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적인 표적이나 증거를 따라 살지 마세요.
표적 2 : 표적을 넘어라.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요 12:37-38)
아들을 잃어버린 엄마의 심정으로
내가 목회하는 교회에 P집사가 있었고 아들이 있었다. 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이 아들이 없어졌다. 아들을 야단을 좀 쳤는데 나가더니 저녁이 되어도 들어오지 않았다. 엄마는 하얗게 질린 채 아들을 찾으려고 집집마다 돌아다녔다. 이 아들은 그날 밤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아들은 야단을 맞고 친구 집으로 간 것이었다. 엄마가 아들을 찾으러 친구 집에 갔을 때 아들은 그 집안에 있었다. 하지만 친구의 도움으로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엄마는 죽을 것만 같았다.
아침에 다시 그 친구 집으로 갔다. 이번에는 아들이 나왔다. 엄마는 아들을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아들도 엄마의 사랑을 깨닫고 엄마를 부둥켜안고 함께 한참이나 울었다. 아들은 그제야 엄마가 자기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무진장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슷한 일이 또 다른 P집사에게도 일어났다. 이번에는 딸이다. 딸은 집을 나간 것은 아니었는데 친구들과 공원에 간다고 나갔다가 저녁때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엄마는 딸을 찾으러 공원 구석구석과 온 동네를 실성한 사람처럼 돌아다녔다.
마침내 딸을 발견한 엄마는 딸을 부둥켜안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울음을 그친 후 딸이 엄마에게 물어보았다.
“엄마, 정말 나 사랑해?”
말해 무엇 하나? 엄마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는 없다는 사실을 딸은 깨달았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표적을 구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기 위해서이다. 또 하나님의 사명을 분명하게 알고 확신을 가지기 위해서이다. 물론 기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는 확증을 얻고 싶어서이다. 그러므로 표적을 구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오히려 권면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 강력한 표적을 체험하고서도 또다시 표적을 구한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예를 들어 집을 나갔다가 엄마의 사랑을 확인한 아들이 엄마가 야단 칠 때마다 엄마의 사랑을 다시 확인한다면서 번번이 집을 나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렇게 엄마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하여 표적을 날마다 구한다면 어쩌면 나중에는 늑대소년처럼 가짜 아들로 여기게 되는 지경에까지 갈지도 모를 일이다.
진짜 표적이 필요한 사람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표적을 체험하고서도 믿지 않는 현상에 있다. 간혹 아픈 곳을 위해 안수기도를 하면 낫는 경우가 있는데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은 이것을 하나님 능력의 표적으로 받아들이지만 어떤 사람은 감사한다고는 하는데 깊은 감동이 없이 우연히 일어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사실 그런 사람은 표적을 보여주어도 표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런 사람에게는 표적이 표적으로서의 기능을 거의 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병환자 열 명의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눅 17:11-19) 열 명의 나병환자가 동시에 치료받았는데 그것을 하나님과의 관계와 연결시킨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아홉 명은 예수님의 능력으로 치유 받았음에도 예수님에 대해서 별다른 의식이 없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눅 17:17-18)
분명히 나병환자 열 명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셨고, 열 명이 제사장들에게로 가다가 전부 고침을 받았지만 예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나병을 고침 받은 아홉 명 중 그 한 사람에게만 구원을 선포하셨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눅 17:19)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기적을 체험하였지만 체험하였다고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그 체험을 바탕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구원에 이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다.
사도 요한도 그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요 12:37)
표적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표적은 어떨 때 필요할까? 표적을 구하지만 사실은 표적이 필요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다.
표적은 정말 표적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다. 표적을 보고 믿은 사람, 더 나아가서 이미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표적 자체가 필요 없을 것이다. 표적을 보고도 단편적이고 일시적인 현상으로 치부해 버리고 그 표적의 의미를 훼손하고 무력화시키는 믿음이라면 그 사람에게는 표적이 필요가 없다.
사실 정말로 표적이 필요한 사람은 단 한 명의 나병환자처럼 그 의미를 아는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표적을 구하여 표적을 얻어도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 표적이 필요가 없어진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 표적을 얻었던 사람이 똑같은 문제를 만나면 또다시 표적을 구하게 된다.
내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나는 표적을 통하여 살아있는 주님과의 만남을 고백하고 있는가? 아니면 표적을 보고 일시적으로 믿음이 생겼지만 문제를 만나면 다시 표적을 구하고 있지는 않은가를. 표적은 표적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날 사람에게만 유용한 것이다.
