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월급 나누기

네 번째 이웃 : 79세 장집사

김완섭 목사 2018. 1. 31. 14:58

   한 달 월급 나눔 네 번째 이웃 : 나사로와 같은 가족

 

잠시 정리하면서 숨을 고르고 있는데 문득 일전에 집을 찾으려다가 못 찾았던 민정호 집사님이 생각났습니다.

혹시 또 전화를 안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전화를 걸었는데 한참을 받지 않다가 끝에 가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 목사님.”

, 전화 받네. 집사님 왜 그렇게 소식을 끊었어? 전화를 해도 안 받고

, . 그게 그냥 한두 주 못 나가다가 보니까 나기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래. 아무튼 전화 통화를 할 수 있어서 다행이네. 이따 오후에 시간 되면 좀 나와요.”

. 알겠습니다.”

그리하여 민 집사는 오후에 사무실로 나왔습니다.

 

왜 갑자기 소식도 없이 교회에 안 나왔었어? 혹시 무슨 좋지 않은 일이 있었어?”

아닙니다. 무슨 일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민 집사는 집사라고는 하지만 몇 년 전에 한동안 교회 출석을 잘 해서 격려하는 의미에서 집사 직분을 받게 했는데

한두 달 나오고는 또 교회 출석을 중단했었습니다.

그래도 한 번 집사 직분을 받았으니 집사로 부르는 것입니다.

사실 민 집사는 12년 전 쯤에 오카리나박물관을 세울 때 많이 헌신했었기 때문에 저와는 아주 가까운 사이입니다.

그동안 교회 출석을 중단하기를 여러 번 했었는데 1-2년 지나서 또 교회에 나오곤 했었습니다.

그럼 왜 아무 연락도 없이 갑자기 안 나오는 거야?”

……

 

이미 이야기했지만 민 집사의 어머니 장순자 집사님은 지금 79세의 고령으로

허리 병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합병증으로 집안 외에서는 거의 움직일 수가 없고

교회에 갈 때에도 민 집사가 휠체어에 태우고 함께 동행하는 실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월급 나눔을 하려는 대상도 민 집사가 아니라 장순자 집사입니다.

사실 장 집사님이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것도 제가 목회하던 교회였고,

꾸준히 예배에 잘 출석하여 집사 직분을 드렸던 분입니다.

그 당시에는 허리가 아주 안 좋아서 병원에도 자주 가고 수술도 여러 번 받는 중에도 돌보아드리기도 했었는데

그렇게 7-8년 저희 교회에 나오다가 3층에 있는 저희 교회를 걸어올라 다니기 힘들어서

근처에 있는 큰 교회에 다니게 되었는데 그 교회에는 엘리베이터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랫동안 함께 하시던 분이어서 마음이 아팠지만 육신의 아픔으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보내드렸었습니다.

그래도 민 집사님은 되도록 저희 교회에 출석하려고 애를 많이 썼습니다.

 

민 집사에게 저의 목적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믿음 안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저의 의도를 잘 이해할 줄 알고 설명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한 번 순종해 보려고 하는데, 장 집사님께 조금 도움이 되게 하려고 해.

내가 민 집사 집안 사정을 잘 알고 장 집사님이 아프고 어려운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니까,

다른 사람도 도와주는데 집사님 가정에 도움을 못 드리면 되겠어?

그러니까 이건 다른 의미는 전혀 아니고 그냥 단순히 힘든 가정이니까 드리려고 하는 거야.”

……

알았지? 집사님이 안 된다고 하면 할 수 없지만, 안 될 이유가 없잖아?”

그게 아니라, 저희 집이 어렵기는 하지만 급박한 사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절박한 사람을 도와 주셔도 되는데요.”

그래 나도 알지. 하지만 기도하면서 사정이 어려운 분들께 드리기로 한 건데,

장 집사님께 꼭 드려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어.

그래서 내가 집을 찾으려고 작년에도 다른 일로 한 번 나섰다가 못 찾았고, 이번에도 결국 못 찾고 말았지.”

