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박5일 노숙체험

노숙 5 : 머리 둘 곳 없다는 말씀

김완섭 목사 2017. 7. 19. 13:46

노숙체험 5 : 머리 둘 곳 없다는 말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8:20)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서기관이 나와 예수님이 어디를 가시든지 따르겠다고 했을 때 대답하신 말씀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예수님의 참 거처는 이 세상이 아니고 저 영원한 하늘나라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덧붙여 지도층인 서기관이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겠다고 나선 것이 놀라운 일이기는 합니다만, 서기관에게 주님이 가시는 길이 어떤 길인가를 설명하시는 장면인 점을 고려한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편안하거나 앞날이 보장되거나 성공의 길이 아니라 제대로 머리를 기대고 누울 만한 곳조차도 없는 고난의 길이라고 가르치신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더구나 예수님 당시의 노숙은 서울역 노숙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열악함 자체였을 것 같습니다. 물이나 음식을 마음대로 구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고 잠 잘 때도 야산이나 들판이나 마을 귀퉁이 어딘가에서 몸을 땅에 기대고 주무셨을 것 같습니다. 그런 전도여행을 3년 동안 계속하셨습니다. 물론 중간 중간에 나사로 같은 친구의 집에 주무시거나 제자들의 집에 거하실 때도 많이 있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머리 둘 곳조차 없는 상태로 오랫동안 돌아다니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노숙하면서 머리 둘 곳 없다는 말이 정말로 실감되었습니다. 단 이틀 동안이었지만, 머리 둘 곳 없는 생활을 하다보니까 그것이 얼마나 불편한가를 깨달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즘은 역이나 공원 벤치에는 하나같이 높이 20cm 내외의 가림대 같은 것이 한가운데에 박혀있습니다. 특히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있는 의자나 벤치에는 예외 없이 가림대를 설치해 놓았습니다. 이유는 노숙자 같은 사람들이 거기에 눕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서울역 대합실의 벤치에도 낮은 가림대를 3개씩 설치해놓아서 도저히 거기에 누울 수는 없었습니다. 수년 동안 노숙자들이 대합실 곳곳에서 벤치를 하나씩 차지하고 밤새 잠을 자는 것을 겪다 보니까 일일이 내쫓는 것도 힘들고, 또 그것이 오랫동안 반복되니까 대책을 생각하다가 지혜를 짜내어 그런 시설을 한 것 같습니다. 내가 사는 동네 성내천에도 많은 벤치들이 있는데 하나같이 한가운데에 가림대를 설치해 놓았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도대체가 머리를 기댈 데조차 없게 된 것입니다.

 

머리를 어딘가에 기댈 때라고는 밤에 박스 덮고 배낭을 베개로 하고 잠 잘 때인데 그것도 배낭 속에 있는 담요나 점퍼를 빼고 나니까 높이가 많이 낮아져 고개만 아플 뿐이었습니다. 이틀 동안 머리 둘 곳이 없이 지내다 보니까 정말 저의 소원이 누워서 베개 베고 다리 뻗고 한숨 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중에 그나마 나은 곳이 있는데, 염천교를 건넌 후에 오른쪽에 보이는 모퉁이 건물 아래 작은 쉼터입니다. 여기에도 예외 없이 벤치마다 가림대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이곳의 벤치 끝에는 기둥이 하나씩 있어서 등과 머리를 기댈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이곳에서 한 시간쯤 있었는데 이곳은 건물 직원들의 흡연실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직원들이 수시로 나와 담배를 피우며 한담을 나누다가 들어가기 때문에 대화 내용이나 담배연기를 피할 수가 없는 곳이었습니다. 결국 이곳에도 두 번 가보고 다시 가지 않았습니다.

 

물론 공원 구석에서 땅바닥에 누우면 될 것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이미 말했듯이 베개가 필요하고 또 사람들이 왕래가 있는 곳인데 어찌 대낮부터 누울 수 있겠습니까? 밤에 박스 덮고 잘 때도 열댓 번은 깨기 때문에 잠이 몹시 부족한데, 그 잠을 조금이라도 보충하려면 순간순간 잠을 자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지만 머리를 기댈 데조차 없는 상황에서 그저 벤치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전의 생활은 청파공원 벤치에 앉아 부족한 잠을 조금씩이라도 보충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자는 머리 둘 곳 없다.”고 하셨을 때 정확하게 이것과 같은 의미라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원리적으로 머리 둘 곳 없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는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은 왜 자신을 끝까지 따라오겠다는 서기관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걸까요? 많은 유대 종교지도자들 가운데 이런 서기관이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기특한 일입니까? 아마 모르기는 몰라도 예수님도 상당히 기쁘셨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 과부의 두 렙돈 헌금 등을 크게 칭찬하셨기 때문입니다.

 

서기관을 향한 예수님의 이 말씀에 대해 여러 가지 의도를 생각해볼 수 있겠지만, 지금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과연 예수님을 잘 따라가고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머리 둘 곳 없는 예수님을 따르려면 우리 역시 머리 둘 곳 없는 상황을 기꺼이 감내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머리 둘 곳 없는 상황을 피하기 바쁜 것이 오늘 신앙의 현주소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불편하지 않고 추하지 않고 품격이 있는 신앙생활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품격도 머리 둘 곳 없는 예수님을 따른 이후에 생겨나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번 노숙체험을 통하여 상당부분 성경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지나쳤던 내용들, 그 명확한 의미를 알지 못하고 지레짐작으로 판단했던 일, 깊은 의미가 있는데도 가볍게 표면만 스쳐갔었을 수많은 말씀들이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머리 둘 곳 없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전혀 깨닫지도 알려고 하지도 않았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 중에 환상이나 음성으로 저에게 말씀하시는 대신 삶의 언어로, 육체의 부딪침으로 저를 자세하게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이후로도 닷새 내내 저는 머리 둘 곳 없는 상태로 지낼 수박에 없었습니다. 노숙인들이 왜 벤치에 길게 누우려고 하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냥 눕고 싶어서 누운 경우도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상당수가 머리 둘 곳 없는 삶에서 틈만 나면 머리 둘 곳을 찾는 이유를 알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든지 허리를 구부리고 다리를 최대로 쪼그려서라도 머리를 기대고 싶은 마음을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행정적으로는 많은 시민들이 불편하지 않게 하기 위해 벤치에 가로대를 설치해야 하겠지만, 심정적으로는 그 가로대를 다 제거해 버렸으면 좋겠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