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적인 표적이나 증거를 따라 살지 마세요.
표적 3 : 표적을 믿으라.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마 12:38-39)
예수님을 믿는 것 자체가 가장 큰 표적이다.
나는 청소년 시절부터 하나님을 믿고 싶었다. 항상 내면이 공허하여 채워지지 않는 상태였으므로 절대자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도 강하였다. 그래서 어머니나 친구들이 교회에 가자고 하면 별 거부반응 없이 따라가곤 하였다. 친구 따라 몇 달 동안 학생회 예배에 참석하기도 했고, 어머니를 따라 부흥회며 특별새벽기도회 같은데 따라가기도 하였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믿고 싶어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목사님의 말씀은 다 거짓말이거나 과장된 것 같았고, 성경말씀도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렇게 5∼6년 동안 기회 되는 대로 예배에 참석했지만 믿음이 아니라 오히려 불신만 커가게 되었다. 급기야 나는 주변에 이렇게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나더러 교회 가자는 소리 하지 마세요. 나는 죽어도 교회에는 안 갑니다. 절대 안 믿습니다.”
그로부터 4-5년이 흘렀다. 나는 처음 대학생활에 실패하여 어머니의 도움으로 자퇴처리가 된 후에 다른 대학에 가서 졸업하게 되었는데 학점 관계로 후반기 졸업생이 되었다. 이미 직장에 취업이 되어야 했지만 이런 저런 사정으로 취직도 정해지지 못한 상태였다. 정신적인 결핍 상태로 마음이 혼란스럽고 견디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4월 어느 날에 편지가 한 통 왔다. 한국병원선교회에서 외숙모님(황찬규 목사 사모)이 보내주신 춘계수양회 초청장이었다. 20대 초중반에 심리적으로 무척 위축된 상태였던 나였기에 그 전에도 여러 차례 초청이 있었지만 아예 갈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병원선교회에는 90% 정도가 젊은 간호사 자매들이어서 더욱 가기가 싫었었다.
그런데 그 초청장을 받은 순간 수양회에 가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수양회가 아니라 수련회였으면 안 갔을지도 모른다. 수련회는 뭔가 프로그램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수양회는 자유로운 느낌이 들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절대 예수 안 믿겠다고 큰 소리쳤던 나에게 이런 마음이 들었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었다. 그렇게 세검정에 있는 수도원에서 3박4일 간의 일정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3박4일 동안 나는 무척 심심하였다. 집회는 하루 세 번 있었지만 집회 참석 외에는 내가 할 일이 전혀 없었다. 대부분이 자매들인 젊은이들은 틈틈이 모여서 서로 이야기하기도 했고, 밤에는 철야기도가 이어졌다. 밤이 거의 새도록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소리에 일종의 경외감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한창 자신만만해야 할 젊은 사람들이 뭐가 부족해서 저렇게 밤이 새도록 울부짖을까?”
그들이 그렇게 하는 동안 나는 방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방안에는 성경과 찬송가책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성경과 찬송가책을 뒤적거리다가 문득 찬송가 표지 안쪽에 있는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이 눈에 띄었다. 뒷 표지 안쪽에는 십계명이 인쇄되어 있었다. 나는 갑자기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암송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 여기 있는 동안에 이거라도 외우고 가자.”
그렇게 해서 남는 시간 동안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암송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4일째 아침에 식사를 마치고 산을 내려오게 되었다. 그런데 너무나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세상에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올라올 때 암울하기만 했던 나의 심령에 강력한 빛이 비친 것 같았다. 내 심령이 밝아지니 세상도 너무나도 밝은 세상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내 심령 자체가 기쁨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는 것이었다.
너무나도 밝아져 있어서 버스를 타고 오가는 사람들이 전부 천사처럼 보였다. 심지어는 길가 쓰레기통 옆에 죽은 쥐가 보였는데 그것조차도 자기 삶을 다 마친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런 꿈도 비전도 없이 실의에 잠기고 열등감에 사로잡혀 지옥 같은 마음으로 지내던 내가 어떻게 이렇게 세상을 아름답고 밝으며 마치 천국과 같은 그런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단 말인가?
