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월급 나누기

세 번째 이웃 : 66세 독거남

김완섭 목사 2018. 1. 31. 14:56

   한 달 월급 나눔 세 번째 이웃 : 66세 독거남

 

그렇게 이틀 동안 두 분에게 나누고 나서 셋째 날이 되었습니다.

전날에는 너무 마음이 답답했습니다.

어려운 분들을 조금이라도 돕고 나면 시원한 마음이 있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오히려 무의미한 일을 한 것 같기도 하고 주님과 상관없는 일인 것 같기도 했었습니다.

교회에 가서 한참 동안 기도했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주셨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사실을 마음으로 확인했습니다.

그렇지만 저의 마음은 조금도 풀리지를 않았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주님의 위로를 받았건만 그래도 집에 와서 잠을 잘 때까지도 답답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다음 날에 그 이유를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이미 마음이 답답한 것은 제가 의도하던 대로 진행이 안 되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인 것은 이분들과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없었던 데에 초점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말하자면 마음에 충분히 감정이입 같은 과정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제 의도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은 제 의도가 나누는 사람과 나눔을 받는 사람 사이에

충분한 교감의 과정을 원하는 것이었고, 이것이 빠져있었기 때문에 갑갑함을 느꼈던 것입니다.

이웃분과 과거와 현재의 과정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이루어진 후에 함께 이겨나가고자 하는 마음이 빠져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제 입장에서 큰 돈을 드리고서도 기쁨도 없고 심하게 말하면 빼앗긴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이 바로 주님께서 기대하시는 점이라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물론 이웃들의 과거를 꼭 알아야 공감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앞으로 그런 상호이해의 관계 가운데에서 공감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도 나눔은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꼭 당사자를 만나야 하는 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긴급한 수술이 필요한 사람에게 물질이 쓰인다거나

불특정다수에게 전달해주는 기관이나 단체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물질이 사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 나눔을 하고자 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기 위함입니다.

이웃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 어려운 사람들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눈길을 느껴보고자 함입니다.

 

앞으로 1년에 한 번, 한 달 월급 나눔을 실천할 계획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느끼고 이웃의 사정에 대한 동일시가 일어나고 나의 힘에 지나도록 도와주는 것,

이런 것들을 친히 실천해보았을 때 말씀이 내 속에서 살아 움직일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알고 깨닫고 느끼고 체험해 본 것에 대한 말씀은 충분히 나에게 살아있는 말씀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말씀이라도 분명히 우리에게 도전을 주고 감동을 주고 일정한 변화를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경험하고 느끼고 도전을 받은 말씀의 힘에 비하면 약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제가 노숙체험을 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정말로 이해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며

세상소식 끊고 사복음서 8독하기를 통해서 느낀 부분도 살아있는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당장은 아닐 수 있어도 반드시 큰 변화로 나타날 것입니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생각하면서 내 주변에서 어떻게 하면 어려운 분들을 찾을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기도하면서 서울역에 있는 노숙인들 중에서 선택하여 드릴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처음에는 일단 내 주변에서, 내 동네에서 이웃으로 다가올 수 있는 사람을 찾으라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미 어제 집을 찾으려다가 못 찾고 돌아왔던 장 집사님도 그런 분 중의 하나이고,

(이분은 연락이 되는 대로 상황을 들어보고 정하려고 합니다.)

혹시 제가 아는 분들 중에 그런 분이 없을까 하고 전화번호 명단를 들여다보다가 또 한 분이 생각이 났습니다.

만난 것은 벌써 13-14년 된 분인데, 그 동안 잊고 있었던 사람 중 한 사람입니다.

간혹 어려울 때 저에게 도움을 부탁하던 분인데, 큰 도움은 못되었지만 조금씩 도와 드린 적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이 분은 문대영(가명) 씨인데, 올해 66세로서 저와 동갑인 분입니다.

전화를 하니 전원이 꺼져 있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늘 어려움 중에 있는 분들은 때로 연락이 안 되면 불안한 마음이 먼저 듭니다.

혹시 사고가 났나, 병원에 입원이라도 했나, 아니면 무슨 심각한 문제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듭니다.

몇 달 전에 도와달라는 문자가 왔었는데 자주 그러기 때문에 그때에는 무시해버렸었습니다.

그 후로 전혀 연락이 안 왔었고, 오랜만에 제가 전화를 했는데 통화를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얼마 후에 다시 한 번 전화를 드렸지만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문자로 메시지를 넣었습니다.

집사님, 전원이 꺼져 있다고 하는데, 이 문자 보면 연락해주세요.”

