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복음, 이웃사랑」
제7장 차별하지 않는 것이다.
정리 : 박종오 목사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언약과 맹세에 참여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서 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직 여호와의 백성들은 여호와 앞에 서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구약의 백성들에게는 이것이 더욱 명확하였다. 이방인들에게는 여호와의 언약과 맹세가 아무런 효력을 미칠 수 없다. 이웃사랑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참된 이웃사랑은 하나님의 시각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단지 고아와 과부를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이웃사랑의 원리가 어디에서부터 비롯되는가를 알아야 그 당위성이 성립되는 것이다.
(신 29:11) 너희의 유아들과 너희의 아내와 및 네 진중에 있는 객과 너를 위하여 나무를 패는 자로부터 물 긷는 자까지 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서 있는 것은
재판을 정의롭게 하라
구약 시대에나 현대에나 재판은 억울한 사람을 가장 많이 생산하는 현장일 것이다. 재판이란 큰 범위에서 보자면 하나님을 대신해서 인간이 결론을 내리는 행위이다. 구약에서는 이 재판을 이웃사랑의 한 줄기로 보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은 재판은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조건에도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재판이란 원래 정의를 행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재판은 사회의 정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는 일이었다.
(신 1:17~18) 17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너희는 재판할 때에 외모를 보지 말고 귀천을 차별 없이 듣고 사람의 낯을 두려워하지 말 것이며 스스로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 있거든 내게로 돌리라 내가 들으리라 하였고
18 내가 너희의 행할 모든 일을 그 때에 너희에게 다 명령하였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율법은 사회법보다 상위에 있다는 사실이다. 재판의 결과보다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우선적으로 배려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모든 재판은 이웃사랑의 원리로 접근해야 한다. 하나님은 억울함이 간절함과 절박함이 되어 하나님의 귀에 들리면 재판을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마음대로 이끈 사람들이나 그것을 위해 힘쓴 사람들에게 저주가 내려진다.
(신 27:19)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하나님께서 공동체 백성들이 하나가 되는 일에 모든 초점을 맞추고 계신다면 먼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이해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불이익이 돌아가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지 가난한 사람들에게 유리하게 재판하라고 하신 것은 아니다. 모든 송사에는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될 수 있게 해야 한다.
(출 23:2~3) 2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당한 증언을 하지 말며
3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해서 편벽되이 두둔하지 말지니라
우리는 정의를 말하기 이전에 먼저 사랑을 말해야 한다. 정의는 심판으로 이어지고 사랑은 용서로 이어지지만 하나님은 이 모순되는 개념을 같은 것으로 판단하신다. 하나님의 정의는 사랑과 용서로 성취될 수 있다. 구약의 율법의 사랑은 서로사랑인 것이다.
속이거나 학대하지 말라
하나님은 꼭 이스라엘 백성들 뿐만 아니라 공동체 안에 함께 거하는 타국인과 나그네에게도 동일하게 사랑을 베푼 것을 원하신다. 거류민을 어느 정도로 생각해야 하는가 하면 마치 자기처럼 사랑하라고 명하신다. 가장 불이익이 많이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인 타국인들에 대한 배려를 말씀하시는 내용이다. 어떤 형태로든 학대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이스라엘도 애굽에서 타국인이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어떤 상황에서 이웃과의 동일시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런 감정은 일어날 수 없다는 말이다. 이웃사랑은 감정까지 동원이 되어야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 것이다.
(레 19:34)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 되었었느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마치 자기 가족을 돌보는 것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타인을 압제할 필요도 없고 학대할 필요도 없어진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어야 한다.
(출 23:9)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은즉 나그네의 사정을 아느니라
그래서 이웃사랑은 이웃의 사정을 알려고 하는 데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잠언에서는 의인의 특징 중 하나를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잠 29:7)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 주나 악인은 알아 줄 지식이 없느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공동체 내의 그 어떤 사람에게도 차별이 가해지는 것을 싫어하신다.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이 오히려 더 큰 사랑의 대상이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어려움 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배려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요 뜻이다.
