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복음서 4독을 마치면서
세례 요한을 생각하며
세례 요한은 어릴 때부터 광야에서 생활했습니다.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눅 1:80)
요한이 몇 살 때부터 빈 들에서 살았는지 명확하게 나와 있지 않지만 아무튼 세례 요한은 적어도 철이 들 무렵부터는 광야에서 생활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비록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세상과 동떨어져서 살면 세상 물정에 어두울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시류를 정확하게 읽고 있었습니다. 물론 왕의 통치에서 나온 이야기들이지만 세례 요한은 분명한 영적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차지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마 14:3)
하지만 왕궁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 당시 백성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습니다. 회개의 세례를 베풀 때 사람들이 와서 어떻게 하는 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될 수 있는지를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세례 요한은 직업에 따라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분별해 주었습니다.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눅 3:12-14)
물론 이런 정도를 가지고 세례 요한이 시류를 정확하게 읽고 있었다고 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냐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에 대한 모든 관심을 끊고 빈 들에서 생활하는 사람이 이런 판단을 쉽게 내릴 수는 없습니다. 적어도 세례 요한은 세상과 사람들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고민해 왔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태중에서부터 성령이 충만한 세례 요한이었지만, 그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눅 1:15-16)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가는 길을 어떻게 하면 바르게 가르쳐주어 제대로 인도하느냐 하는 것이 오매불망 세례요한의 소망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은 세상 밖에 있었지만 언제나 촉각은 세상에 두고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 세상 소식 끊은 지 16일째 되고 있습니다. 저는 세상 밖에서 세상의 소식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한시적이지만 세상 속에서 세상 소식을 끊어보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리하여 거대한 세속의 물결 한가운데에서 서서 그 물결을 견뎌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견디는 것은 맞는데 세상의 물결에 대항해서 견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 소식에 대한 참기 어려운 궁금증을 견뎌내고 있습니다.
물론 그 속에서 살고 있으니 그 소식들이 매우 궁금해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소식에는 귀와 눈을 닫고 하나님께만 귀를 열어두고 눈을 뜨고 하나님만 바라보겠다는 의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갑자기 육성으로 말씀을 주시거나 밤에 꿈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저에게 전달해 주시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이 하나님의 마음, 그 음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복잡하고 유혹도 많고 시험투성이인 세상에서 그나마 우리의 영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찌하든지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하여 뒤를 돌아보고 하나님을 향하여 소리 높이 외쳐보기도 하고 고개를 돌려 하나님을 바라보려고 안간힘을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들 주변에는 너무나도 많은 복잡한 소리가 들리고 화려한 볼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지 않습니까? 웬만해서는 하나님을 바라보기 힘든 세상입니다. 어지간해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힘든 세상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다 해도 곧 세상 속에 묻히게 되어 그 말씀이 흐려지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 소리에 휩쓸려 사라져버리기가 일쑤입니다. 그래서 한시적으로라도 세상에 대해 귀를 막고 눈을 감고 예수님께 집중해보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시도라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뒤로 미루더라도 세상 소식을 끊는다는 것이 저를 무척 어렵게 했습니다. 처음에는 사복음서를 하루 3시간씩 읽는 것은 부수적인 일이었습니다. 신문, TV, 인터넷, SNS 등 세상과 교통하는 수단들을 일체 차단하고 그 시간에 뭔가 책도 읽고 글도 쓰고 그렇게 생산적인 일을 하고자 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시작해보니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것은 자꾸 미루어지고 성경 읽는 일이 부담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꼭 해야 할 일을 못하고 부수적인 일만 건드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만 2주를 보내고 나니 이제는 좀 자리가 잡힌 듯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이전보다 조금 자유로워졌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것은 부수적인 일이 되었고, 오히려 사복음서를 3시간씩 읽는 것이 주된 일과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서를 소리 내어 빨리빨리 읽으면서도 그때그때 주시는 깨달음이나 느낌을 기록하고 시간을 내어 정리하는 일이 이제는 자연스럽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기도원에 들어가 있으면 세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는 반면에 세상 소식과는 완전히 끊어져서 내려올 때에는 또다시 세상에 적응해야 하는 과제가 남습니다. 보통 부흥사들이 많이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기도원에 가서 큰 은혜 받고 세상에서 신앙인답게 살리라 다짐하고 내려오지만 집안에 들어서자 말자 남편의 핍박하는 소리에 받은 은혜고 뭐고 다 날려버린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우리는 기도원에 들어가야 할 때가 있고, 저도 분명히 기도원에 들어갈 필요가 있을 때가 생길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기도원에 들어가서 모든 소식 끊고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대신에 생활 속에서 세상 소식 끊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더 하나님과 가깝게 된 길이 아닐까 해서입니다. 그리고 그 동안에 성경의 일부분을 반복해서 8회 읽게 되는 일이 아주 중요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같은 성경을 반복해서 읽는 기회가 거의 없을 테니까요. 그리고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직접 음성이 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한 번 읽을 때가 다르고 두 번 읽을 때가 다릅니다.
