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하신 예수님
‘노숙자 예수님’이라기보다는 ‘노숙하신 예수님’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보듯이 갈 곳 없고 먹을 것 없어 집단으로 길거리에서 잠을 자는 노숙인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중에서 노숙을 많이 하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물론 노숙의 상당 부분은 밤새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위함이었지만, 아무 데도 의지할 곳 없이 마을의 뒷골목이나 산이나 들판에서 많이 주무셨을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과 대면하셨을 것이 틀림없다고 확신하게 됩니다. 물론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니 하나님과 대면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하겠지만,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계신 이상 영적 세계에서와 같이 언제나 하나님과 대면하신 것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항상 성령님을 힘입어서 일하신 것이 성경에 자주 나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께서 비둘기같이 임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마 3:16)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성령으로 충만해지셨습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눅 4:1)
40일 동안 금식기도하신 것도 성령에 이끌려서 하신 것입니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막 1:12)
그렇게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후에 갈릴리로 나아가신 일도 성령의 능력으로 가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눅 4:14)
예수님께서 기름부음 받으시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가 보게 하시는 것은 성령께서 주께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눅 4:18-19, 21)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하실 수 있는 것도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요 3:34)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늘 대면하실 수 있는 원리를 찾아보았으면 좋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시니까 당연한 것이 아니라, 분명히 100% 육신을 입고 계시는 주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사셨기에 그렇게 하나님과 늘 대면하실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 방식을 깨닫고 그 방식을 따르기 위해 성령의 충만함을 입는다면 주님만큼은 몰라도 중요한 순간순간마다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지금까지 조금씩 살펴보았던 그 원리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4박5일 노숙체험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으셨고 심지어 머리 둘 곳조차도 없으셨던 노숙자 예수님이 하나님과 대면하실 수 있었던 여러 요소들을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세상에서는 천대받고 멸시당하고 채찍 맞으시고 모욕당하시는 예수님이신데 하나님과는 늘 대면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점이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으셨던 이유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깊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가겠으며 어떻게 예수님에까지 자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처럼 될 수도 없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예수님의 뒤를 따라갈 수는 있습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 삶의 목적이 되고 방향이 되고 푯대가 된다면, 그리고 그렇게 주님을 따라가기 위하여 성령의 충만을 힘입기를 간구하며 실천하려고 애를 쓴다면, 우리는 우리 신앙의 올바른 방향을 따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일을 성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모델들이 많이 나와야 하고 이 글을 읽는 우리들 자신부터 하나님의 실체를 만나고 깨닫고 하나님과 만나면서 세상을 이기는 성도들이 다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한국교회를 살리는 길이고 참된 복음의 능력으로 예수님과 사람들 사이의 통로가 되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4박5일 동안 서울역 근처에서 노숙을 한 것도 조금 더 저 자신을 벌거벗기고 적나라한 저의 모습을 하나님 앞에 가감없이 드러내보고 싶어서였습니다. 예수님처럼 밥 한 끼조차도 의지할 데가 없는 상태가 되어 하나님 앞에 선다면 과연 나는 어떤 모습일까 확인해 보고 싶었고, 더 나아가 정말 그런 상태에서 하나님과 만나고 하나님을 깨닫고 하나님의 실체를 더욱 구체적으로 느껴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물론 정말로 모든 것을 완전히 버린 상태로 하나님과 대면하려는 것은 못 됩니다만, 짐짓 그런 상황 가운데 저를 던져보고 목숨이 붙어있는 동안 제가 어떻게 더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마음을 품고 세상을 향하여 나갈 수 있을까에 대한 처절한 고민을 담았던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하느냐, 이렇게까지 해야 하느냐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결과론적으로 말하자면 “네. 이렇게까지 해야만 됩니다.”라는 대답을 들려드릴 수 있습니다. 순간순간 힘들었지만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어떤 말씀을 주실까에 대한 기대도 컸습니다. 육성이나 영적 음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상황 속에서 수많은 음성을 들려 주셨습니다. 신앙인은 때로는 위협을 당할 수도 있고 심하면 순교의 상황에까지 다다를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은 신체의 위해나 생명의 위협까지도 느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경험들을 만나게 된다면 정말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면전에서 만나는 경험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일평생 주님 곁을 떠나지 않고 오로지 주님만을 위하여 헌신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경험은 한 사람을 완전히 변화시키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경험을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노숙을 체험해 본 것입니다. 만약에 노숙체험이 두렵다면 순교상황에는 어떻게 견디겠습니까? 단 며칠 동안이지만 노숙자 예수님을 진지하게 경험해 본 귀중한 날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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