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박5일 노숙체험

노숙 26. 4박5일 노숙을 마치고

김완섭 목사 2021. 2. 17. 16:10

45일 노숙을 마치고 나서

 

노숙체험을 시도하게 된 의도는 비록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모든 환경을 떠나 아무데도 기댈 데가 없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 앞에 서서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우선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진정한 자기 개혁이 시작되기를 기대하는 것이었습니다. 꼭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전혀 접해볼 수 없는 일종의 극단적인 상황에 놓였을 때 비로소 본질적인 핵심으로 똑바로 들어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저의 이번 노숙하기는 꽤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전부는 아닐지 모르지만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어쩌면 이런 일이 일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일상이 아니라도 언제 어떻게 발각되어 형벌에 처해질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오로지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생존해나갔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기댈 데는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 밖에는 없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일대일의 관계가 아닐 수 없었고, 주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유지되지 않았다면 하루도 자기 신앙을 지키기 어려운 상태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리스도 신앙을 목숨으로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전세계적으로 그런 환경을 만나는 그리스도인은 극소수일 뿐입니다. 물론 그런 극심한 박해 환경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선교지에는 온갖 순교환경을 만나고 있는 수많은 헌신된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의 자유가 있는 곳에서라도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해야 하는 수많은 성도들과 사역자들이 있습니다. 육체적인 생명뿐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누림마저도 제공받지 못한 수많은 사역자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들의 삶의 모델들이 일반 성도들에게 잘 다가가기 어려운 것도 또한 사실입니다. 그럼으로써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모습은 너무나도 안일하고 나태하고 진정한 삶의 모델을 무시하거나 애써 잊으려는 그런 환경 가운데 놓이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존이 아니라 일반 생활인으로서의 필요만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노숙과 같은 경험은 아주 특별한 체험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은혜는 노숙을 필요로 할 만큼 허술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는 아주 완벽합니다. 조금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다만 그 공로와 은혜가 너무 가볍게 취급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너무 희미해져 있고 너무 멀어져 있습니다. 당장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다급한 일들도 거의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들부터 아무리 개혁을 이야기하고 본질을 강조해도 그것이 실제적으로 신앙생활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상당히 도전적인 이 노숙체험을 제가 감행하게 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습니다.

 

제가 힘든 결단을 하고 실행에 옮기면서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무슨 음성이라도 들려주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아니면 어떤 기적적인 역사를 체험하게 하셔서 더욱 능력과 확신을 가지게 하실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어떤 음성도 들려주지 않으셨고 어떤 기적적인 역사도 베풀어주지 않으셨습니다. ! 한 가지 있기는 있었습니다. 나흘 동안 단돈 1원도 못가진 채 커피 한 잔 먹고 싶어 하루 종일 그 생각만 날 때 전도자 이종훈 목사님이 저에게 10,000원을 주신 것이었습니다. 10,000원이지만 백만 원, 천만 원 이상 가는 기쁨을 저에게 안겨주셨습니다.

 

아무 음성도 듣지 못한 채 닷새 만에 귀가했지만, 얻은 것은 너무나 많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방법은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직접 부딪치지 않으면 결코 느끼지 못했을 그런 내용들, 뚜렷하지는 않지만 저 자신에 대해서, 저의 내면에 대해서 가장 적나라하게 들추어내신 것 같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목소리였고, 그것이 가장 큰 은혜였습니다.

 

만약에 다른 어떤 분이 45일 간의 노숙을 시도한다면 사람마다 받는 은혜는 많이 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똑같은 상황에서 진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노숙자를 깊이 이해하는 방향으로 은혜를 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는 노숙자 사역에 대해 깊은 고민을 얻는 사람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은혜이건 간에 노숙 체험은 좋은 훈련이 될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얻고자 하는 은혜를 기획했을 때 우리의 계획대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의 형편과 상황에 따라 성령님께서 각각 다른 은혜들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어떤 특별한 은혜가 필요하거나 새로운 결단이 있어야 하거나 많은 것을 실패하여 하나님의 진짜 음성을 듣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이 노숙체험을 시도한다면 하나님의 확실한 음성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45일간의 노숙체험이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탈북한 분들의 이야기에 비하면 이것은 배부른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의 육체적 경험입니다. 그렇게 탈북하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들은 부지기수입니다. 반면에 탈북의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게 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어떤 고난이나 역경 자체보다는 그 일을 겪을 때 하나님과 어떤 관계인가가 훨씬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비록 45일이지만 오로지 하나님만 의지하는 소중한 경험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서울역 노숙 자체에 가치를 두는 것도 아닙니다. 만약에 서울역에서 며칠 동안 노숙해본 것이 자랑이 되거나 이것으로 하늘나라 상급에 효과가 크다거나 하나님께 공로로 내세우게 된다면 이 노숙체험은 시도하지 않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노숙체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마음껏 나누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리고 그 나눔을 통하여 평안한 이 시대의 느긋한 신앙생활에 경종을 울려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무슨 프로그램 하듯이 하나의 과정으로만 여기게 된다면 그것 또한 바른 것이 아닙니다. 목적은 하나님과 나 사이를 투명하고 가깝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밀접해져야 이 땅에서 하늘의 원리로 살면서 승리할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이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또 다른 중요한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육체의 시련을 통하여 정신적 성숙함을 얻고, 정신적인 고민을 통하여 영적인 성숙을 이루어냅니다. 영적인 깨달음만 가지고는 영적 성숙을 이루어내기 어렵고 오히려 그릇된 옆길로 빠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저는 육체적 도전을 얻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법 중의 하나가 노숙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물론 사람은 성령님의 일하심을 따라 근본적으로 변화됩니다. 성령님의 일하심이 아니라면 어떻게 우리가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영접하고 예수님을 따라 살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성령님의 은혜로 말씀을 깨닫고 우리의 생각과 삶에 대한 태도가 변화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후의 육체적인 훈련이 없이는 그리스도인의 영성이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경 속의 위대한 선배들을 보더라도 이 육체적 삶의 시련과 연단을 통하여 성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서울역 노숙체험은 바로 이 육체의 훈련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어려움이라고 해서 그 어려움 자체가 신앙생활의 보약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육체적인 고난이란 하나님을 깨닫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는 데에도 육체적인 훈련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물론 육체적인 훈련이란 꼭 직접적인 고통이나 괴로움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삶 가운데에서 만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현실적인 고난이 바로 육체의 훈련입니다. 마치 동방의 의인 욥이 육체적인 모든 고난을 경험하고서야 하나님께 더욱 진지한 고백을 드릴 수 있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생활 자체가 육체적인 어려움을 동반하는 초대교회와 같은 환경을 만들어 그 속에 자신을 내맡겨 보는 것이 노숙체험의 목적이요 결론입니다. 잔잔하지만 엄청난 은혜를 부어주신 귀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4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