교회를 정해놓지 않고 드문드문 여러 교회에 나가는 분이지만 과거에 집사였던 적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다른 일을 하느라고 잠시 잊고 있었는데 오후에 전화가 왔습니다.

그런데 전화를 받으려고 하는데 신호가 끊어졌습니다.

이쪽에서 다시 전화했더니 반갑게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이구! 목사님이 웬일이세요?”

제가 목회하던 교회를 떠난 이후로 제가 먼저 전화한 적이 없었으니 아마 놀랐을 것입니다.

집사님, 어디 계세요? 집에 계세요?”

, 예 목사님, 무슨 일인지 몰라도 제가 자전거 타고 가면 10분이나 15분이면 갈 수 있습니다.”

, 그러면 지금 오세요. 여기 박물관으로 오시면 돼요.”

담임목회를 은퇴한 후에 제가 운영하는 오카리나박물관을 사무실로 쓰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문 집사님과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번에 문자 드렸는데 아무 답장이 없으셔서 저는 목사님이 저를 버린 줄 알았습니다.”

ㅎㅎ 언제는 가진 적 있나요? 버리기는 누굴 버려요?”

목사님 그 동안 건강하셨어요?”

, 그럼요. 그리고 제가 담임목회를 은퇴했습니다. 교회에 출석하면서 교회를 중심으로 몇 가지 일을 하고 있어요.

집사님은 그 동안 어떻게 지내고 계셨어요?”

저는 늘 그렇지만 요즘 택배 일도 없어서요. 다른 건 견딜 수 있는데 쌀이 없어서요.

봉다리 쌀을 조금씩 사다 먹고 있어요.”

나라에서 나오는 건 없나요?”

요즘은 그것 가지고 겨우 입에 풀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 나이가 지하철 무료승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택배 일을 하면 돈이 조금 더 벌 수 있는데 일이 없어요.”

집사님 연세가 그렇게 되었어요? 저보다 몇 살 아래인 줄 알았는데...”

아니요. 목사님과 동갑입니다.”

그랬군요. 제가 착각하고 있었어요.”

 

이런 식으로 대화가 이어지다가 제 의도를 설명했습니다.

집사님, 집사님이라고 해도 교회도 정해놓지 않으셔서 사실은 집사가 아닙니다만,

아무튼 저는 그 전부터 예수님 말씀 중에 걸리는 부분이 항상 있었는데,

그것은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이었어요.

그 말씀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든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제가 은퇴하고 나서 한 달 월급이라도 나누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주민 센터에서 추천을 받아서 두 사람에게는 나누어 드렸고,

그리고 제 주변에서 정말 도움이 필요한 분이 누굴까 기도하다가 집사님을 떠올렸어요.

큰 돈은 아니지만 여기 제가 지금 물질을 조금 드립니다. 50만 원입니다.”

그리고 봉투를 내밀었습니다.

 

문 집사님은 갑자기 눈물을 보였습니다.

목사님, 정말 고맙습니다. 제가 정말 너무 힘들었는데 전혀 뜻밖에 이렇게 도와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니요.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봉투에도 쓰여 있잖아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린다고.”

, 제가 너무 힘들어서 주님께 기도드렸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요.

그런데 목사님을 통해서 이렇게 주시니 참 감사드립니다.

제가 비록 충성된 신앙생활을 하지는 못했지만 신앙을 떠난 적은 없습니다. 아무튼 목사님, 감사합니다.”

. 그랬군요. 집사님, 이제는 교회에 좀 정착하세요. 그래야 하나님께서도 집사님을 믿어 주시지요.”

목사님, 그게 잘 안 됩니다. 교회 성도들 속으로 들어가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글쎄,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오직 하나님만 보고 교회에 출석하다 보면 다들 인정해 주게 되는 거죠.

아무리 오랜만에 나와도 성도들은 다 반가워하죠. 다른 생각하는 사람 없습니다.

교회는 누구든지 나오기만 하면 대환영인 거예요.”

목사님, 당분간은 그냥 있을래요. 그렇다고 제가 예배를 안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알았습니다. 하여튼 이제는 어느 교회든지 정착하셔야 합니다.”

 

문대영 집사는 전북 익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서울로 올라와서 유락동이라는 곳에서 자랐습니다.

유락동은 문화동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지금은 신당5동이 되어 있습니다.

아버지가 그 당시 제빵소를 운영하고 있어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문 집사님과 바로 밑의 여동생이 좀 똑똑하지 못해서 두 남매를 유치원에 보냈다고 합니다.