아무튼 그 날 구름 위를 걷는 기분으로,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중간에 버스를 갈아타려고 기다리던 그 순간밖에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주일부터 나는 새로운 삶을 느끼며 살 수 있게 되었다. 인생이 완전히 달라지는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7년 후에 나는 새로운 사실 하나를 깨닫게 되었다. 사실 그 동안 내가 어떻게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는지가 항상 궁금했었다. 내가 예수 믿겠다고 먼저 작정한 것도 아니었고, 누가 영접기도를 시킨 것도 아니었다.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어서 고민하다가 이제 죽어도 예수는 안 믿겠다고 선포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떻게 내가 그런 천국과 같은 빛을 체험하고 예수님을 믿을 수 있게 되었는지 나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기도하는데 내 귀에 속삭이는 것 같은 음성이 들렸다.(육성은 아니다.)
“그때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너의 신앙고백으로 받았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나 자신도 몰랐지만 그 때 심심해서 외웠던 사도신경이 나의 신앙고백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 신앙고백으로 인하여 성령님께서 빛으로 나에게 오셨던 것이었다.
우리들이 지금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것은 내가 믿은 것이 아니다. 믿는 과정이나 방법은 전부 다르지만 내가 지금 믿고 있는 것은 전혀 내 공로가 아니다. 전부 하나님의 은혜이다.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다가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든, 믿자말자 확신을 가진 사람이든 관계없다. 모태신앙이지만 다 성장한 후에 예수님을 만날 수도 있고, 감옥살이를 하다가 예수님을 만날 수도 있지만, 지금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고 있는 사람들은 전부 100% 하나님의 은혜로 믿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 전부 하나님의 은혜라면, 그러면 내가 지금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 자체가 엄청난 표적인 것이다. 내 마음대로 예수님을 믿을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지금 내가 예수님을 믿고 있다면 이것보다 더 큰 표적은 없다. 달리 무슨 표적이 필요한가!
물론 우리는 표적을 구해야 할 때가 있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려면 그 일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증거로 간직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확신을 가지고 어떤 역경이 와도 끝까지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표적에만 기대서는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기가 어렵다.
표적은 하나님께서 필요에 의해서 주시는 것이지 사람의 필요를 따라 주시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표적은 우리가 믿음으로 행할 때 주시는 증거이다. 또한 표적은 구하면 구할수록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표적만을 구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표적이 필요하다고 느낀다면 표적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예수님을 진짜로 믿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진짜로 예수님을 믿는데 표적이 없어서 확신을 못한다면 어쩌면 그 믿음은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내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큰 표적이기 때문이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있다면 나는 절대로 부정할 수 없는 표적을 가진 것이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있다면 그것은 절대로 우연히 일어난 일일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지금 예수님을 믿고 있다면 사단은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완전 표적을 가진 것이다. 내가 지금 예수님을 믿고 있다는 완전한 표적을 가슴 깊이 간직하자. 그리고 거기에서 나오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자.
예수님 탄생 자체가 표적이다.
그러나 사실 가장 큰 표적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다. 목자들이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킬 때 주의 사자가 나타났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치면서 무서워 놀라는 목자들에게 천사가 말한다.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눅 2:10-12)
강보에 싸여 누운 아기 예수가 그리스도 예수의 표적이라는 것이다. 그냥 보기에는 갓난아기에 불과하지만 그 아기 예수가 바로 성경에서 예언한 메시아 구주라는 것이다. 우리가 믿고 있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표적이요 증거라는 것이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증거라는 것이다.
이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에 대하여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주장하는 바를 들어보면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논리를 편다.
“예수가 그리스도로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역사적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사람이 그 예수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 자체보다는 그것을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뒤바뀐 순간이다.
