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편에 서기

버리자 1 : 종교를 버리자

김완섭 목사 2017. 7. 19. 14:02

종교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으세요. 

 

버리자 1 : 종교를 버리자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12:33-34)

 

깡통과 교회, 교회와 깡통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나는 어릴 때부터 수집하는 것을 좋아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상표를 수집했었고, 중학교 시절에는 우표를 수집했었고, 청년 시절에는 레코드판을 수집했었다. 그리고 비교적 경제적 여유가 생긴 40대 후반부터는 다양한 여러 가지를 수집하고 있다.

 

수집품들 중에는 우표, 카메라, 조각품, 공예품 등 그 자체로서 가치를 가지는 것도 있지만, 때로는 무엇을 담던 그릇, 상자, , 깡통 등 어떤 물건을 담았던 용기들도 있다. 캐나다에 갔다가 벼룩시장에 들른 적이 있었는데 녹슨 깡통들이 비싼 값에 팔리고 있었다.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물건 주인이 담배깡통이라고 알려주었다.

 

담배깡통은 아니라도 양철 깡통을 수집하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다. 비스켓, 사탕, 초콜릿을 비롯한 양철용기들은 오래 되고 희귀한 것일수록 높은 값에 팔린다. 우리 같으면 재활용품 축에도 못 낄 허름한 양철깡통이지만 이런 깡통을 모으는 사람들에게는 하나하나가 소중한 수집품들이다.

 

사실 그런 용기들은 무엇을 담기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우리의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고려청자, 조선백자도 원래는 음식 종류를 담기 위해 만들어진 그릇들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희귀해지자 엄청난 가치를 지닌 보물들이 된 것이다. 수집가들은 이런 것들을 모으기 위해 큰돈을 선뜻 쏟아 붓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들을 생각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교회와 신앙에 관해 다시 정리해보게 된다. 사실 무엇인가를 담는 용기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 교회이다. 그리고 그 교회에 담을 내용물이 복음이다. 따라서 교회 자체가 가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복음을 담고 있기 때문에 가치 있는 것이다. 교회가 복음을 담고 있지 않다면 그 교회는 겉껍데기 깡통과도 같은 것이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그런 껍데기들도 오래 되고 희귀해지면 가치를 지니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복음이 담겨있지 않은 교회는 아무런 가치를 가지지 못하게 된다. 교회가 종교에 빠지면 마치 세상에서 깡통이 비싸게 팔리는 것과 같은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깡통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물, 곧 복음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복음을 잃어버린 교회에는 아무런 미련도 가지고 계시지 않다.

 

깡통은 비스켓을 담기 위해 필요하다. 교회도 복음을 담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교회 그 자체가 가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교회가 필요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복음을 담기 위해 교회는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복음은 교회 안에 반드시 담겨 있어야 한다.

 

고려청자와 교회


인간은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도 모두 종교적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피조물이기 때문에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기독교도 당연히 여러 종교 중의 하나이다. 일단 겉으로 보면 그렇다.

 

그러나 기독교가 종교가 되는 그 순간에 어쩌면 하나님은 기독교를 떠나실 수도 있다. 무슨 소리냐? 하나님이 기독교를 떠나시다니! 이 말은 하나님이 교회를 떠나실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런 망발이 어디 있느냐? 신성모독이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그리스도께서 떠나시다니!

 

그런데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이런 일이 현실에서 일어난 적이 있다. 한두 번이 아니다. 아주 여러 번 일어난 일이다. 가장 비근한 예는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하나님께서 먼저 떠나신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이 먼저 하나님을 떠났다. 자기 땅에 오신 자기들의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이쯤 되면 하나님께서 유대민족을 떠나실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항상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확신에 차 있었고 선민의식으로 말미암아 이방 민족을 개처럼 생각할 정도였다. 그들은 율법에 정통할 뿐만 아니라 그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고 있었다. 오늘날의 그 누구도 바리새인들처럼 신앙 생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 민족은 메시야를 십자가에 처형하였다.