성경의 한 부분을 놓고 성령님의 임재하심을 기다리면서 묵상하는 일이 굉장히 중요하지만 성경반복읽기는 내가 원하거나 원하지 않거나 모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8회를 반복하게 되니까 혹시 다른 생각하다가 내용을 놓치게 되더라도 다음번 읽을 때는 내용이 다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내용을 빠짐없이 살펴보고, 그 때 그 때 다른 성령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4주를 보내고 나면, 세상에서 열심히 살다가 문득 하나님이 그리워질 때 그때 또다시 세상소식 끊기를 시도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 때에는 복음서가 아니라 사도행전일수도 있고 요한계시록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이후에 이런 시도를 하시는 분이 있다면 자신에게만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에 깊이 잠겨 자신의 희미했던 신앙이 회복되는 놀라운 순간을 맞이할 수 있으리라 확신하는 바입니다.
다시 세례 요한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세례 요한의 삶도 예수님처럼 3대 초반에 감옥에서 목 베임을 당함으로써 그 장엄한 일생을 마쳤습니다. 세례 요한이 육신적으로는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났고 예수님의 6촌 형님 되며 복중에서 서로 만난 적이 있습니다.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눅 1:36)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눅 1:41)
세례 요한의 삶의 목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오실 메시아의 길을 평판하고 곧게 닦아내는 역할이었습니다. 그가 오셔서 성령의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는 광야의 외침소리였습니다. 그가 곧 오시니 빨리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들을 맺어 영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급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의 외침 소리를 들은 백성들이 다 나아와 요한이 베푸는 회개의 세례를 다 받았습니다. 일부 교권자들 집단 이외에는 다 받은 것 같았습니다. 무엇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못 되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세례 요한은 철저하게 그리스도를 예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었지만 자기는 결코 선지자도 그리스도도 아니라고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그랬던 그이지만 하필 바로 그 때 메시아가 나타났다는 것은 세례 요한의 사명적 정체성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들었습니다. 만약에 세례 요한이 왕성한 활동을 펼치다가 죽고, 그 후에 예수님이 오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굳이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자신이 거부하든 아니든 모든 영광을 홀로 다 받다가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람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을 그 때에 메시아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점점 예수님께로 몰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세례 요한 자신은 안 그랬지만 요한의 제자들이 불안해졌습니다. 그래서 자기들 스승인 요한에게 보고를 합니다.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요 3:26)
이 때 세례 요한이 그 유명한 말을 납깁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 3:30)
그래서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훌륭한 자니라”(눅 7:26)
그리고 심지어 인간 중에서 가장 큰 자라고 결정적인 칭찬을 내리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눅 7:28)
세례 요한을 선지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라고 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준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눅 7:28)
세례 요한이 사람들 중에서는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는 칭찬을 들은 이유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역할과 사명을 참으로 잘 감당하였습니다. 그것을 증명하는 말이 곧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귀한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그 말 한 마디로 세례 요한의 됨됨이나 그의 열정이나 순수성이나 진실성이 전부 증명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본받아야 할 표상이라면 누구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한 마디로 세례 요한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서에도 몇 번 나오지 않는 인물입니다만, 그러나 언급되지 않으면 안 될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다 같이 세례 요한의 삶의 방향을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례 요한이 달려가던 목적지가 우리의 목표 지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례 요한이 품고 있던 그 순수성, 진실성이 우리의 마음의 열매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례 요한의 위대성을 일반화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특별히 태중에서부터 성령 충만을 받아 나실인으로서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삶의 방식을 따라 살았던 특별한 사역자인데, 어떻게 우리가 세례 요한이 되어야 하느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흔히 ‘작은 예수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예수쟁이, 기독교인, 크리스천 등 여러 가지 표현이 있지만 작은 예수라는 표현은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목표방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고 예수님이 가르치신 대로 실천하고 예수님이 사셨던 방식들을 고스란히 따라가는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예수님처럼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길을 닦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례 요한이 우리의 표상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그리스도 예수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오시는 길을 준비했던 인간 요한이 오히려 우리에게 더 좋은 방향을 제시했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이 되어서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하기보다는 예수님의 길을 준비한 세례 요한처럼 사람들 속에, 세상 속에 예수님이 오실 수 있도록 길을 예비하는 것이 오히려 더욱 효과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앞장서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기 보다는, 물론 온 몸을 부딪쳐가며 사명을 감당하겠지만, 예수님께서 사람들 가운데 임하실 수 있도록 끊임없이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것이 진정으로 우리의 할 일이 아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나라 신앙지도자들에게 넘치는 것이 자기주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고, 내가 무엇인가를 남기려고 하고, 내가 무엇을 주려고 하는 이런 것들이 오히려 예수님의 사역을 훼방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례 요한이야 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신앙인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고, 그 결과 예수님의 사역은 처음부터 그 본래의 길을 갈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세상 밖에서 세상을 들여다보고 거침없이 세상을 나무라되 그 목적은 단지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는 것이라는 세례 요한, 하필 동시대에 태어나 예수님보다 먼저 왔지만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빛이 점점 어두워감에도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사실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어야 할 말을 사심 없이 밝혔던 세례 요한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표상이요 가야 할 방향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의 영광이나 복이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어떻게 되시느냐는 데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복음이며 우리가 생명처럼 받들어야 할 참 가치가 아니겠습니까? 복음서 4독을 마치면서 새삼 세례 요한이 그리워집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광이 저를 통해 조금이라도 드러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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