(신 24:14) 곤궁하고 빈한한 품꾼은 너희 형제든지 네 땅 성문 안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를 학대하지 말며
특히 경제적인 문제와 부딪칠 때에는 결코 속이거나 차별을 두고 착취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일용직 품삯도 결코 미루지 말라고 하신다. 가난한 품꾼의 사정을 알아주라는 것이다.
(레 19:13) 너는 네 이웃을 억압하지 말며 착취하지 말며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며
돈 문제와 함께 가장 자주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속이는 것이다. 속이는 목적이 무엇이겠는가? 돈을 조금이라도 더 남기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은 속이는 사람을 가장 싫어하신다.
(레 25:17) 너희 각 사람은 자기 이웃을 속이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성경은 희년에 대해서도 역시 같은 잣대를 제시한다. 희년이란 소외되고 고통당하는 백성들의 해방과 자유와 회복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이웃사랑의 대원칙이다.
(레 25:14~15) 14 네 이웃에게 팔든지 네 이웃의 손에서 사거든 너희 각 사람은 그의 형제를 속이지 말라
15 그 희년 후의 연수를 따라서 너는 이웃에게서 살 것이요 그도 소출을 얻을 연수를 따라서 네게 팔 것인즉
차별하지 말라
아모스는 정의가 물 같이, 공의가 강 같이 흐르는 세상을 바라보았다. 정의는 재판에서 이루어져야 할 의로움이고 공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적용되어야 할 의로움이다. 두 가지 모두 차별 없는 의로움을 뜻한다. 그것이 구약의 이웃사랑의 본질이다.
(암 5:24)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정의와 공의가 모든 왕들과 백성들이 지향해 나아가야 할 유일한 가치 기준이라고 대언하였다. 탈취당하는 자를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학대하지 않으며 무죄한 피를 흘리지 않는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그것은 차별 없는 세상이고, 불이익이 없는 세상이고 억울함이 없는 세상이고 평등이 성취되는 세상이다. 이웃사랑은 평등과 동등한 개념이다. 모든 사람이 똑같아지는 세상이 아니고 인간의 권리와 특성을 보장하는 세상이다.
(렘 22:3)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 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정의와 공의의 개념은 심판의 개념이 아니라 사랑의 개념이다. 사랑에는 차이는 있지만 차별은 없다. 차이가 없다면 그것은 공산주의이다.
(레 19:36)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추와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힌을 사용하라 나는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 땅에서 나오게 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모든 일을 공평하게 처리하면 하나님은 복을 아끼지 않고 부어주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품을 만족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모든 차별은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외면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복도 상도 주어질 수 없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
결국 하나님은 차별이 없는 세상을 원하신다. 그것은 정의와 공의를 통해 이루어지는 세상이다. 하나님은 성전에서 드려지는 제사에 마음을 두시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정의와 공의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정의와 공의의 정신, 곧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차별 없이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것이다.
(잠 21:3)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공동체의 일원으로 곧 같은 믿음의 형제로 받아들일 이방인들도 차별 없이 사랑해야 함을 강조하고 계신다. 신앙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해 이스라엘의 율법을 따라 할례를 행하는 이방인들에게는 본토인과 차별 없는 삶의 기회가 제공되는 것이었다.
(민 9:14) 만일 타국인이 너희 중에 거류하여 여호와 앞에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면 유월절 율례대로 그 규례를 따라서 행할지니 거류민에게나 본토인에게나 그 율례는 동일할 것이니라
실수한 사람을 용납하라
도피성 제도는 의도적인 악행이 아니라 실수로 인한 범죄인에 대한 이웃사랑이다. 무조건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하는 것이 율법이 아니다. 각 사람의 형편과 처지를 전부 다 고려해야 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율법이다. 율법에는 부지중에 실수로 죄를 지었을 때의 해결 방법을 소상하게 언급하고 있다. 실수로 사람을 죽인 경우에 공정하게 재판을 받기 전에 피해자에 의해 죽는 것을 방지하고 정의와 공의가 행해지도록 하는 것이 도피성 법이다.
