오면서 회복되기를 기다리는 중이었습니다.
어머니 되시는 장 집사님은 허리를 거의 못 쓰는 분인데,
젊었을 때에는 공장의 공장장을 맡기도 할 만큼 억척같이 일하던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을 잘못 만나 날마다 매를 맞는 삶을 이어가야만 했습니다.
아들 되는 민 집사의 이야기로는 아버님이 밖에 나갈 때에는 아주 신사였다고 합니다.
만나는 사람들도 전부 지식인에 속한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집에만 오면 아내를 심하게 두들겨 패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과거의 이분들의 자세한 사정은 단편적으로만 들어서 자세히는 모릅니다.
장 집사님에게는 딸도 한 사람 있습니다.
아주 똑똑한 사람으로서 교회에도 꾸준히 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마도 어릴 때의 상처가 주 원인으로, 알콜 중독에 빠져버렸습니다.
오랫동안 치료하기 위해 많은 애를 썼지만 나은 것 같았다가 또 다시 빠지는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어머니와 오빠와 여동생, 이렇게 살고 있는데, 딸은 결혼도 해서 딸까지 둔 상태입니다.
이 가족을 볼 때 저는 꼭 나사로와 마르다과 마리아 가족을 연상하곤 했었습니다.
열심히 예수님을 의지하면 될 것 같은데, 아직까지 안타까운 마음만 앞설 뿐입니다.
어쨌든 이 가족과 장 집사님을 생각하면서 이번에 약간의 도움을 드리고 싶어서 그 집을 찾아 나섰습니다.
수년 전까지 제가 섬기는 교회에 출석하였으므로 심방 가던 생각을 더듬어 찾아갔지만
다리가 너무 불편하여 엘리베이터 있는 교회로 옮긴 후에는 아마도 교패를 떼어버려서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들 되는 민 집사는 약 한 달 전부터 전화도 받지 않습니다.
연립주택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 골목인데 구조가 비슷한 집이 많아서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그 집이라고 생각하고 들어가서 문을 두드렸지만 대답이 없습니다.
포기하고 나오는데 젊은 주부가 들어섭니다.
“여기 혹시 할머니 한 분 살지 않으세요?”
“아니요. 저희 집인데요.”
“아, 그래요? 미안합니다. 구조가 비슷해서 헷갈렸네요.”
결국 찾지 못하고 사무실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이 날에는 아들과 함께 사는 정길녀 씨를 만나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습니다.
저녁 때에 식당에 들어갔는데 창 밖으로 보니 참 어려워 보이는 사람이 지나가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남루한 옷차림은 물론이고 왼쪽 팔이 없는 분이었습니다.
저런 분에게 대화를 통하여 사정을 알아봐야 하는데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식사가 거의 나왔고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 함께 밥 먹자고 하기도 그렇고 해서 그냥 보냈습니다.
이래저래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다는 행위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생각이 깊어지는 하루였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인가를 주님께 계속해서 묻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성경에 기록된 주님의 행적을 쫓으면서,
주님께서 실제로 제자들에게 명하셨던 말씀들을 순종해보고 싶습니다.
그것이 오늘날의 현실과 맞지 않는 부분들도 많이 있겠지만
그런 현실적인 상황들을 뛰어넘어 주님 말씀대로 해 보고 싶습니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은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 부자 청년에게 하신 말씀이지 오늘날 우리들에게 하신 말씀은 아니라고들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보편적인 진리임을 생각할 때 그 말씀은 곧 우리들에게 곧바로 주시는 말씀임을 믿습니다.
그 말씀에 조금이라도 순종해보고 싶어서 한 달 월급 나누기를 하고 있지만
두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나서도 마음이 조금도 기쁘지 않고 편하지가 않습니다.
주님, 제가 뭔가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나요?
뭔가 잘못된 방법으로 나누고 있나요?
주님, 가르쳐 주시옵소서.
이 일을 통하여 저에게 주시는 말씀은 어떤 것입니까?
주님 어리석은 저를 깨우쳐 주시옵소서.”
문득 예수님 말씀의 초점이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의 초점은 나누어 주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누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것에 초점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스스로 뭔가 하려는 그 자체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하지만
주님의 말씀은 그런 의미보다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가는 데에 핵심이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버리는 것은 주님을 따라가기 위한 전제조건일 뿐입니다.
만약에 정말 제가 저의 모든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준다고 해도
전적으로 주님을 따라가지 못한다면 그 나눔은 아무 것도 아닐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누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것은 자기중심적이요 이기적인 신앙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기의 소유를 버린다고 해도 거기에 초점을 맞추면 자신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고,
그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라가는 것은 주님 중심적이요 이타적인 신앙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말씀을 깨우치고도 제 마음은 여전히 어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질을 나누면서 거기에서 기쁨이나 만족감이나 자랑과 같은 마음의 보상을 얻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의 사정을 더 잘 이해하고 그들의 마음과 동일한 마음이 되어보고자 하는 소망 때문입니다.
그것이 빠지는 나눔, 구제는 마치 수정되지 못한 달걀과도 같은 것일 테니까요.
아무리 많은 것으로 구제하고 헌금을 한다고 할지라도
대상자의 마음과 똑같은 마음이 되지 못한 상태에서 행하게 되면
그것은 어쩌면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있을 것입니다.
생명 없는 나눔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사도 바울의 고백이 바로 그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한 달 월급 나눔이라는 이 일은 더 많은 사랑과 헌신과 배려와 인내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한 번 전해주고 서로 좋은 마음, 고마운 마음을 주고받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한두 번의 나눔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이든 지속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떤 과정을 거쳐서 나눔을 행하게 되었든지 간에 이렇게 한 번 만난 분들께는
계속하여 순수한 사랑의 마음을 보여주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낄 수 있게 해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 겨우 두 사람에게 나눔을 행하고 나서 참으로 많은 것을 깊이 생각하게 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의 사랑을 안고
끊임없이 이웃들을 섬기는 일이라는 사실을 더욱 깊이 느끼게 됩니다.
소유의 일부를 나누는 이 일을 통해 주님께서 베푸실 크고도 넘치는 은혜를 더욱 기대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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