목사님 말씀 감사합니다만, 언제나 신세만 져서 죄송해서 그럽니다.”

아니, 여태까지 신세 진 것 뭐 있다고 그래? 다 목사로서 한 일인데.

염려 말고 내가 직접 어머니께 전해 드릴 테니까 지금 집으로 같이 가도록 해.”

 

나는 신발을 갈아 신고 민 집사를 따라나섰습니다.

큰길로 나와서 횡단보도 하나를 건너면 작은 연립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는 동네가 나옵니다.

민 집사를 따라 그 집으로 들어가는데 반지하에 여러 세대가 살고 있는 곳입니다.

모두 비슷하게 생겨서 착각하기 쉬운 길이었습니다.

여기는 내가 여러 번 지나갔는데 다른 교패가 붙어 있어서 아니라고 생각하고 지나쳤었지.”

, 그 교패요? 매주 한 번씩 반찬을 해서 나누어주고 가는 교회가 있는데

아마 그 교회에서 표시해 두려고 교패를 붙이고 간 것 같습니다.”

장 집사는 출석교회도 아니고 다른 교회 교패가 붙어서 내가 착각했었구나.”

자세히 보니 교패는 아니고 그 교회 나눔 대상자라는 표시였습니다.

민 집사가 들어가서 다소 정리할 때까지 밖에서 기다렸습니다.

 

들어오라고 해서 들어가니 50대 여성이 한 분 함께 있었고, 장 집사님은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계셨습니다.

아이구, 장 집사님, 안녕하셨어요?”

아유, 목사님. 어서 오세요.”

그래 건강은 좀 어떠세요? 좀 괜찮아지신 것 같아 보입니다만

그저 늘 그렇죠 뭐. 견디면서 사는 거죠.”

그래, 교회에는 꾸준히 출석하고 계시죠?”

그럼요. 우리 아들하고 큰 딸이 자주 와서 휠체어에 태우고 교회에 나가고 있죠.”

장 집사님께는 50대의 큰 딸이 한 사람 더 있는데, 이 딸은 남편이 첫 여자에게서 낳은 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민 집사의 이복남매인 셈입니다.

이 큰딸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주일에 시간이 되면 와서 함께 지내다가 간다고 하였습니다.

 

장 집사님에게 찾아온 용건을 말하고 싶었지만, 모르는 여성이 함께 있어서 이야기를 꺼내기가 거북했습니다.

저는 처음에 이분이 장 집사님의 큰딸인 줄 알고 물어보았습니다.

혹시 큰 따님이세요?”

아니에요. 요양사예요. 매일 같이 와서 일해 주고 계시는 분이예요.”

장 집사님이 대신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요양사 분이 주방에 계실 때에 장 집사님께 작게 이야기했습니다.

저분이 계셔서 이야기하기가 좀 그런데요.”

그런데 이 말을 그 분이 들었습니다.

저요? 그럼 제가 잠시 나가 있을게요.”

그렇게 바로 나가려고 하는데 장 집사님이 말렸습니다.

아니, 괜찮아요. 3년째 거의 매일 오후마다 오시는 분이라 가족과도 같은 분이예요.”

아 그래요? 네 죄송합니다. 그냥 앉아계셔도 되요.”

 

그리고 장 집사님께 자세한 이야기를 해드렸습니다.

다른 아무 목적이 있는 것은 전혀 아니고 그냥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고 싶어서 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봉투를 내밀었습니다.

장 집사님은 받기가 민망해서인지 그냥 쳐다보고만 있었습니다.

아니, 이런 거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네요.”

당연히 받으셔야죠. 아무 부담도 느낄 필요가 없어요. 필요한 데 쓰시고 다른 사람에게 주지는 마세요.”

요즘은 옛날에 비해서 이렇게 저렇게 주시는 분들이 많아요. 감사한 일입니다.”