그렇다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나의 어머니가 나를 진짜로 낳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가 이 여인을 내 어머니로 받아들이느냐 안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이 무슨 궤변인가? 그럼 내가 어떤 여자를 내 어머니라고 정해놓고 마음속에 받아들이면 내 어머니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나를 낳지도 않은 사람을 어머니로 내가 정하면 그뿐일 수는 없는 것이다.
기독교는 예수님이 지금도 살아계시고 우리의 구원자 되시며 그분을 생명으로 믿을 때에 구원이 이루어지는 데에서부터 시작된다. 예수님이 구원자가 아니고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우리는 굳이 힘들게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없다.
과거에 분명히 33년 동안 이 땅에서 사셨고, 사람들의 죄를 사하셨으며,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친구이셨고, 마침내 우리들의 죄를 짊어지시고 친히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고, 40일을 이 땅에 머무시다가 승천하셨고, 그리고 언제인가는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 다시 오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의 실체이고 역사적인 사실이며 이 사실을 믿는다면 더 이상의 표적은 필요가 없다. 물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증거로 주실 때가 있지만 그것은 표적을 쫓으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 사명을 끝까지 잘 감당하라고 주시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신 예수 그리스도, 그보다 더 큰 표적은 있을 수가 없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가장 확실한 표적인 것이다.
역사적인 예수님의 실체를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에 대한 의심이나 원망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물론 때로 너무나도 힘이 들 때에는 간혹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힘들기 때문에 겪게 되는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다. 믿음으로 이겨내고 나면 그런 생각은 다 사라지고 확신이 남을 것이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자 표적인 것이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2-24)
표적을 구하는 것도 좋지만 그 표적보다 더욱 확실한 표적을 믿는 것이 더 우선적이다. 이미 주신 표적을 믿지 못하고 다른 작은 표적에 매달리고 있다면 그 신앙은 다시 점검해 보아야 한다. 달이 낮에 보이지 않는 이유는 햇빛이 비치기 때문이다. 달빛처럼 작은 표적들을 구하지 말고 햇빛처럼 비교할 수 없는 예수라는 표적을 믿어야 한다. 햇빛처럼 항상 존재하는 표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믿지 못하는 이 세태를 본받지 말자.
예수님의 부활이 가장 큰 표적이다.
하지만 믿음이 적은 사람들은 그 때마다 표적을 구한다. 사실 표적을 주어도 그것을 표적으로 인정하지도 않을 사람들이다. 예수님께서도 이 사실을 잘 지적하셨다.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마 12:38-39)
누가복음에서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눅 11:29-30)
그리고 예수님은 이 말씀에 덧붙여서 보충설명까지 해 주신다.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눅 11:32)
요나 선지자가 니느웨에 복음을 전하라는 여호와의 명령을 거부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다가 풍랑을 만나 바다에 던져졌고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켰다가 사흘 만에 토해낸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여호와의 명령대로 니느웨 성에 가서 사흘 동안 니느웨의 멸망을 외친 결과 니느웨 사람들이 전부 회개하고 구원받았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런데 그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외침에 회개한 이방인 니느웨 사람들이 심판 때에 나타나 유대인들을 심판하리라는 말씀이 아닌가! 말하자면 선지자 한 사람의 복음을 전해 들었던 이방나라 니느웨 사람들이 전부 회개하였는데 요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놀라운 표적을 보였음에도 회개하지 않는 유대인들에 대한 경고가 아닌가!
물론 이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을 말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에 보여주실 표적이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고 하신 것은 아직 예수님의 부활을 겪어보지 못한 유대인들에게 앞으로 주실 강력한 표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큰 표적을 보여주어도 안 믿는 사람은 안 믿는다는 것이다. 표적은 그것을 믿는 사람에게 표적이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냥 신기한 현상일 뿐이다.