받은 표적을 넘지 못하면
과거에 주일학교 사역자를 모집한 적이 있었다. 여러 사람이 이력서를 보내 와서 두세 사람의 면접을 보았는데, 그 중 한 사람은 여자목사로 교육학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는 분이었다. 며칠 기도해 본 후에 이분을 청빙하겠다고 통보하였다. 이분이 자기도 며칠 기도해 본 후에 답을 주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주말에 우리 교회 주일학교 사역자로 오기로 했다고 연락이 왔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이튿날 교회에 와서 주일학교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렇게 두세 주가 흘러갔다. 그런데 교사들을 통해 들리는 이야기가 있었다. 주일학교 예배를 시작하기 전에 토요일에 전도하러 갔다가 만난 아이들과 약속이 있었다. 그래서 그 교사가 아이들과 만나려고 약속장소에 가서 기다리는데 새로 온 담당 목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교사 회의가 있으니까 빨리 들어와요.”
“저, 목사님 어제 전도한 아이들 데리러 와있거든요. 아이들 데리고 빨리 갈게요.”
“아니, 선생님, 그 아이들 내버려두고 그냥 와요. 아이들이야 또 올 수 있는 거니까.”
“그래도 목사님, 먼저 한 약속을 지켜야 할 것 같은데요.”
“아니, 지금 내가 교사회의 하는 게 더 중요한 일이예요. 빨리 들어와요.”
교사는 할 수 없이 아이들을 기다리지 못하고 교회로 돌아왔다. 그리고 주일학교 목사님으로부터 잔소리를 많이 들어야 했다. 끝내 교사는 눈물까지 보이고 말았다.
나는 이 얘기를 듣고 안 되겠다 싶어서 담당목사님을 불렀다.
“목사님, 목사님이 인도하시는 교사회의는 물론 중요하지만 교사들이 전도해서 만나기로 한 아이들과 약속을 지키는 것이 우선 아닙니까?”
“아니, 목사님, 나한테 주일학교를 맡기셨으면 나한테 재량권을 주셔야지 교사 편을 들면 어떻게 합니까?”
“아니요,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과의 약속은 교회의 약속인데 아이들이 나왔다가 교사를 못 만나면 아이들이 어떻게 다시 교회에 나오겠습니까?”
“그래도 목사님이 이렇게 하시면 내가 교사들을 어떻게 지도하겠습니까?”
“아니, 교회 전체를 이끌어나가는 담임목사의 목회방침과 다를 때에는 이야기할 수 있는 거죠.”
그렇게 주일 예배를 마치고 돌아갔다. 그리고 토요일에 담당목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목사님, 제가 닷새 동안 기도원에 와서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그만 두라고 하십니다. 저 내일부터 그 교회 못나갑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대꾸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알았습니다.”
닷새 동안 기도하고 나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면서 우리 교회에 왔는데 불과 한 달도 못되어 다시 닷새 동안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그만두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이 목사에게는 그 응답이라는 것,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이 표적이다. 하지만 표적만을 구하다 보니까 완전히 자기 마음대로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오히려 하나님을 이랬다저랬다 하는 분으로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표적을 만났으면 그것을 증거로 삼아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한 경우에 표적을 주시지만 어쩌다가 표적을 만났어도 말씀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그 표적은 의미가 없어지게 된다. 표적을 받았으면 그 표적을 심령 가운데 깊이 간직해야 한다.
표적은 안내판일 뿐이다.
표적은 마치 증명서와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는 증거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역사해 주신다는 확인서이다. 증명서를 보고 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또한 마치 조선시대 어사의 마패와 같다. 마패는 임금으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고 나왔다는 큰 권세의 표징이 된다. 마패가 있으면 전국 어디에서나 마방에 들려 말을 갈아탈 수도 있다. 표적은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사랑으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일 뿐이다.
하지만 증명서이든 확인서이든 마패이든 그 자체만 가지고는 큰 의미가 없다. 그것을 만든 목적은 따로 있기 때문이다. 그 목적에 사용되지 않고 그것 가지고 권세만 내세운다면 그것은 마패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린 것이다. 표적은 놀라운 증거이지만 표적만 바라보고 있다면 그것은 표적으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린 것이다.
표적은 마치 목적지로 이끄는 안내판과 비슷하다. 안내판에는 그 곳에 대한 설명이 소개되어 있다. 어떤 과정을 거쳤으며 현재 그 가치와 앞날에 대한 교훈이 들어있다. 무엇보다도 안내판에는 지금 현재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자기의 현재의 위치를 모른다면 사실상 아무 것도 할 수 없지 않은가? 만약에 그 안내판을 중심으로 갈림길이 있다면 어디로 가면 무엇이 나올지에 대한 소개가 자세하게 나와 있다.