(민 35:11~12) 11 너희를 위하여 성읍을 도피성으로 정하여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그리로 피하게 하라
12 이는 너희가 복수할 자에게서 도피하는 성을 삼아 살인자가 회중 앞에 서서 판결을 받기까지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
물론 도피성이 있다 하더라도 살인자가 의도적으로 사람을 죽인 경우에는 그 죄를 사함 받을 수가 없었다. 그는 마땅히 죽어야만 했다. 그런 사람에게는 이웃사랑이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거되어야 할 불순물로 간주될 뿐이었다. 그것은 이웃사랑이 아니다. 고의로 사람을 죽인 경우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피해자는 억울하게 마련이다. 율법이 이 억울한 사람을 배려하여 최대한 차별 없이 다스려지기 위한 법이라면 억울한 피해자에 대한 배려가 있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피해도 있을 수 있다. 전혀 예상치 못하게 살인자가 된 사람을 다른 소외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배려해 주어야 할 때상이다.
(신 19:11~13) 11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이웃을 미워하여 엎드려 그를 기다리다가 일어나 상처를 입혀 죽게 하고 이 한 성읍으로 도피하면
12 그 본 성읍 장로들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거기서 잡아다가 보복자의 손에 넘겨 죽이게 할 것이라
13 네 눈이 그를 긍휼히 여기지 말고 무죄한 피를 흘린 죄를 이스라엘에서 제하라 그리하면 네게 복이 있으리라
차별 없는 세상이란 무조건 공정한 세상이 아니라 차별의 피해를 입고 힘들어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차별을 최소한으로 줄여주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분명히 죄의 유무를 칼날처럼 구분해내신다. 똑같이 사람이 죽는 일이 일어나도 가해자의 죄가 과연 얼마나 되는지를 하나님은 아신다. 그리고 비록 피해를 입히기는 했지만 부지중에 살인을 저지른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정의의 기준으로는 죄를 묻지 않으신다. 사회법으로는 가해자는 분명히 벌을 받게 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법으로 보면 벌을 내리시지 않을 정도의 여지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죄인 된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진정한 사랑이다.
예수님의 명령, 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 원리를 소화해야 비로소 성령님의 능력에 힘입어 실천해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소감문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율법을 이웃사랑의 관점에서 보기 시작하면서 이웃을 바라보는 눈이 점점 달라지고 있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기 위해서는 벽들이 허물어져야 했다.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과 믿지 않는 유대인들 사이의 벽,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벽, 유대인과 이방인의 벽이 허물어지기 위해서 순교자들의 피를 흘려야 했다. 예수님은 그 벽을 다 허물어 주셨는데 우리는 아직도 이분법적인 사고에 갇혀 예수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교회 다니는 사람과 안 다니는 사람을 구별하고 그저 그들을 마귀의 자식, 지옥 자식, 전도 대상자라고만 생각해 왔던 것은 아닐까?
예수님이 말씀하고 사도들이 말했던 ‘서로 사랑’을 구약의 율법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이 획기적인 것 같다. ‘이웃사랑’이 무엇인지 조금씩 알아가면서 내 의식 속에 점차 ‘동일시’의 개념이 살아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내 몸 같이’는 안 되지만, ‘가족’의 개념을 가지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율법을 통해 차별 없는 세상, 불이익이 없는 세상, 억울함이 없는 세상, 평등이 성취되는 세상이 이루어질 수 있게 하셨다. 왜 지금까지 ‘이웃사랑’이 평등과 동등한 개념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을까? 모든 사람이 똑같아지는 세상이 아니고 인간의 권리와 특성을 보장하는 천국과 같은 세상이 이루어질 수 있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웃사랑’을 통해 조금씩 내 안에 벽이 허물어지고 ‘동일시’ ‘가족’의 개념을 갖고 이웃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 갈 수 있음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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