 

고려청자나 조선백자는 무엇을 담는 용기로서의 가치는 다 사라졌다. 세상에서 높은 값에 팔리고 있고 연구의 대상이 되어 재연하려는 노력들이 펼쳐지지만 무엇을 담기 위한 시도는 아니다. 고려청자를 물병으로 쓰는 사람이 있는가!

 

신라 토기 두 점을 가지고 있다. 집사님 한 분이 원래 집에 가지고 있던 거라면서 기증한 것이었다. 엄청난 가치를 지닌 것이지만 국내 가격은 그렇게 비싸지 않단다. 왜냐하면 외국으로의 반출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란다.

 

귀중한 도자기들도 상황에 따라 그 자체로서 지니고 있는 가치와 실체 판매가격에 차이가 큰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람들의 필요와 여건에 따라 그 가치와 가격에는 큰 차이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만약에 고려청자가 국내에 백만 점 쯤 있다고 해 보자. 그렇다면 고려청자는 그렇게 귀중한 것이 못된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율법과 성전을 이 고려청자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의도가 쏙 빠진 채 율법이라는 껍데기만 가지고 최고의 가치를 삼았기 때문에 진짜 중요한 메시야를 오히려 십자가에 매달게 된 것이었다.

 

유대민족은 꿈에도 하나님을 배반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자신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처형하고 나서 하나님의 버리심을 받아 세계를 방황하는 민족이 되고 말았다.

 

두 말 할 필요 없이 그 원인은 그들의 종교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종교 속에 묻혀버렸기 때문이다. 종교가 그들의 믿음을 도와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종교가 여호와 신앙을 사라지게 만든 것이다. 사라진 정도가 아니라 전혀 다른 여호와 신앙으로 변질시켜 버렸던 것이다.

 

도자기를 깨버리시는 예수님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신앙적 자존심으로 꽉 차 있던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고, 유대민족의 신앙을 실체적으로 알 수 없었던 로마 백부장은 칭찬하셨다. 뭔가 거꾸로 되어도 한참 거꾸로 되었다. 종교적 확신을 가지고 있던 종교지도자들은 오히려 참된 신앙을 버리게 되었고 그런 종교적인 행위가 거의 없었던 이방인들은 오히려 올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비유로 말하자면 예수님은 이 고려청자를 여지없이 깨뜨려버리신 것이다. 예수님의 공생애도 이 고려청자를 깨뜨리시는 과정이었다.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던 고려청자, 복음이 담겨져 있지 않은 성전과 율법을 깨뜨리시는 예수님이셨다.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율법과 선민의식을 마치 고려청자처럼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생명처럼 여기던 율법이 사실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 가치도 없던 고려청자였던 것이다. 그 율법의 껍데기만 있었지 그 안에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계획은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려청자는 말하자면 마지막 종말 때에 전부 태워져 없어질 세상 가치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들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만의 우상으로 변질시켜 버렸던 것이다.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종교가 그들을 집어삼켰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율법적 행위가 참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무너뜨렸던 것이다. 뭔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행위였던 것이다. 자기는 잘 믿고 있고 그래서 큰 복을 받았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것이 전부 자기를 위한 것이었다는 말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무너뜨리는 그 어떤 것도 우상이 될 수 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떠나서는 절대로 신앙을 간직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교회 안에서 열심히 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하나님의 상급이 주어진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자칫하면 자기만의 우상 속에 갇혀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주변에서 이런 종교적 우상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된다. 은퇴를 앞두고 과도한 욕심을 부린다든가, 명예로운 자리를 탐하여 부정한 방법을 사용한다든가, 모든 것이 자기를 통하여 이루어져야 한다는 특권의식이나, 자기는 다른 사람들보다 똑똑하고 능력 있다는 우월의식들은 하나같이 종교적 우상에 속하는 것들이다.