제 얘기가 아니라 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당시에는 집안이 부유한 사람들만 유치원에 자녀를 보낼 수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저도 유치운 문턱도 넘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비극은 문 집사님이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님이 간암으로 돌아가신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어머니가 38세 때의 일입니다.

 

자녀들은 6남매였고 문 집사님은 장남인데 위로 누나가 둘 있었습니다.

그러니 집안 형편은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었고, 문 집사님도 힘든 성장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못 싸가지고 가서 정말로 수돗물로 배를 채운 적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문 집사는 허기가 심해 힘이 없어서 음악 시간에 노래를 소리 내어 부르지 못했습니다.

후에도 어머니는 도시락을 못 싸준 것을 가장 미안해하고 안타까워했다고 합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신통한 것은 6남매가 모두 등록금만큼은 미룬 적이 없이 또박또박 납부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고등학교 등록금이 3,000원대였는데, 고등학교 교사 월급이 30,000원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자녀들의 교육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작은 할아버지 덕분이었다고 합니다.

이분이 재일교포였는데, 당시는 재일교포라고 하면 전부 부자들로 생각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사실 재일교포는 일본에서는 부자가 아니라도 당시 우리나라 사람보다 삶의 질이 월등하게 높았었습니다.

작은 할아버지가 일본에서 한국으로 나올 때마다 가전제품이나 우산 등

우리나라에서 돈이 될 만한 물품들을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이것을 팔아다가 자녀들의 학비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식들이 점심을 굶어야 하는 상황 가운데에서도 자녀들은 모두 고등학교까지 졸업시켰습니다.

 

어머니는 주변에 나누어주고 퍼주기를 좋아했습니다.

힘든 가운데에서도 어려운 사람을 보면 형편이 닿는 대로 베풀기를 좋아했습니다.

어머니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참 많아서 어머니 장례식 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문상을 다녀갔다고 합니다.

부자의 장례식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지만 이름 없는 한 여자의 장례식은 썰렁하기 마련인데

어머니의 장례식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는 것은 그만큼 베풂의 삶이었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장례식 뿐 아니라 환갑잔치 때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다녀갔습니다.

어머니는 믿음은 없었고, 금산사라는 절에 자주 갔다고 합니다.

집안에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문 집사가 유일했습니다.

고등학생 때 감리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여 오늘까지 신앙을 떠난 적은 없었다고 합니다.

청년시절에도 신앙생활을 나름대로 열심히 했고,

그 후로도 여러 교회를 다니기는 했지만 지속적으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문 집사는 한 곳에서 반복적인 일을 하는 것을 너무 힘들어했습니다.

군 제대 후에 이종형님이 운영하는 프레스 공장에 다닌 적도 있었고,

그 후로 소파 공장에 취직해서 일을 했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다른 일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심부름센터에 다니거나 택배 일을 지속적으로 했는데

문 집사에게는 한 곳에서 같은 일을 하는 직업보다 자유롭게 물건을 전달해 주곤 하는

택배나 심부름센터 일이 마음도 편하고 스트레스 받지 않고 좋았다고 합니다.

이미 지나간 인생길이지만 오늘날의 이런 어려움을 겪게 된 데에는 이런 성향이 크게 작용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에 문 집사가 누구와든 결혼을 했더라면 인생이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문 집사에게도 결혼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은덕으로 인하여 중매를 거쳐 선을 본 적이 있었는데 이 여성은 자수성가한 여성이었습니다.

한두 번 만났는데 문 집사 본인이 싫다고 거절했습니다.

또 한 번은 미술학원 원장을 누군가에게서 소개를 받았으나 이 역시 몇 번 만나고 나서 그만두었습니다.

문 집사가 가장 아쉬워하는 여성은 좀 늦은 나이인 40세 때 소개를 받았는데,

열 살 적은 여성이었으며 가장 마음에 들었다고 합니다.

그 때 함께 보았던 영화까지 기억할 정도로 문 집사가 좋게 생각했던 여성이었지만,

이번에는 그 여성으로부터 퇴짜를 맞아 결국 결혼은 한 번도 하지 못한 채 나이가 들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케이스로 45세 때 통일교에서 하는 합동결혼식에서 일본여성과 결혼하라는 권면을 받았지만

문 집사는 신앙적으로 응할 수가 없어서 거절했습니다.

 

문 집사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된 또 한 가지 이유는 아는 사람으로부터 사기를 당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신용카드를 만들 수 있게 되었는데, 그 때는 길거리에서도 신용카드를 발급해 주던 시기였습니다.

원래 신용으로는 카드를 만들 조건이 전혀 되지 않았지만 카드 발급을 장려하는 때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신용카드 때문에 그나마 있던 어머니 유산까지 다 날릴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일의 발단은 20년지기 친구에게 카드를 빌려준 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어는 날 친구가 문 집사에게 부탁을 하였습니다.