하지만 만약에 안내판 밑에서 멈추어 버리면 더 이상의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을 알려준다고 하더라도 나아가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조차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표적을 받고 나서 표적을 넘어가지 않으면 하나님이 아니라 표적에만 초점이 맞추어지게 된다. 안내판을 넘어가야 목적지로 갈 수 있는 것처럼 받은 표적을 넘어야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이 안내판을 많이 보았다고 해서 그 사람의 신앙이 성장하고 변화되고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까? 안내판을 찾아다니는 데에 재미를 느끼고 많은 안내판을 보았다고 자랑하려고 든다면 그 사람은 절대 변화될 수 없다. 표적을 보았으면 빨리 신앙의 삶으로 돌아와서 그것을 적용하고 거기에 나와 있는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표적을 보여주신 목적이 시작되는 것이다.
결국 받은 표적을 넘어가지 않으면 그 사람의 신앙은 절대로 자랄 수 없다. 표적을 뒤로 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표적을 보았으면 일단 방향은 올바른 것이다. 그 증거를 가졌으니 확신을 가지고 달려 나가야 한다.
표적을 넘어라.
성도나 사역자가 자기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지 못하는 것은 왜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이 표적과도 상당한 관련이 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크고 작은 여러 가지 표적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신앙체험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체험 중에 기도응답의 체험, 병 고침의 체험, 방언이나 예언 등 성령의 신비체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종류의 체험이든 각자 개인에 따라 전혀 다르게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27세에 예수님을 믿고 뜨거운 전도신앙의 훈련을 받아왔다. 믿기 시작한 지 1년6개월 정도 되었을 때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올라갔던 한얼산기도원에 간 적이 있었다.
그 때 방언이라는 것을 받았다. 그런데 한 번 그런 경험을 하고 나서 내가 정말로 방언이라는 것을 받았는지 의심이 생겼다. 그 후로 방언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방언에 대해서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내가 직접 체험한 것이므로 신앙체험과 관련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방언이라는 것을 받은 지 7년 정도가 지났다. 그 때 나는 출판사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출판사에서 늦게까지 편집 일을 하다가 10시 30분 정도에 퇴근하는 생활이었는데, 그렇게 야근하고 나서 교회에 11시 20분경에 도착하여 20-30여분 기도하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야근을 마치고 퇴근하여 교회에 가서 기도하고 있는데 마음속에 갑자기 7년 전에 방언을 받았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는 스스로 기도를 하는데 방언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이 방언은 날마다 다른 방언으로 입에서 나왔다. 첫째 날은 랄랄랄랄, 둘째 날에는 따따따따, 셋째 날에는 난난난난, 그 다음 날에는 빠빠빠빠 … 이런 식으로 방언이 전개되더니 일 주일 쯤 되니까 겨우 무슨 언어처럼 변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 방언 체험이 전부는 아니었지만 대표적인 표적을 이야기하라면 소개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한 번 분명한 신앙체험을 하면 절대 의심할 수 없다는 말이다. 내가 경험한 표적이 가짜가 아니라 진짜로 경험한 것이라면 그 체험을 다시 요청할 필요도 없고 구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체험을 전혀 구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체험은 계속될 것이고 계속되어야 한다. 주님과 동행하는데 체험이 없을 수가 없고 당연히 여러 가지 증거들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 하지만 신앙이 어릴 때 자주 주시던 표적도 신앙이 자라면서 표적의 빈도가 줄어들게 되어 있다. 그런데 자꾸 표적을 구하는 믿음이라면 우리는 자신의 믿음을 의심해 볼 수 있어야 한다.
믿음이 어릴 때에는 여러 가지 증거들을 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표적이나 증거를 얻었으면 그것은 마음속에 간직하고 신앙생활에서는 이미 얻은 표적을 구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우리가 참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버려야 할 것이 참 많지만 이 표적이라는 것도 버려야 할 것들 중의 하나이다.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져보아야 믿겠다고 했지만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요 20:25)
예수님은 표적을 구하지 않고 믿는 사람이 더 복되다고 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 20:29)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며 부활의 주님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더 이상의 표적은 우리에게 필요가 없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사람으로서 몇몇 가지 신앙체험을 가지고 있다면 이제는 더 이상 그런 표적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 표적이 우리를 끌고 가도록 내버려두지 말고 이미 믿은 표적은 과감하게 버리고 표적이 아니라 말씀을 믿고 실행하는 사람들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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