 

기독교를 우상이라고 할 수 있나? 그런 것이 아니고 기독교의 종교생활이 우상숭배와 같은 기능을 할 때도 있다고 말한 것이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23:23)

 

하지만 고려청자는 소중하다.


종교, 율법에 사로잡혀 있으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 먼저 자기중심적이 된다. 기복적인 삶이 된다. 이 땅에 소망을 두는 삶이 된다. 하나님께서 나를 필요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하나님이 존재하시게 된다. 번영신학이며 성공신학이며 세속신학이며 물질신학이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 이 세상의 유일한 진리이다. 종교라는 틀을 가지고 있지만 종교는 아니다. 기독교라는 종교 안에 하나님의 진리를 품고 있는 것이다.

 

이 진리가 종교에 파묻히게 되는 순간 기독교는 하나님 없는 종교가 되고 만다. 기독교는 종교이지만 기독교가 종교가 되는 순간 하나님과는 아무 관계없는 종교가 되고 만다. 그러니 기독교라는 종교 안에서 예수님과 동행하는 길을 발견해야 한다. 그럴 때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진리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라는 울타리가 필요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자체를 고려청자처럼 떠받들면 안 되지만 그렇다고 고려청자를 깰 수는 없다. 예수님이 깨뜨리시려는 고려청자는 소중한 복음을 담을 수 없게 되어버린 그릇이다. 이제는 더 이상 담을 것이 없어진 고려청자는 깨버려야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는 또 다른 고려청자는 반드시 필요하다.

 

일평생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느라고 갖은 애를 다 쓴 바리새인들이 이 종교(율법) 안에 매몰되는 순간 그들은 하나님과 아무 관계없는 사람들이 되고 말았다. 종교 안에 있었지만 진리가 쏙 빠진 겉껍데기 종교가 되어 버린 것이다. 더 이상 복음을 담을 수 없는 고려청자, 깨뜨려버려야 할 고려청자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기독교가 겉껍데기 종교로 변해버리면 세상을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만병의 근원이 되어버린다. 오늘날 기독교가 이렇게 되지 않았나? 교회가 세상을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염려하게 되어 버렸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복음이 빠진 종교를 벗어버리자!


종교적인 생각을 버리자. 교회 안에서 뭔가 열심히 했다고 천국상급은 따 놓은 당상이라고 착각하지 말자. 내가 뭔가 함으로써 공로가 되었다면, 교회를 크게 부흥시킨 것을 자기 공로라고 자랑하게 되면, 사업을 열심히 해서 대성공을 했다고 하나님이 자기편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이미 하나님과 무관한 상태가 되어버린 것일 수도 있다.

 

버려야 할 겉껍데기를 붙들고 있는 한 우리에게 생명은 주어지지 않는다. 아무 것도 담겨 있지 않은 그릇을 안고 있는 한 우리에게 변화는 오지 않는다. 우리가 변화되고 교회가 갱신되어 세상을 바꾸려면 껍데기 종교는 다 버려야 한다. 우리는 복음이 살아 움직일 수 있도록, 세상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도록 살아계신 예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위선적인 종교, 기복적인 종교, 번영을 위한 종교는 깨뜨려버리자. 성공의 수단으로서의 종교, 복 받고 문제해결에 초점이 맞추어진 종교는 깨뜨려버리자. 세상의 소금이 아니라 교회 안의 설탕이 되어버린 종교는 과감하게 벗어버리자. 인본적이며 무속적이며 세상중심적인 종교는 이제는 더 이상 우리를 살리지 못한다.

 

오직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마음속에 들어가 하나님의 마음을 소유하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참된 진리요 참된 종교요 참된 신앙이다.

 

거기에서부터 우리는 다시 시작해야 한다. 예수님을 담으려면 종교를 버려야 한다. 복음을 살리려면 종교적인 사상은 버려야 한다. 다른 종교와 동일한 것을 추구한다면, 그렇다면 기독교가 어떻게 진리의 힘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종교를 믿지 말고 예수님을 믿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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