그저 옛날에도 제가 세심하게 보아드리지도 못하고 해서 미안한 마음도 제게 있었거든요.”

이렇게 봉투를 전해 드리고 민 집사와 함께 집을 나왔습니다.

요양사 분께도 부탁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렇게 3년 동안이나 수고를 해 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민 집사의 이야기로는 요양사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분이고,

비교적 부유한 집인데도 불구하고 뭔가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려고 이 일을 시작했다고 하였습니다.

 

민 집사와 함께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함께 앉아서 민 집사의 가정 이야기를 자세하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민 집사가 어릴 때 장순자 집사님은 서울 상계동에서 직장생활을 했었습니다.

장 집사님의 처녀 시절 이야기는 민 집사가 하지 않아서 알 수 없었습니다.

딸 하나 딸린 남자와 결혼해서 민 집사 남매를 낳고 살고 있었습니다.

민 집사의 아버지는 원래 페인트공으로 일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술주정이 심하고 매일같이 술을 마시는 바람에 일자리도 다 잃어버리고

생활력이 전혀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생활 전체를 아내에게 의존하는 그런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남편은 더욱 주정뱅이가 되어 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술을 먹으면 폭력적으로 변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술을 안 먹었을 때에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지만, 술만 먹으면 집안 살림 다 때려부수고

아내뿐 아니라 어린 아이들까지 들고패기가 일수였습니다.

민 집사 남매는 아버지가 술을 먹은 기미가 보이면 밖으로 도망가서 숨어 있다가

엄마가 퇴근해서 오면 함께 집으로 들어오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민 집사의 여동생을 임신했을 때에는 배를 차기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도 한두 번이지 지속적이 되니까 남편 외에 세 식구는 괴롭기 짝이 없는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린 시절에 겪은 그런 경험들이 성인이 되어서도 쓴 뿌리가 되어 이 남매들을 괴롭히는 것이었습니다.

민 집사가 세상에서 제대로 적응하지 못할 때가 많았고,

몇 년 동안 꾸준히 택배회사 직원으로 열심히 일한 적이 있었지만

건강 문제 대문에 중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도 꾸준히 어떤 일을 하기 힘들어하고 쉽게 결심을 포기하는 일이 반복되는 삶이었습니다.

이제는 어쩔 수가 없는 일이 되어버렸지만 지금도 민 집사는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동생은 참으로 똑똑하고 재능이 많았으며 초등학생 때에는 교내 육상성수이기도 했었습니다.

일을 해도 똑 부러지고 깔끔하게 해내는 성격이고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는 부지런한 사람이지만,

이 여동생은 지금 알콜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알콜 중독 때문에 어린 시절을 자주 맞고 자랐지만

그것 때문에 자신도 알콜 중독에 빠져버린 이 집안의 모습은 늘 저의 가슴을 아프게 하곤 했습니다.

 

아무튼 그러다가 장 집사님 가족들이 상계동에서 인천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상계동에 있던 공장이 문을 닫고 인천으로 이전을 하게 된 것입니다.

장 집사님이 다니던 공장은 단열재를 만드는 회사였는데, 장 집사님은 이곳에서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사를 가면서 남편 몰래 가려고 계획했습니다.

이제는 남편에게서 떨어져서 살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남편은 어디에서 들었는지 알아가지고 오는 바람에 할 수 없이 함께 이사를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사를 가서도 그 버릇은 여전했습니다.

아버지는 술을 먹으면 걸핏하면 아이들을 내쫒기도 했었는데,

한번은 여동생이 쫒겨나서 혼자 도망가는데 어린 나이에 인천에서 동대문까지 이모 집으로 피신한 적도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술에 취해 딸을 찾으러 고래고래 고함을 치며 돌아다니는데

여동생은 어쩌다가 넘어져서 코피를 흘리는데 옷에 피 범벅을 하고 거기까지 도망갔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술을 안 먹을 때에는 멀쩡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아버지가 스스로 집을 나가는 바람에 자유의 가정으로 변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집을 나간 이유는 아버지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때가 민 집사가 중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나중에 아버지는 암으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그 인생은 아내와 자식들에게 일평생 아물지 못할 상처만 안기고 가버렸습니다.