병 고침도, 소경이 눈을 뜬 것도, 나병환자가 깨끗하게 나은 것도, 죽었던 나사로를 살린 것도, 심지어 풍랑을 잠잠케 하시며 어린아이 도시락 하나로 오천 명을 먹이신 것도, 물 위를 걸으신 것도 예수님의 육체의 부활에 비하면 아주 작은 표적에 불과하다. 그러나 온갖 신비한 표적들도 너희에게는 아무 쓸 데 없다는 말씀이다. 오병이어로 남자만 오천 명을 먹이셔도 고작 한다는 것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는 것이었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옥에 갇혀 있던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시켜서 예수님이 정말 그리스도 맞느냐고 질문을 했을 때 예수님의 대답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 11:5)
전부 예수님이 직접 행하신 기적들이요 표적들이다. 그리고 그런 표적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 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표적들을 수없이 보았음에도 또 다른 표적을 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표적 구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 한 가지만으로도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더욱 확실하게 만들어줄 뿐이니까. 중요한 것은 표적을 표적으로 받아들이는 살아있는 믿음이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부활도 아무런 표적이 되지 못한다. 꽃 한 송이를 보고도 하나님의 영광을 느끼는 마음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마 6:29)
중복되는 이야기이지만 예수님의 육체적, 역사적 부활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그 어떤 표적도 소용이 없다. 예수님의 부활을 사실로 믿는 사람에게만 복음은 복음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역사적 부활을 믿지 못한다면 그것은 복음일 수 없다. 그들에게는 철학적인 예수님, 사회운동가나 혁명가로서의 예수님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살아 계시는 예수님,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어떤 표적도 그들에게는 아무런 증거가 되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표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은 두 부류가 있다. 하나는 아예 예수님의 정신 운운 하며 사회개혁가로서의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도외시하고 현실 속에서 펼쳐지는 사소한 표적을 구하며 돌아다니는 사람들이다. 한 쪽은 지나치게 냉랭하고 다른 한 쪽은 너무나도 뜨겁다.
표적 자체를 아예 믿지 않는 사람들도 문제이지만, 표적만을 따라다니는 사람들도 큰 문제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면 표적을 구하지 않아도 된다. 예수님의 표적을 믿는 그 믿음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표적 자체도 중요하지만 표적을 믿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우리에게는 기적이지만 하나님께는 기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표적을 구하지 말라.
나는 표적을 구하라고 권면하였다. 그리고 표적을 버리라고 권면하기도 하였다. 이제 표적을 믿으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데 표적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다른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우리는 표적을 구해야 할 때도 있다. 인간은 육신을 입고 있어 하나님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표적을 구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지나치게 표적을 의존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의지하는 표적을 버리라고 말한 것이다. 표적은 필요하지만 표적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 표적을 주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말한다. 표적이 필요할 때는 그 표적을 받은 후에 표적을 주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겠다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 그런 결단이 없이 예수님을 시험하는 표적을 구한다면 그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표적을 주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것도 아니면서, 또는 지금까지 순종하지도 않아 왔으면서 또 다른 표적을 구한다면 예수님은 결코 표적을 주지 않으신다.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를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막 8:11-12)
그런데도 또 다른 표적을 구한다면 그 때에는 사탄이 주는 표적 밖에는 받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표적을 믿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을 시험하는 신비한 표적을 구한다면 예수님은 주지 않으시는데, 그런데도 자기가 표적을 받았다면 그것은 가짜 표적이요, 가짜 표적은 사탄이 주는 표적밖에 없기 때문이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 24:24)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은 그 표적을 주신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하겠다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 그런 결단이 없이 표적을 구하기 때문에 때로 사탄의 종노릇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무당과 같은 기능과 역할을 하는 거짓 선지자가 되는 것이다. 성도들은 그런 가짜 선지자들의 먹잇감이 되어 그들이 협박에 두려워하고 그들이 주는 가짜 복에 환호하고 사단의 권세에 복종하게 되는 것이다.
표적을 구하라. 그리고 그 표적을 믿으라. 또한 그 표적을 주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라.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표적은 그 말씀을 증명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표적을 주신 하나님만을 굳게 믿고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기 위해 애쓰자. 그것이 표적을 주시는 하나님의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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