, 대영아! 내가 한두 달 정도만 쓰면 되는데 네 카드 좀 빌려다오.”

카드를 빌려달라고? , 너도 알다시피 만약에 잘못 되면 내가 갚을 능력이 없잖아? 곤란한데

, 내가 틀림없이 문제 생기지 않게 해 줄게. 그리고 내가 꼭 필요한 데가 있어서 조금만 쓸 거야. 걱정하지 마.”

, 정말 나 더 이상 힘들게 하지 말아라. 알았지?”

염려하지 마라. 20년 친구가 그렇게 하겠니?”

이렇게 신용카드를 빌려갔습니다.

 

그런데 몇 십만 원 정도 사용할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1,800만 원을 썼다고 합니다.

은행에서 계속 독촉이 쏟아졌습니다.

그런데 문 집사에게는 어머니 유산으로 받은 이천의 어느 아파트가 있었습니다.

당시 억대의 아파트였는데, 빚 독촉이 심해지니까 견디지 못하고 그냥 넘겼다고 합니다.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아마 여러모로 계산하기 복잡하고 하니까 내버려둔 것 같았습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지만 문 집사의 특성상 지혜롭지 못하게 날려버린 것이었습니다.

몇 년이 지난 후에 그 친구를 찾아갔지만, 말은 좋게 하는데 그에게서는 한 푼도 건지지 못했습니다.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 중에는 세상 물정에 너무 어두워서 사기를 당하거나 재물을 날린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젊을 때에는 일을 해서 생활이 되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런 능력도 차츰 사라지게 되면

곤궁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형편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매월 3만 원씩 신학생을 돕고 있다고 했습니다.

목사님, 그것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가 마음이 감동이 되어 장신대에 다니는 신학생에게 한 달에 3만 원씩 보내고 있는데

요즘에는 그것도 힘들어서 할 수 없이 그만 보내려고 하는데 목사님이 도와 주셨습니다.

그런데 주변의 목사님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그거 하지 말라고 말립니다.

주제를 알아야지 제 입에 풀칠도 못하는 사람이 무슨 선교냐고 핀잔을 줍니다.

나중에 형편이 좋아지면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합니다.

목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저는 별로 생각해보지도 않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조금이라도 할 수 있으면 하는 것이 좋습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문 집사는 아주 기뻐하고 좋아했습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주변에서 말려서 저도 혼란스러웠는데 목사님이 칭찬을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런 식으로 한참 동안이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문 집사는 헤어지면서 감사의 표시를 더 했습니다.

목사님, 혹시 뭐 할 일 있으시면 저를 부르세요.

목사님 예술마을 만드시려고 수집을 많이 하시는데 제가 다니면서 혹시 그런 것 보면 구해 오겠습니다.“

, 그래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정말 며칠 후에 장식품들 몇 가지를 들고 왔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하여 세 번째 나눔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한 달 월급 나눔을 생각할 때에는 긴급하고 절박한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습니다.

똑같은 돈이라도 정말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쓰인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주님께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소유를 팔아 나누라고 하신 말씀을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들 주변에는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지만 긴박한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도 복지정책이 많이 발달하여 절대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다만 날마다 생활에 쫓기는 사람들은 우리들 주변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선적으로 눈에 띄거나 우리 곁에서 만나는 어려운 사람들이 우리의 일차적인 이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적으로 동네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나눔을 실천하기로 한 것입니다.

 

문대영 씨가 현재 밥을 굶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리고 극한 상황에서 힘겹게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분도 아닙니다.

다만 그는 제가 삶의 현장에서 날마다 부딪치며 살고 있는 여러 이웃들 중 한 사람입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이 전달되며 그 사랑을 체험하게 만드는 일이 우리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사실은 그런 삶의 모습이 바로 전도의 참된 의미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교회에 데려오거나 사영리로 복음을 전하는 한편,

삶이 어려운 이웃들에 대한 관심과 작은 도움으로라도 힘이 되어주는 그것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펼쳐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또한 생활에서 일어나는 좋은 전도가 되고,

말로써가 아니라 삶으로써 그리스도의 사랑을 맛보게 하는 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비록 문 집사가 기독교인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 되어

더 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로 들어오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교회 안이나 밖과는 상관이 없고,

그 사람이 어떤 신앙을 가진 사람인가와도 관계없이 편만하게 펼쳐져야 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문 집사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도운 이 일은 참으로 기쁘고 보람된 일이었습니다.

이런 은혜를 제게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