아직도 그 상처를 안고 장 집사님과 자녀들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듣다가 궁금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민 집사가 악기를 잘 다루잖아? 그건 어디서 배운 거야?”

민 집사를 알게 된 것은 민 집사가 30대 초반이었을 때였습니다.

인천에서 왔다고 했는데 인천에서는 밤무대에서 악기를 연주했다고 했습니다.

기타, 베이스, 드럼, 색소폰 등 거의 모든 악기를 잘 다룰 수 있었고, 학생들에게 교습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 학원 같은 데는 가본 적이 없구요, 동네에 연주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이 형들한테서 배웠죠 뭐.”

, 그렇구나. 교회에 지속적으로 나왔으면 봉사를 많이 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워.”

민 집사는 그 후로 여러 가지 일을 했었지만 자주 근무처를 옮겼고,

저는 그럴 때마다 고쳐야 한다고 지적하곤 했었습니다.

교회에도 몇 달 잘 나오다가 갑자기 전화를 받지 않고 잠적하다시피 했었습니다.

한두 해 후에 또 연락이 와서 보면 사고를 당하거나 수술을 하거나 했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사회생활에 적응이 어려워졌고, 지금은 뇌수술로 말미암아 회복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결국 이런 생활태도를 가지게 된 것도 어린 시절에 매를 맞는 등 부적절한 성장과정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어머니 장 순자 집사님은 60세가 넘도록 공장에서 부지런히 일하다가 허리가 아파서 퇴직했습니다.

척추압박골절로 인한 여러 번의 수술과 치료, 탈장수술만 세 번,

그리고 몇 년 전에는 심장판막증으로 인하여 또 큰 수술을 받았었습니다.

아마도 평생직장으로 삼았던 공장이 단열재 곧 유리섬유를 취급했기 때문에 그것과도 연관이 있을 듯했습니다.

그녀의 평생의 고난의 여정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아팠습니다.

그 아픔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도 나이가 들도록까지 어려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이 가정이야말로 예수님의 사랑이 절실한 형편이고,

다행히 신앙의 가정이 되어서 하나님의 보살핌 가운데 있으니 참으로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 가족의 모든 것이 회복되어서 남은 일생을 알콩달콩 재미있게 살 수 있기를 기원해 봅니다.

 

이미 이야기한 대로 장순자 집사님 가정은 긴급지원대상 가정은 아닙니다만,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만날 수 있는 어려운 이웃이고,

또 그 형편을 누구보다 더 잘 알기 때문에 마음까지 나누면서 섬길 수 있는 가정이었습니다.

그리고 민 집사도 지금은 전혀 일을 할 수 없는 형편이기 때문에 어머니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돈이 어떻게 어떤 곳에 사용되든지 가장 적절하게 쓰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지금은 절대적 가난은 많이 줄어들었고 밥을 굶는 사람들은 거의 없어진 것 같습니다.

그 덕분에 예전에는 교회에서 상당부분 감당하던 것이 이제는 국가에서 행하게 되면서

교회에서 뚜렷하게 할 수 있는 일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면서 교회에서 희생적으로 행하던 복지도 이제는 국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할 수 있는 모양으로 변해버렸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돕는 복지 차원에서 일하기보다는

문화와 생활 속으로 파고 들어갈 수 있는 아이디어들이 필요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회참여적인 교회들에서는 지역공동체나 공공적인 부분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국가 복지의 틈새에서 고통당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교회는 생활 속에서 그런 부분들을 찾아내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사람을 살린다거나 하는 큰 일은 아닐지라도

삶의 상세한 부분까지 보살피는 것으로 대체되어야 할 것입니다.

큰 타이틀을 내걸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를 정도로

세심한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내어 그들의 어려움을 메워나가는 교회가 되어야 할 줄 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